경계를 둘러 일곽을 이룬 자리에 '자미단사적비'가 서 있다. 배롱나무 꽃을 한자로 자미화라 하고 자미단은 모은 선생이 거닐던 배롱나무 언덕을 가리킨다.
산으로 둘러싸인 협곡의 길이다. 그러나 하천과 철도와 지방도와 고속도로가 모두 함께 흐르니 얼마나 중요한 통로인지 알겠다. 깊고, 가장 한갓진 길을 달리다 모곡(茅谷)으로 빠져나간다. 길은 더욱 좁아졌으나 놀랍게도 세상은 활짝 열려 푸른 들과 먼 산 아래 옹기종기 자리한 마을까지 환하다. 마을로 향하는 첫 번째 동구길에 '고려동(高麗洞)'이라 새겨진 커다란 표석이 서 있다. 고려, 조선 건국과 함께 사라진 그 나라가 맞다. 약 600여 년 전 고려사람 이오(李午)도 이 동구에 서 있었고, 저 산 아래 골짜기로 걸어들어갔다. 오늘 고려동 가는 길은 온통 배롱나무 꽃길이어서 붉은 꽃들이 모두 내 쪽으로 달려온다.
고려동 입구에 배롱나무가 무성하다. 나무마다 제 뜻대로 꽃을 피웠고, 몇 그루 장한 나무 아래에는 어디의 어떤 후손이 심었다는 기념 표석이 있다.
자미단의 가장 깊숙한 자리에서 배롱나무 보호수가 자리한다. 높이가 8미터, 둘레 1.3미터로 이오선생의 충절과 고려동 전체를 상징한다.
고려동 동구의 표석. 약 600여 년 전 고려사람 이오는 나라가 망하자 이 길을 걸어 배롱나무 붉은 꽃이 빛나는 골짜기로 들어갔다.
◆ 자미화 피어나는 고려동
이오 선생의 본관은 재령(載寧)이다. 할아버지는 상장군(上將軍)을 지낸 이소봉(李小鳳), 아버지는 종부령(宗簿令)을 지낸 이일선(李日善)이다. 부인은 전적을 지낸 남의(南毅)의 딸 의령남씨(宜寧南氏)로 슬하에 아들 이개지(李介智)를 두었다. 아버지 이일선은 공민왕의 외손이었다. 그는 고려의 국운이 쇠하자 가족을 거느리고 남쪽으로 내려와 밀양에서 은거하다 세상을 마쳤다. 그의 넷째 아들 이오는 일찍이 포은 정몽주와 목은 이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공민왕 때 성균관 진사가 되었다. 고려가 망하자 이오는 두문동으로 들어가 '의를 지키겠다' 결의하고 가족과 함께 남하했다. 그는 밀양에서 처가인 의령을 자주 오갔다고 한다. 그러다 모곡 골짜기 안에서 붉게 빛나는 꽃을 보게 된다. 배롱나무 꽃이었다. 그는 꽃 아래를 천천히 거닐다가 마침내 살 곳으로 정하고 호를 모은(茅隱)이라 하였다.
마을 입구 좁은 개울물 가에 배롱나무가 무성하다. 나무마다 제 뜻대로 꽃을 피웠는데 어느 것은 만개라 할 만하고 또 어느 것은 이제 시작이다. 몇 그루 장한 나무 아래에는 어디의 어떤 후손이 심었다는 기념 표석이 있다. 또 경계를 둘러 일곽을 이룬 자리에는 '자미단사적비'가 서 있다. 배롱나무 꽃을 한자로 자미화라 한다. 자미단은 모은 선생이 거닐던 배롱나무 언덕을 가리킨다. 사적비에는 어느 날 후손이 모곡에 와 보니 시냇물에 언덕이 무너져 배롱나무가 기운 것을 고쳐 쌓았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단기 4332년의 일이니 1997년이다. 이 정원은 무려 6세기 동안 보살펴진 셈인가. 21세기 사람의 발걸음이 조심스러워진다. 자미단의 가장 깊숙한 자리에서 놀라운 배롱나무 한 그루와 마주친다. 줄기는 대체 몇 개이고 가지는 얼마나 뻗은 건지. 보호수라는 안내판이 있다. 높이가 8m, 둘레는 1.3m, 수령은 지워져 있다. 숲 같은 가지 속에 꽃은 보이지 않는다.
높직한 흙돌담은 고려담, 개울가 배롱나무 정원은 자미단이다. 협문 너머 자미정 지붕이 살짝 보이고, 왼쪽의 삼문은 고려동 종택의 삼문이다.
자미정은 고려동 종택의 바깥사랑채로 한국전쟁으로 불탄 것을 복원했다. 담 너머로 숲 같은 배롱나무가 보인다. 하늘가 우듬지에 꽃이 피어 있다.
개울에 놓인 고려교를 건너면 높직한 흙돌담이다. 이 담을 고려담이라 부른다. 모곡으로 들어온 이오선생은 자미화 꽃그늘 곁에 높은 담을 쌓고 '고려동학(高麗洞壑)'이라는 비석을 세웠다고 한다. 고려 유민들이 모여 사는 골짜기라는 뜻이다. 담 밖은 조선 왕조의 땅일지라도 담 안은 고려인의 땅이라는 선언이었다. 북쪽 담장 너머에는 대나무를 심었다. 조선을 바라보지 않겠다는 결의였고, 이오 선생은 죽을 때까지 북쪽을 바라보지 않았다고 한다. 담 안의 사람들은 우물을 파고 논밭을 일궈 자급자족했다. 담 밖의 것은 입에 대지도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곳을 고려동, 고려촌, 혹은 담안마을, 장내동(牆內洞)이라 했다.
