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일 오전 10시50분 부산안면옥 내부. 영업 시작까지 10분 남짓 남았지만 이미 '오픈런' 손님들이 자리를 잡았다. 홍예원 수습기자 llo1o@yeongnam.com
"2명 자리 있어요?"
지난 12일 오전 10시50분 대구 중구 부산안면옥. 연중 4월부터 9월까지만 운영하는 이곳은 평양냉면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식당이다. 문을 열기까지 10분 남짓 남았지만, 이미 7팀의 손님이 식당 안에 착석해 있었다. 20대부터 70~80대까지 연령대도 다양했다. 오전 11시가 되자 대기하던 손님들은 연이어 평양냉면을 주문했다. 1층이 금방 가득 찼고 발길은 2층으로 이어졌다.
이곳에서 만난 이어진(26)씨는 "지난해 평양냉면 유행이 시작할 때부터 궁금했던 음식이라 도전하게 됐다"며 "처음이라 낯선 맛이었지만 색다른 경험"이라고 말했다. 조선웅(33)씨도 "호불호가 강한 음식이라고 들어 어떨지 궁금해 오늘 처음 평양냉면을 먹어봤다"고 했다.
초복인 지난 15일 서울 마포구의 한 평양냉면집을 찾은 시민들이 줄을 서 있다. 연합뉴스
한때 마니아들의 음식으로 여겨졌던 평양냉면이 하나의 미식 트렌드로 자리잡고 있다. 냉면 한 그릇 가격이 1만원을 훌쩍 넘어선 고물가 시대에도 평양냉면 식당에는 개점 전부터 대기 행렬이 이어진다. SNS와 쇼트폼 콘텐츠를 통해 입소문을 타면서 음식에 더욱 생소했던 젊은 세대 사이에서도 인기를 끌고 있다.
한때 마니아들의 음식으로 여겨졌던 평양냉면이 입소문을 타고 대중적인 음식으로 자리잡고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이북 출신 실향민들 정착하며 확산…대구에만 20여곳
평양냉면은 양지나 사태로 맛을 낸 육수와 동치미를 섞은 국물과 메밀로 만든 이북 음식이다. 한국인들에게 익숙한 함흥냉면의 새콤한 맛과 달리 은은하게 올라오는 담백한 육향과 씹을수록 극대화되는 메밀 특유의 향이 특징이다. 식당마다 고기 육수와 동치미 국물의 비율, 메밀면에 전분이나 밀가루를 섞는 조리법 등이 달라 그 미묘한 차이를 즐기는 이들도 있다.
방문진(59) 부산안면옥 대표는 "평양냉면은 원래 겨울철 동치미 육수를 얼려 먹던 음식"이라며 "추운 날씨에도 '시원하다'며 먹던 이북 사람들의 호방한 기질이 담겨 있다. 국물도 숟가락을 사용하지 않고 사발째 들이키는 매력이 있는 음식"이라고 설명했다.
대구 남구에 위치한 냉면 전문점 '대동강'. 평양냉면을 강조한 외관이 눈에 띄었다. 김민진 수습기자 kmjkmj@yeongnam.com
대구에도 평양냉면을 맛볼 수 있는 식당이 20여 곳에 이른다. 한국전쟁 이후 이북 출신 실향민들이 지역에 정착하며 퍼져나갔다. 대구 최초의 평양냉면 전문점 '강산면옥'이 대표적이다. 1951년 1·4후퇴 당시 평양에서 피란 온 송익두씨가 서문시장 솥전거리에 문을 열었다. 남구 봉덕동에 위치한 '대동강'도 평양 출신인 1대 창업주가 문을 열었고 현재는 3대가 가업을 이어 운영 중이다. 1965년부터 영업을 시작해 특히 이북 5도민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SNS·방송 타고 입소문…2030 손님 크게 늘어
기존에는 마니아층만 찾는 생소한 음식이었다. 함흥냉면의 자극적인 양념과 쫄깃한 면발에 익숙한 소비자들에게는 특유의 '슴슴한 맛' 때문에 도전하기 어려운 음식이라는 인식도 있었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새 입소문을 타며 이제는 하나의 대중적인 미식 트렌드로 자리잡고 있다.
