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적인 휴식의 미학’…경북으로 떠나는 역사문화 유산 여행

  • 박종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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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6-07-22 21:00  |  발행일 2026-07-22

한자 문화권에서 휴가(休暇)는 '나무에 기대어 얻은 겨를'을 뜻한다. 대자연 속에서 잠시 숨을 고르는 '자연과의 동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벗어나 자연의 템포에 맞춰 쉬어가는 정적인 휴식의 미학이 담겨 있다. 영어 '베케이션(Vacation)'과 프랑스어 '바캉스(Vacances)'도 '비어 있다' '자리를 비우다'란 뜻을 가진 라틴어 '바카티오(Vacatio)'에서 유래했다. 어딘가로 떠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마음을 비워내는 행위가 핵심이다.


올여름, 자연과 함께 진정한 비어냄을 실천할 수 있는 경북으로 문화유산 여행을 떠나보는 건 어떨까. 경북의 수많은 문화유산은 지질·생태적 가치를 지닌 천혜의 자연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특별함을 품고 있다. 시원한 계곡물 소리와 뺨을 스치는 바람, 수천년의 이야기를 품은 경북의 문화유산 여행지를 소개한다.


◆ 폭포 소리를 벗 삼아 사색에 빠지다


보백당 김계행 선생이 고향으로 돌아와 학문에 전념하기 위해 세운 만휴정. <안동시 제공>

보백당 김계행 선생이 고향으로 돌아와 학문에 전념하기 위해 세운 만휴정. <안동시 제공>

인기 드라마 '미스터션사인'의 남녀 주인공이 한 정자를 배경으로 외나무다리에서 손을 마주잡았던 곳. 바로 경북 안동시 길안면에 자리한 만휴정이다. 만휴정은 조선 전기의 문신 보백당 김계행 선생이 말년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건립했다. 정자 건물은 경북 문화유산자료로, 정자를 둘러싼 자연 원림 일대는 명승으로 별도 지정돼 있다. 건물과 자연이 하나의 문화재로 인정받은 셈이다.


조선시대 품위가 느껴지는 만휴정의 구조를 살펴보면 홑처마 팔작지붕집으로 처마 앙곡과 안허리가 매우 날카로워 정자의 맛을 살리고 있다. 정자 아래로는 폭포물이 바위를 타고 흘러내리며, 주변 소나무 숲과 어우러진다. 드라마 촬영지로 알려지며 포토존이 된 외나무다리는 원래 속세와 은거의 공간을 상징적으로 나누던 경계였다. 다리 아래 계곡물은 한여름에도 차가워 발을 담그고 잠시 무더위를 쫓을 수 있다. 조선시대 낙향한 선비가 왜 이곳에 정자를 세웠는지, 물소리를 들으며 사색에 잠겨 보자.


자연의 냉기로 더위를 이겨내는 경험


의성군 춘산면에 가면 특이한 자연 현상을 경험할 수 있다. 한여름 삼복더위에도 바위 틈에서 찬 공기가 흘러나오는 것을 직접 느낄 수 있다. 경북 8경 중 하나로 꼽히는 '빙계리 얼음골'의 천연 냉방 시스템이다. 이같은 현상의 원인은 바위 내부의 빙혈(氷穴)과 풍혈(風穴) 구조에 있다. 외부 온도와 내부 암석 틈 사이의 기압·온도 차이로 인해 냉기가 밖으로 빠져나오는 것으로, 지질학적으로 학술 가치가 높다. 계곡 인근에는 보물로 지정된 의성 빙산사지 오층석탑이 자리해 통일신라 후기에서 고려 전기의 불교 문화유산을 함께 살펴볼 수 있다.


울진 성류굴도 지질학적 명소 중 하나다. 1963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성류굴은 내부 기온이 연평균 약 15℃로 유지된다. 여름에는 피서지, 겨울에는 피한지로 손색이 없다. 동굴 내부에는 오랜 세월 동안 형성된 석순·종유석·석주 등 다양한 생성물이 분포하며, 일부 구간에는 맑은 지하수가 흐른다. 형성 연대는 약 2억 5천만 년 전으로 추정된다. 특히 벽면에서 신라 시대 이후의 고대 명문(銘文)이 발견돼 역사유산의 성격도 지닌다. 최근에는 동굴 입구 주변의 아치형 교각이 인증샷 명소로 주목받고 있다.


◆ 기암절벽과 천년사찰, 유교문화까지


옥계계곡 중심에 자리 잡은 침수정은 조선시대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던 곳이다. <영남일보 DB>

옥계계곡 중심에 자리 잡은 침수정은 조선시대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던 곳이다. <영남일보 DB>

울진군 근남면 행곡리~서면 하원리에 이르는 불영사 계곡 일원도 명승지다. 약 15㎞ 구간을 따라 기암절벽과 울창한 수림, 맑은 계류가 좁고 깊은 협곡을 이룬다. 지형의 규모와 특색있는 경관의 밀도가 높아 국내 협곡 중에도 손꼽히는 곳으로 평가된다.


