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 죽림리 고인돌 군집의 전경. 선사인들도 편안하고 좋은 터를 골라 고인돌을 조성했다.
흩어진 구름이 어딘가 닿았을 무렵. 사랑을 속삭이며 지나가는 계절. 산은 무언의 손짓을 하고 있었다. 야트막했으므로 그 위로 푸른 하늘이 다가와 의인화되고 동화의 나라가 됐다. 고인돌 공원은 잔디밭이어서 두 발에 즐거움을 주었다. 지나는 바람이 기웃거리고 새날마다 햇볕이 피라미처럼 모이는 거기 청동기 시대 매장 터가 있다. 고창읍 죽림리 고인돌 유적이다. 세계에서 가장 크고 넓게 고인돌 군집을 이루고 있다. 야산 기슭으로부터 약 1.8㎞ 이어지며 447기의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다. 탁자 모양 바둑판 모양 등 여러 가지 형태가 있다. 고인돌은 돌무덤이다. 지상에 인류가 출현하고 언제부터 시신을 매장했을까. 그리고 왜 무덤이 생겨났는지 한번 추적해보자.
고창 죽림 선사마을의 원형 장방형 움집. 선사인들이 생활했던 집으로 복원한 것이다.
지금까지 지구에 수많은 영장류가 나타났지만 현생 인류 인간의 기원은 이렇다고 한다. 약 30만 년 전 아프리카의 작은 사람들(homini) 무리가 호모사피엔스(Homo Sapiens)로 진화해 전 세계로 퍼져 다양한 인종으로 됐다. 그러나 처음의 인류 즉 원시인은 동물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인류의 특성인 직립보행(直立步行)과 불(火) 도구(道具)의 사용. 언어(言語)와 사고 활동으로 발명과 지식을 이어주는 지성(知性). 인간의 욕망은 무한하다는 것 그리고 미래를 염려한다는 것. 반사회성(半社會性)과 반독거성(半獨居性)이 협력과 개성의 유전인자로 후손에게 전달되어 문명이 축적됐다.
그중에서 사냥과 전투를 할 때는 뭉쳐서 하고 포획물을 공동 분배해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 그 몫을 자유롭게 소비하고 삶을 즐기는 것이 생활의 기본 틀이 됐다. 이런 다양한 인간의 특성이 현생 인류를 탄생시키고 지구를 곰비임비 정복 지배자가 된 것이다. 그러나 인류 초기 원시인들은 동물과 비슷했으므로 그들이 죽으면 시신을 방기 다른 동물들이 먹어 치우거나 부패해도 그냥 두었을 것이다.
고창 죽림리 고인돌과 조금 떨어진 곳에 터를 잡은 선사마을의 움집. 선사인들은 고인돌을 삶의 현장으로 봤다.
구석기 및 신석기 시대의 오랜 시간이 흐른 그 어디쯤에서 인류가 자기 존재에 시나브로 눈을 뜨기 시작했다. 태양과 별을 바위에 새기고 신(神)을 찾고 자신의 내면의 빛인 영혼을 알게 됐다. 이렇게 스스로에 대한 존엄성을 깨달아 가족이나 이웃이 죽으면 그 시신을 마구 버릴 것이 아니라 잘 처리 보기 좋게 하고 죽은 자 생전에 함께 했던 공동생활로 인한 공로 슬픔 그리운 정이 우러나 그를 추모 기념하기 위해 장례와 무덤이 등장했을 것이다.
시신 처리는 지역에 따라 풍장(風葬), 수장(水葬), 화장(火葬) 등 다양했으나 주로 땅을 파고 묻어버리는 매장(埋葬)이 성행했다. 그러다가 석기시대에서 청동기 시대로 옮겨가며 농경문화가 정착 큰 돌에 기원(祈願), 제의(祭儀)의 뜻을 담은 선사 인류의 흔적인 거석문화(巨石文化)가 나타났다. 세계적으로 프랑스 브리타뉴 지방의 열석, 영국의 스톤헨지 환상열석, 칠레 이스터섬의 모아이 석상, 우리나라의 선돌 고인돌이 그 범위에 속한다. 선사시대 인류는 바위나 돌에 담긴 불멸성과 견고함을 숭배했고 특히 고인돌은 죽은 사람 혼령의 안식처로 또는 죽은 사람의 혼령이 끼칠지도 모를 해코지를 막기 위한 것일 수도 있었다.
고창 죽림 선사마을의 돼지우리와 그걸 지키기 위해 초소에서 경계를 서고있는 선사인.
