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신정 하슬라아트월드 대표는 어린시절 고향 경주에서 보았던 수많은 무덤들은 생성과 소멸, 이음으로 이어지는 내 예술의 모태가 됐다고 전했다. 하슬라아트월드 제공
"자연과 예술, 인간이 하나됨 콘셉트
강릉·영월 이어 삼척까지 공간 확장
마애불상이 주는 아득한 치유감처럼
자신만의 대화·명상 나누었으면 해"
대한민국에서 예술로 밥벌이 하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자본과 인프라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지방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런데 놀랍게도 수도권의 변방 강원도에서 예술로 자립에 성공한 것은 물론 강릉에서 출발해 영월, 삼척 등으로 가지를 늘려나가는 이가 있어 화제다. 20여년 전 경일대 교수를 그만두고 강릉에 정착한 조각가 박신정 하슬라아트월드 대표가 주인공이다. 경주 출신의 박 대표는 "경주에서 보낸 어린 시절은 내 삶의 모태가 됐다. 그 시절 경주에서 보았던 수많은 무덤들은 생성과 소멸, 이음이라는 주제가 되어 지금 나의 예술 속에 스며들었을 것"이라고 밝혔다.
◇'하슬라'는 강릉의 순우리말
박 대표는 남편인 최옥영(강릉원주대 교수) 작가와 함께 20여년 전 강릉의 한 바닷가 언덕에 섰다. 뾰족한 절벽과 파란 하늘, 짙푸른 바다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곳이었다. 주말 부부로 강릉과 경주를 오가며 생활하던 부부는 비로소 이곳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기로 결심한다. 먼저 박 대표는 13년간 근무한 대학의 교수직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그리고 복합문화예술공간 '하슬라아트월드'를 만드는 것에 매진했다. '하슬라'는 순우리말로 '강릉'의 옛말이다.
-'하슬라아트월드'는 어떤 곳인가?
"종합예술공간이에요. 동해바다를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뮤지엄호텔, 야외조각공원, 현대미술관, 피노키오박물관, 레스토랑, 오션스퀘어카페가 어우러진 힐링공간입니다. 자연훼손을 최소화하기 위해 비탈면과 산의 높이를 그대로 이용해 예술정원을 꾸미고, 국내외 작가들과 함께 하는 작업 및 공연전시가 1년 내내 이어집니다."
-대표님 작업에서 고향 '경주'는 어떤 의미인지?
"경주는 천년 전의 흔적이 현대의 일상과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도시입니다. 새로운 도시를 완전한 백지상태에서 지어 올리는 것보다, 오래된 흔적이 있는 곳에 예술적 개입을 통해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는 작업. 제가 하고 있는 모든 공간 컨셉의 바탕에는 경주라는 도시가 가진 도식과 미감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대학 교수라는 안정된 자리를 내려놓고 현장으로 뛰어드는 데 주저함은 없었는지?
"반대가 정말 컸어요. 남편조차 '좀 준비하고 하지'라며 당황했을 정도니까요. 하지만 준비를 다 하고 나오려 했다면 영영 나오지 못했을 겁니다. 고민이 길어지던 시기에 홀로 경주의 한적한 시골길을 무작정 운전해 간 적이 있습니다. 농로 끝에 커다란 무덤과 팻말이 서 있었는데, 신라 신무왕의 능이었습니다. 팻말에는 '수십 년간의 왕위쟁탈 끝에 왕위에 올랐으나, 겨우 1년 만에 죽다'라고 적혀 있었어요. 그 문장을 보는 순간 마음속의 멍에가 툭 하고 내려앉았습니다. '부귀영화나 권력을 쥐어봐야 삶은 결국 허무한 것인데, 내가 무엇을 망설이고 있는가. 하고 싶은 예술을 하자' 그렇게 마음을 굳히고 현장으로 뛰어들었습니다."
◇현실의 벽 부수는 혹독한 시간
-교수의 삶과 현장 예술가의 삶은 천지차이였을 텐데.
"말도 못 하게 힘들었습니다. 처음 3년 시행착오 속에 배운 것이 대학에서 13년 동안 가르치며 배웠던 것보다 훨씬 혹독했어요. 순수 문화예술을 하던 사람이 인허가를 받고, 공무원들과 소통하고, 토목 설계를 조정하는 일을 직접 해내야 했으니까요. 제가 하고 싶은 예술가의 작업은 전체 과정의 가장 마지막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전까지는 무수한 행정적·현실적 벽을 깨부수어야 했죠. 하지만 도심에 흔한 건물 한 채 짓는 방식으로는 제가 꿈꾸는 예술 공간을 만들 수 없었습니다. 자연의 지형을 인정하고, 기존의 흔적에 최소한의 예술적 개입을 통해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 모으는 작업. 그 과정 자체가 저에게는 또 다른 형태의 거대한 설치 미술이었습니다."