협곡 안쪽에는 신라 진덕여왕 5년(651년), 신라 승려에 의해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는 불영사(佛影寺)가 자리한다. 사찰 이름은 인근 연못에 부처님 형상의 그림자가 비친다는 데서 유래했다. 여름철 연못 주변에는 연꽃이 피고, 사찰을 둘러싼 금강송 숲에서는 수목이 내뿜는 특유의 서늘한 공기가 느껴진다.


영덕군에 위치한 옥계계곡은 기암과 맑은 수질로 이름나 있다. 계곡 일대에는 국가 명승으로 지정된 '영덕 옥계 침수정'이 포함돼 있다. 특히 계곡 바로 위에 세워진 침수정은 조선 시대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던 공간으로, 건축물과 자연 지형이 맞닿는 방식이 독특하다. 옥계계곡은 동해안과 가까워, 계곡에서 물놀이를 즐긴 뒤 차로 30분 내외 거리의 해수욕장으로 이동이 가능하다. 산악형 피서와 해변 피서를 한번에 즐길 수 있는 몇 안 되는 지역 중 하나다.


◆ 12개의 폭포와 퇴계가 평생 곁에 두었던 산


포항 북구 송라면 내연산에는 12km 계곡을 따라 크고 작은 폭포 12개가 이어진다. <경북도 제공>

포항 북구 송라면 내연산에는 12km 계곡을 따라 크고 작은 폭포 12개가 이어진다. <경북도 제공>

경북의 명승지 가운데 포항 내연산을 빼놓을 수 없다. 특히 12km의 계곡을 따라 이어지는 크고 작은 폭포 12개가 백미다. 폭포마다 이름과 규모, 형태가 달라 계곡 전체를 하나의 탐방 루트로 즐길 수 있다. 그중 관음폭포는 폭포 위를 가로지르는 구름다리에서 조망이 가능하다. 연산폭포는 내연산 폭포 중 낙차가 가장 큰 폭포로 알려져 있다. 계곡 입구에는 신라 진평왕 25년(603년) 창건으로 전해지는 보경사가 있으며 사찰 내에는 원진국사비, 괘불탱 등 다수의 보물이 보존돼 있다. 보경사에서 출발해 계곡 탐방로를 따라 걸으면 왕복 약 2~3시간이 소요된다.


봉화군과 안동시에 걸쳐 있는 청량산도 '작은 금강(小金剛)'으로 불릴 정도로 명성이 높다. 특히 조선 시대 유학자 퇴계 이황이 스스로를 '청량산인'이라 칭할 만큼 각별히 여겼던 산이다. 산 중턱에는 청량사가 자리하며, 절벽에 기댄 듯 세워진 건물 배치가 인상적이다. 능선 구간에는 하늘다리(현수교)가 설치돼 있어 협곡 위를 직접 건너 볼 수 있다. 해발고도가 높은 편이어서 한여름에도 바람이 서늘하게 느껴지며, 정상부에서는 낙동강 줄기를 한눈에 볼 수 있다. 퇴계학파의 학문적 배경에 관심이 있다면, 인근 도산서원을 방문해 보는 것도 의미 있다.


◆ 밤이 돼야 제 모습을 드러내는 문화유산


신라 왕궁의 별궁과 연못인 동궁과 월지는 경주의 대표적인 야간명소로 손꼽힌다. <경주시 제공>

신라 왕궁의 별궁과 연못인 '동궁과 월지'는 경주의 대표적인 야간명소로 손꼽힌다. <경주시 제공>

천년고도 경주의 밤은 낮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문화유산을 경험하게 한다. 특히 신라 왕궁의 별궁과 인공 연못인 '동궁과 월지'는 해가 진 뒤 제 모습을 드러낸다. 신라 전통 목조 건물들을 비추는 은은한 조명과 월지에 반사된 모습은 경주의 대표 야경명소로 손꼽힌다. 이 일대는 신라 왕실의 연회와 외교 행사가 열렸던 공간으로 발굴 과정에서 3만여점의 유물이 출토돼 신라 생활사 연구의 중요한 근거지가 됐다.


인근에는 선덕여왕 때 축조된 것으로 전해지는 석조 구조물인 첨성대가 위치한다. 천체의 움직임을 관찰하던 신라시대의 천문관측대로 알려져 있다.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 그 가치가 높으며, 당시의 높은 과학 수준을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유산으로 평가받는다. 동궁과 월지에서 첨성대를 거쳐 월정교까지 이어지는 야간 산책 코스는 도보로 이동 가능하며, 야간 개장 시간과 조명 운영 일정을 사전에 확인하고 방문하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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