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시 구황동 분황사 인근에 자리한 창렬각. 1950년 무장세력의 습격으로 크게 다친 남편 이진우를 구하고 자신의 살을 내어 치료하도록 한 영양남씨의 행적을 기리고 있다. 장성재기자
처음 찾아가려던 곳은 창렬각이 아니었다.
경주 황리단길에 있는 손시양정려비를 취재할 생각이었다. 관광객으로 붐비는 거리 한복판에 남은 오래된 효자비가 궁금했다. 며칠 전 지인과 술잔을 기울이다 그 이야기를 꺼냈더니 뜻밖의 말이 돌아왔다.
"거 말고 분황사 모퉁이에 혼자 떨어져 있는 비각 하나 있는 거 압니까. 경주 사람들도 잘 모르는데 한번 가보이소."
창렬각(彰烈閣)이라고 했다. 유명한 문화유산보다 잘 알려지지 않은 비지정 문화유산을 한번 찾아가 보기로 했다.
11일 분황사에서 걸음을 시작했다. 당간지주 주변에는 주황빛 황화코스모스가 한창이었다. 연인과 관광객들은 꽃밭 사이에서 사진을 찍었고 황룡사지로 향하는 발길도 이어졌다.
분황사에서 동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왼편으로 구황동 원지가 보이고 황룡사지 풀숲 사이로 길이 이어졌다. 5분 남짓 걸으니 차들이 오가는 대로변에 낮은 돌담으로 둘러싸인 작은 기와집 한 채가 나타났다.
분황사에서 창렬각으로 이어지는 길. 왼쪽으로 구황동 원지가 자리하고 있으며 황룡사지 풀숲 사이 길을 따라가면 창렬각이 나온다. 장성재기자
처마 밑 현판에는 '彰烈閣'. 창렬각 세 글자가 걸려 있었다.
문살 사이로 안을 들여다봤다. 검은 비석 앞면에 '李夫人英陽南氏彰烈碑'가 새겨져 있었다. 우리말로 읽으면 '이부인 영양남씨 창렬비'다.
신라 유적이 빼곡한 구황동에서 만난 비석이지만 여기에 기록된 시간은 천년 전이 아니다. 1950년이다.
비문이 가리키는 날은 1950년 음력 2월3일이다. 6·25전쟁이 터지기 전이었지만 당시 경주군 양북면 용동리, 속칭 '오암골'도 해방 이후 이어진 좌우 이념대립과 치안 불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당시 마을 반장이던 이진우는 주민들과 밤마다 마을 경비에 나섰다. 비문에는 이진우 등 10명이 경비를 서던 날 무장한 십여 명이 들이닥쳤다고 기록돼 있다. 경비원들을 묶고 총을 쏜 뒤 불을 질렀다는 내용도 이어진다.
결과는 참혹했다.
비석에는 '警備室九人盡死'라는 짧은 구절이 남아 있다. '경비실의 아홉 사람이 모두 죽었다'는 뜻이다.
10명 가운데 살아남은 사람은 이진우였다. 그 역시 멀쩡하지 않았다. 총탄이 오른쪽 무릎을 관통했지만 목숨은 붙어 있었다.
1950년 한 산골마을에서 주민들이 스스로 경비에 나서야 했고 그날 한꺼번에 9명이 목숨을 잃었다. 창렬각은 영양남씨의 행적을 기린 비각이지만, 비문 앞부분에는 해방 이후 경주 동해안 산골마을이 겪었던 혼란한 시대상도 함께 남아 있다.
창렬각 처마 아래 걸린 '彰烈閣(창렬각)' 현판. 비각 안에는 영양남씨의 행적과 1950년 당시 사건을 기록한 비석이 세워져 있다. 장성재기자
이때부터 비문의 이야기는 아내 남분이씨에게로 향한다.
남편이 크게 다쳤다는 소식을 들은 남씨는 그를 찾아 나섰다. 중상을 입은 남편을 옮겨 치료받게 했고 치료 과정에서는 자신의 몸에서 살을 떼어 남편의 상처 치료에 내줬다는 내용이 전해진다. 엉덩이와 허벅지의 살을 떼어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과거 창렬각 비문의 연구와 해석에 참여했던 조철제 전 경주문화원장은 당시 상황이 비문에 상당히 구체적으로 담겨 있다고 설명했다.
조 전 원장은 "남편이 무장세력의 집중사격을 받고 크게 다쳤고, 부인이 그 남편을 구해 치료한 과정이 비문에 나온다"며 "자기 살을 내주면서까지 남편을 살렸다는 이야기는 사건 이후에도 오랫동안 지역에서 회자됐다"고 말했다.
남편을 치료한 병원에 대한 기억도 꺼냈다. 조 전 원장은 "부인이 남편을 구해 경주로 데려와 치료받게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며 "당시 한성병원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창렬각 안에 세워진 '李夫人英陽南氏彰烈碑(이부인 영양남씨 창렬비)'. 비석 옆면과 뒷면에는 무장세력의 습격과 남편 이진우의 총상, 영양남씨가 남편을 구한 과정 등이 기록돼 있다. 장성재기자
그가 창렬각을 눈여겨보는 이유는 사건이 벌어진 시대에도 있다.
조 전 원장은 "경주에는 충·효·열을 기린 정려각이 여러 곳 있지만 대부분 오래전 사람들의 이야기"라며 "창렬각은 해방 이후 사회가 혼란했던 시기에 실제로 있었던 한 여성의 행적을 기록했다는 점에서 조금 다르다"고 말했다.
이어 "그 시절 중상을 입은 남편을 구하고 자기 몸의 살까지 내준다는 것은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했다.
창렬각이 지금 자리에 서게 된 과정에도 사연이 있다.
조 전 원장은 과거 비각이 분황사 담장에 붙어 있었다고 기억했다. 그는 "옛날에는 분황사 담벼락에 비각이 있었고 그 길이 양북으로 가는 길목이었다"며 "양북을 오가는 사람이라면 자연스럽게 볼 수 있는 자리였다"고 말했다.
당시 양북은 지금의 문무대왕면 일대다. 남씨 부부가 살았고 사건이 벌어진 곳도 그 방향이었다. 조 전 원장은 이후 분황사 주변 정비 과정에서 창렬각이 지금 자리로 옮겨진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11일 경주 분황사 당간지주 주변 황화코스모스 꽃밭에서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고 있다. 이곳에서 창렬각까지는 걸어서 5분 남짓이다. 장성재기자
지금의 창렬각은 크지 않다. 낮은 돌담과 한 칸짜리 비각, 그 안의 비석 한 기가 전부다. 어떤 사연을 품고 있는지 알려주는 문화유산 해설판도 따로 없다.
취재를 마치기 전 다시 문살 사이로 비석을 들여다봤다. 그 안에는 마을 경비에 나섰던 10명과 목숨을 잃은 9명, 총탄을 맞고 살아남은 이진우, 그리고 그 남편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몸을 내어놓은 영양남씨의 이야기가 함께 새겨져 있었다.
경인년, 1950년의 일이었다.
장성재
동부지역본부 소속입니다. 경주의 현장을 기록하고 지역의 변화를 전합니다.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