그때 건들바람이 머리칼을 날리며 불었다. 나는 애면글면 현실로 돌아왔다. 무덤이라고 느껴지지 않는 고인돌 유적을 보며 언제나 비켜 가기만 한 죽음의 그림자를 볼 수 있었다. 고인돌은 사후세계 영혼의 빗돌이다. 그 고인돌은 섬뜩하게도 누구라도 반드시 죽는다는 바람의 말을 반복한다. 우리 하나하나는 자신은 절대 죽을 리가 없다고 행동하며 살아간다.
힌두교의 서사시 마하바라타(Mahabharata)의 한 구절을 인용해 보자. 덕(德)이 높은 유디스타라왕은 어느 날 "이 세상에서 가장 놀랄 만한 일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았다. 유디스타라왕은 "우리 주위에 죽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음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자신이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라고 대답했다. 죽음에 대한 회피가 인간 의식을 지배하고 있다는 말이다. 또 지구 최상위 포식자로 과학기술문명에 지나치게 의존한 인간은 영성보다 오히려 자신을 소외시키고 내면을 파괴하고 물질문명의 완성을 위한 하나의 도구 즉 유물론을 펼치기도 했다.
그러나 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다. 세금과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그중에는 영혼으로 죽음과 삶을 이어주며 종교를 만든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죽음의 텃밭까지 다녀와 영혼을 경작했다. 정말 위대하다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몸과 마음에 있는 질병과 늙음 흘러가는 시간의 변화를 알게 되면 죽음은 멈추지 않고 몸을 울리는 경종이 된다. 죽음은 형이상학이나 철학 및 주술적인 신비의 문제가 아니고 오히려 당연한 느낌을 통한 실천이고 소통이다. 우리는 죽음이 인생의 완성이고 끝내는 속박에서 벗어나는 자유와 해방임을 알아야 한다.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시기 전 제자가 죽음에 대해 물었다. 그는 "죽음이란 지금보다 더 좋은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깊고 꿈이 없는 영원한 잠일 것이다"라 대답했다. 샛별 같은 명답이다. 이제 불멸의 환상에서 깨어나자. 삶과 죽음은 순간순간의 현실이다. 아무튼 우리는 자기 속에 숨어 있는 죽음과 함께 가야 한다. 그게 해탈이고 부활이다. 이를테면 죽음의 미래를 현실에서 여행하는 게 해탈이고 부활이다. 그러니까 불교의 해탈도 기독교의 부활도 바로 죽음의 시공을 경험하는 것이다. 고인돌은 선사인들의 영혼이 신을 만나러 가는 징검다리일 거라는 상상을 하면서 곁에 있는 죽림리 선사마을로 간다.
고창 죽림 선사마을의 원형 움집. 당시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고인돌 시대 선사인들은 어떻게 생활했을까. 그 현장을 발굴하여 옴니암니 모형을 만든 마을이 선사마을이다. 선사인들은 땅을 파 움푹한 데다 집을 짓는 움집을 만들어 살았다. 대개 열 가구 안팎의 작은 동네를 이루고 마을 주위로는 적으로부터 방어와 경계를 위해 도랑을 파거나 울타리를 세웠다. 당시 선사 사람들의 지능과 공동생활의 지수는 아주 낮았다. 그러다가 농경이 본격적으로 성공하고 더 큰 무리의 힘이 필요하게 되자 대규모의 마을로 확대되어 100여 채의 집이 마을 공동체를 이루게 됐다. 그러다가 더 큰 집단이 그보다 작은 집단을 통합 흡수하게 되면서 씨족에서 부족으로 사회 범위가 넓어지고 확장됐다. 그에 따라 지배층이 나타나고 장례 시 고인돌의 규모도 차별화됐다.
고인돌 시대는 농경을 했으나 음식이 충분하지 못해 언제나 배가 고파야 했다. 부족한 식량을 보충하기 위해 수렵 어로 채집 생활을 더 해야 했다. 이에 도구도 발달하여 돌칼 돌낫에서 청동기 기구로 변화되어 갔다. 또 양질의 단백질을 보충하기 위해 사슴 멧돼지를 중심으로 사냥을 하다가 집에서 가축우리로 짐승을 키우는 사육으로 넘어갔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인류가 배고픔을 면하게 된 것은 몇 나라에 불과하며 아직 한 세기도 안 된다. 이렇게 생활의 변화에 따라 선사인들은 자신들의 생각이나 이야기를 바위에 그림이나 흔적으로 남기기도 했다. 구석기 신석기의 오랜 시대를 거치면서 돌과 바위는 영험함과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그들이 고인돌에 시신을 묻은 것은 돌이 생명의 원천이며 재생과 부활을 상징하기 때문이었다. 선사인들의 고인돌은 우리에게 자신의 미래 즉 죽음을 비추어보게 하는 불멸의 유적이었다.
글=김찬일 시인·방방곡곡 트레킹 회장 kc12taegu@hanmail.net
사진=유판도 여행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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