-하슬라아트월드를 시작으로 영월의 '젊은달와이파크', 개관 준비 중인 삼척까지 강원도 권역에서 독보적인 콘텐츠를 구축했다. 각 공간마다 어떤 차별성을 두었는지?
"영월 '젊은달와이파크'는 내륙 산간 지역의 특성을 살렸습니다. 원래 술박물관으로 쓰였던 곳인데, 주변 건물 때문에 풍광이 한눈에 들어오지 않았어요. 붉은색 파이프를 이용한 '레드 파빌리온'과 대나무 설치작업인 '목성'을 설치했더니 비로소 사람들이 쉬어갈 수 있는 여백이 생겼죠. 반면 삼척은 폐조선소 부지를 활용한 대규모 도시재생 공간입니다. 실내 면적만 2만 평에 달할 정도로 거대하죠. 이곳은 하슬라나 영월에서의 노하우를 바탕으로, 삼척시와 협력해 추진하고 있습니다."
- 최근 지방 도시들의 화두는 '지역소멸'이다. 문화예술 공간이 실제 지역 사회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보는지?
"영월의 사례가 좋은 답이 될 수 있습니다. 젊은달와이파크가 들어서기 전, 그 지역 동네상권은 거의 몰락해가고 있었습니다. 처음 우리가 들어갔을 때는 주민들의 반대나 오해도 많았어요. 하지만 공간이 활성화되면서 주말마다 인근 식당에 줄을 서는 기현상이 벌어졌습니다. 방문객들이 입장료 얼마를 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지역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카페를 이용하며 머물다 갑니다. 외지인들이 유입되면서 마을에 젊은 기운이 돌고, 퇴직자 분들이 귀촌하여 정착하는 마을로 변했습니다. 정주 인구를 늘리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관계 인구와 체류형 관광객을 유도하여 지역 경제의 혈맥을 돌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문화 콘텐츠의 힘입니다."
◇자연과 예술, 인간의 공존
-남편인 최옥영 작가와의 호흡도 궁금하다. 두 분 모두 미술을 전공했는데 역할 분담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강릉 출신인 남편의 뿌리에는 거친 산과 바다가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가 가진 공간의 스케일감과 대범함은 감히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공간의 거친 아웃라인을 잡는 것이 남편의 몫이라면, 저는 그 안에 들어가는 세부적인 디테일, 컬러, 디스플레이, 컬렉션의 매칭과 운영 행정을 섬세하게 다듬는 역할을 합니다. 예술적 지점에서는 부딪히고 싸우기도 하지만 가장 강력한 동료이자 에너지가 되어줍니다."
-하슬라아트월드를 통해 관객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저희의 첫 번째 컨셉은 예나 지금이나 '자연과 예술, 그리고 인간의 하나 됨'입니다. 거창한 예술적 담론이나 작품의 가격을 과시하는 공간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그저 이곳에 걸어 들어온 대중들이 자연과 어우러진 예술 작품 속에서 감동을 느끼고, 마음의 '행복감'과 '치유'를 얻어 가기를 바랍니다. 경주 황룡사지 터나 남산의 마애불상 앞에 섰을 때 우리가 인종과 종교를 떠나 아득한 치유감을 느끼듯, 하슬라의 거대한 소나무 공간이나 목성 구조물 안에서 사람들이 자신만의 명상과 대화를 나누었으면 합니다."
-동료 및 후배 예술가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부탁드린다.
"오늘날 많은 예술가가 자신만의 고독한 세계나 작은 그룹 안에서의 서열, 정부 지원금이나 상에 매달리며 고립되어 가는 모습이 안타깝습니다. 사회와 소통하지 않는 예술은 확장성을 갖기 어렵습니다. 예술가는 세상 밖으로 나와 사람들과 부딪혀야 합니다. 현실감을 바탕으로 자기만의 길을 스스로 뚫어내기를 바랍니다."
박신정 하슬라아트월드 대표는 어린시절 고향 경주에서 보았던 수많은 무덤들은 생성과 소멸, 이음으로 이어지는 내 예술의 모태가 됐다고 전했다. 하슬라아트월드 제공
김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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