조선 태종은 이오선생을 여러 번 불렀다. 그러나 나아가지 않았다. 그는 아들에게도 조선왕조에서 벼슬하지 말 것과 자신의 신주를 다른 곳으로 옮기지 말 것을 유언했다. 그의 유언에 따라 아들 개지는 끝내 벼슬하지 않고 한평생을 마쳤다. 흙돌담을 따라 조금만 오르면 협문이 보이고 안으로 들어서면 백일홍 꽃길 너머 자미정(紫薇亭)과 마주한다. 자미정은 이오 선생의 종택 한쪽에 자리한 바깥사랑채다. 마루에 들기름을 발랐으니 한동안 앉지 말아달라는 메모가 붙어 있다. 담 너머로 숲 같은 배롱나무가 보인다. 아, 하늘가 우듬지에 꽃이 피어 있다.
안채와 아래채 뒤편은 텃밭이다. 이 네모반듯한 전답을 고려전이라 부른다. 옛날 고려동 사람들은 논밭을 일궈 자급자족했으며 담 밖의 것은 입에 대지도 않았다고 한다.
정면은 율간정, 왼쪽은 모계정사, 오른쪽 담 너머는 효산생가다. 모두 이오선생 후손들의 유적으로 길 따라 차례로 지나게 된다.
◆ 고려동 종택
종택에 들어서면 안마당을 중심으로 안사랑채인 계모당, 안채, 아래채, 곳간이 'ㅁ자' 형으로 배치되어 있고 안채 뒤편에 사당이 자리한다. 건물 전체는 조선 중기의 양식을 보여주는데 대부분 한국전쟁으로 불타 복원한 것이라 한다. 안채 시렁에 올려진 대바구니에는 무엇이 담겨 있을까. 반들반들 윤나는 마루마다 들기름이 스미고 있다. 아래채 툇마루에는 약재로 보이는 가지가 수북하다. 하던 일 멈추고 어디로 출타하셨나, 밀짚모자가 남겨져 있고 오직 까치의 지저귐만 종택을 울린다.
안채와 아래채 사이 모서리에는 우물이 있다. 사각의 우물은 견고하고, 머릿속에 박혀 있는 우물의 전형보다 땅딸막하고, 그래서 기운차 보인다. 가운데 보석처럼 박힌 둥근 돌에 '복정'이라 새겨져 있다. '복(鳆)'은 전복을 뜻하는데, 여기에 한 가지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오선생의 손부인 여주이씨는 효성이 매우 깊었다고 한다. 어느 날 노환으로 시름시름 앓던 시모가 전복이 먹고 싶다고 했단다. 이 산골 어디에서 전복을 구하겠나. 여주이씨는 전복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고 그 정성에 하늘이 감복해 우물에서 전복이 나왔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이름을 새긴 둥근 돌이 전복 껍데기 모양 같다. 우물물은 아무리 큰 가뭄이 들어도 마르지 않는다고 전해진다.
우물을 원점에 두고 안채와 아래채 뒤편은 텃밭이다. 이 네모반듯한 전답을 고려전이라 부르는데 가지, 토마토, 고추, 호박 등 온갖 것들이 자라는 중이다. 텃밭 가장자리 감나무 그늘 아래에 두 개의 나무의자와 작은 평상 하나가 있다. 의자 하나에는 누군가가 벗어놓은 장갑 한 켤레가 가지런히 포개져 있고, 또 다른 의자에는 모양도 크기도 제각각인 오이 한 무더기가 쌓여 있다. 길섶 국화 옆에는 연둣빛 비닐봉지가 동그마니 앉았는데, 그 속에는 제멋대로 자라난 토마토 수십 개가 와글와글하다. 내 눈은 자족으로 웃건만 왜 마음은 뜨겁고 고되나.
고려동 이실원 체험농장 뒤편에 백련 밭이 넓다. 마을 앞 들도 고려전답으로 바깥 고려동이라 부른다.
텃밭을 지나 길이 이끄는 대로 가면 율간정, 모계정사, 효산정사, 효산정을 차례로 지난다. 모두 이오선생 후손들의 유적이다. 그리고 다시 자미단이다. 꽃 보느라 돌아보지 못했는데, 자미단 건너에 들이 넓다. 저 들도 고려전답으로 바깥 고려동이라 한다. 연보랏빛 참깨꽃 곁에 '고려동 이실원 체험농장'이 있다. 재령이씨 집안에 시집온 며느리를 '이실'이라 부른단다. 이오 선생의 후손들은 이곳을 떠나지 않았다. 대를 이어 살았고 지금도 20대손이 살고 있다. 체험장 문을 열자 향긋한 냄새가 훅 풍겨온다. 차가 무료라는데, 이미 향기에 젖었다. 체험장 뒤편은 연 밭이다. 커다란 백련이 부드럽고도 단단하게 피어 있다. 하얀 연밭 위로 곧 자미화가 만개하겠다.
글·사진=류혜숙 전문기자 archigoom@yeongnam.com
>>여행정보
45번 중부내륙고속도로를 타고 창원, 마산 방향으로 간다. 칠원분기점에서 10번 남해고속도로 진주방향으로 가다 함안IC에서 내린다. 함안IC삼거리에서 우회전해 직진, 함주교 건너 좌회전해 함마대로를 타고 약 3㎞ 직진하다 고려동유적지 이정표 따라 오른쪽으로 빠져나가 직진한다. 모곡삼거리에서 좌회전해 들어가면 마을 동구에 고려동 표석이 있다. 마을 안에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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