대구 중구에 위치한 평양냉면 전문점 '부산안면옥'. 1969년 문을 연 대구 대표 평양냉면 맛집이다. 홍예원 수습기자 llo1o@yeongnam.com
맛집을 소개하는 인플루언서들이 오랜 역사를 지닌 평양냉면 식당을 소개하고, 연예인들의 '평냉 먹방'과 맛집 탐방 콘텐츠가 화제를 모으며 젊은 층의 호기심을 특히 자극했다. 방 대표는 "10여 년 전부터 젊은 손님이 눈에 띄게 늘었다"며 "예전에는 부모님을 따라오는 경우가 많았지만, 지금은 친구나 연인끼리 오는 20~30대가 많다"고 말했다.
냉면 한 그릇 가격이 1만원을 훌쩍 넘어선 고물가 상황에도 수요는 꾸준하다. 지난 14일 한국소비자원 가격정보종합포털 '참가격'에 따르면 올해 6월 기준 대구의 냉면 평균 가격은 1만1천750원, 경북은 1만308원으로 집계됐다. 유명 식당은 1만3천원에도 판매하지만 개점 전부터 대기 줄이 이어질 정도로 인기가 높다.
지난 12일 오후 12시10분 대구 남구 음식점 대동강. 6팀이 대기 중이었다. 김민진 수습기자 kmjkmj@yeongnam.com
지난 12일 오전 11시30분쯤 찾은 '대동강'은 문을 연 지 30분 만에 1층이 만석이었다. 2층엔 대기자를 위한 공간이 따로 마련돼 있었다. 이날 식당에선 지역 주민뿐 아니라 타지에서 찾아온 손님, 평양냉면에 처음 도전하는 젊은 층도 쉽게 만날 수 있었다. 전주에서 왔다는 황은영(37)씨는 남편 이규호(39)씨와 친정인 대구에 오면 여름에 평양냉면 맛집을 찾아다닌다고 했다. 황씨는 "4년 전쯤 평양냉면 마니아 연예인들의 콘텐츠와 맛집 추천 등을 보고 호기심에 입문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호엽(31)씨는 "요즘 SNS에서 평양냉면 콘텐츠가 유행하고 친구들도 평양냉면 이야기를 하길래 호기심에 방문하게 됐다"고 했다.
SNS에는 '대구 평양냉면 7선' '대구 평냉 맛집 모음' 등의 게시물이 공유된다. 노포를 방문해 맛을 평가하거나 '평냉 입문기'를 담은 쇼트폼 영상도 잇따른다. 유명 식당을 차례로 방문하는 '도장깨기' 문화도 확산하고 있다.
지난 14일 인스타그램에 '대구 평양냉면'을 검색하니 나온 게시물들. <인스타그램 캡처>
◆경험 소비 일환…전문가들 "인기 계속될 것"
이 같은 현상에 대해 박태경 영남대 교수(경영학과)는 경험 소비의 일환이라고 설명했다. 박 교수는 "서울 성수동의 오래된 공장이나 창고를 개조한 공간이 인기를 끄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며 "단순히 맛있는 음식을 먹기 위해서라기보다 차별화된 경험을 추구하려는 소비 심리가 반영됐다"고 분석했다. 이어 "특히 젊은 세대에서 '이 음식을 먹어봤다'는 경험과 이를 SNS에 공유하는 과정에서 소비 가치를 느끼는 젊은 층이 많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황성준 조리기능장은 "맛집을 소개하는 인플루언서들이 노포 분위기의 오래된 평양냉면 식당들을 소개했고, 평양냉면 자체에 궁금증이 생긴 사람들이 많아져 자연스럽게 젊은 층에까지 유행이 시작됐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평양냉면의 인기가 일시적인 유행에 그치지 않을 것으로 내다봤다. 이춘호 음식전문 칼럼니스트는 "냉면 문화 자체는 사라지지 않는다"며 "평양냉면도 대표적인 물냉면으로 꾸준히 사랑받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다만 SNS 중심의 소비 트렌드에 맞춰 전통적인 원형은 유지하되 양념, 고명 등에서 다양한 변형이 이뤄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황 조리기능장도 "북한 함경 지역에서 유래한 함흥냉면과 한국전쟁 당시부터 시작된 밀면이 대중화된 것처럼, 평양냉면 역시 꾸준히 대중들에게 사랑받으며 한국의 대표 외식 메뉴로 자리 잡을 것"이라고 전했다.
조현희기자 hyunhee@yeongnam.com
김민진·홍예원 수습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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