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7년 문 연 대구 동성로의 '하이마트 음악감상실' 입구. 조현희기자
대구는 '커피의 성지'다. 인구 대비 커피전문점 수가 가장 많은 도시다. 올해 1월 기준 대구의 커피음료점은 4천373개로 집계됐다. 핸즈커피, 봄봄, 매스커피 등 유명 커피 프랜차이즈 다수가 이곳에서 태어났다.
시민들의 카페 사랑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그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일찍부터 발달한 다방 문화가 있다. 오늘날 카페가 대중화되기 전 커피전문점은 다방으로 불렸다. 대구는 한국전쟁 시기 전국 각지에서 피란민들이 모여들었다. 지식인과 예술가들도 이곳에 정착하게 되면서 이들이 머물고 교류하는 다방도 자연스레 늘어났다. 과거 다방은 단순히 차를 마시는 곳이 아니라 예술가들이 서로 교류하는 사랑방으로 기능했다.
음악감상실은 또 어떨까. 이 역시 사람들이 모이고 소통하는 '문화 살롱'이었다. 전쟁 때 문을 연 '르네상스'에서는 포성이 이어지는 시대에도 바흐의 마태 수난곡이 흘러나왔다. 시민들은 이곳에서 클래식 음악을 함께 들으며 고단함을 잠시 잊었다. 당시 이 소식을 접한 뉴욕타이스의 종군기자는 신문에 "전쟁으로 초토화된 폐허 속에서도 대구는 바흐의 선율이 흐르는 낭만의 도시"라고 보도하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유네스코 음악창의도시'의 뿌리가 이 같은 문화 살롱들에 있다. 한때 예술가들의 사랑방이었던 공간들을 찾아가봤다.
'꽃자리다방'이었던 건물은 대구시가 매입해 현재 도심캠퍼스 2호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조현희기자
그 흔적은 대구 중구에서 특히 찾아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부터 1970년대까지 대구의 최대 번화가였던 향촌동 등 북성로 일대에 수많은 문화 공간이 자리했다. 시인 구상, 화가 이중섭을 비롯한 많은 예술가들이 이곳에서 활동했다. 이춘호 음식전문 칼럼니스트는 "한국전쟁 당시 임시 수도였던 대구에 사람이 모이며 자본, 문화, 낭만까지 한꺼번에 들어왔다. 이 과정에서 문화 공간도 자연스럽게 꽃피었다"고 설명했다.
옛 대구읍성 자리에서 북성로 골목으로 들어서면 오래된 3층 건물이 나온다. '꽃자리다방'이다. 한동안 방치돼 있던 건물을 대구시가 매입해 2024년부터 도심캠퍼스 2호관으로 운영되고 있지만 원래는 한국전쟁 당시 나라를 걱정하던 문인들이 소통하던 공간이었다. 구상 시인의 시집 '초토의 시'(대구 청구출판사) 출판기념회가 열린 기념비적인 공간이기도 하다. 구상 시인은 전선문학의 전성기를 이끌어낸 거장이다. 그의 대표작이 이 시다. 까맣게 탄 흙이나 땅을 의미하는 '초토(焦土)'는 전쟁으로 황폐화된 도시를 상징한다.
역대 최장수 국회의장을 지낸 이효상이 시집 '바다' 출판기념회를 열었던 '모나미다방' 자리. 조현희기자
꽃자리다방에서 조금 더 걸어가면 '모나미다방'이 자리하던 건물이 있다. 역대 최장수 국회의장을 지낸 이효상이 시인으로 활동할 적에 시집 '바다' 출판기념회를 연 곳이다. 골목길로 들어가면 지금은 숙박업소로 운영되는 '백록다방'이 나온다. 이중섭이 이 다방에서 담배 은박지에 '소' 그림을 그렸다고 하나 그때는 아무도 그 가치를 몰랐다. 진가가 알려지고 그림은 현재 뉴욕현대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옛 '백록다방' 자리. 이중섭 화가가 담배 은박지에 '소' 그림을 그린 곳이다. 조현희기자
북성로 일대에 자리했던 대부분의 다방은 현재 다방으로 운영되지 않고 있지만, 인근 진골목의 '미도다방'은 약 1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지역 어르신들의 사랑방이다. 1928년 처음 문을 열어 한동안 명맥이 끊겼다가 1982년 정인숙 대표가 인수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입구에 들어서니 수십장의 사진이 그간의 역사를 보여주는 듯 걸려 있다. 이곳은 오래전부터 지식인들의 안식처이자 담화장소였다. 유림, 문인, 화가들은 물론 대통령부터 정치인까지 다녀갔다. 대구 정치인 중에는 이곳의 쌍화차를 마셔보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우스갯소리까지 있다. 지금도 옛 추억을 더듬으며 찾아오는 단골손님들이 줄을 잇는다.
지난 5일 오후 4시쯤 찾은 다방은 손님들로 붐볐다. 어르신들이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관광명소로 자리잡아 젊은 여성들도 적지 않게 보였다. 이날 이곳에서 만난 부산시민 김주영(여·27)씨는 "레트로한 분위기를 즐길 수 있는 오래된 다방이라는 정보를 인스타그램에서 접하고 여행 중 찾았다"며 "쌍화차를 판매하는 것도 신기하고 인테리어 역시 요즘 신상 카페처럼 레트로 감성을 억지로 꾸며낸 느낌이 아니라 옛것 그대로라 인상적"이라고 말했다. 한복을 입은 정 대표가 손님 한명 한명을 직접 응대하며 살피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대구 중구 진골목에 위치한 '미도다방' 내부. 레트로 감성이 엿보이는 인테리어가 눈에 띈다. 조현희기자
음악감상실 역시 당대 예술가들의 아지트였다. 국내 최초의 클래식 음악감상실 '녹향', '르네상스' 등이 있던 향촌동뿐만 아니라 동성로 한복판에서도 오래된 음악감상실을 찾아볼 수 있다. 전쟁을 피해 서울에서 대구로 내려온 클래식 애호가 고(故) 김수억씨가 1957년 설립한 '하이마트 음악감상실'이다. 독일어로 '고향'을 뜻하는 '하이마트(Heimat)'라는 이름처럼 이곳은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사람들에게 마음의 안식처가 됐다. 시인 김춘수와 작곡가 나운영 등이 자주 드나들었다.
3대째 이어져 세월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온다. 대중가요도 함께 들려주면서 복고풍 감성을 즐길 수 있는 이색 공간으로 입소문을 타 젊은 층도 많이 찾는다. 감상실에는 그랜드 피아노 두 대와 함께 창업자가 좋아했던 음악가들의 모습을 본뜬 대형 조각 작품 '불멸의 음악가'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당시 이곳에서 동호회 활동을 했던 대학생들이 남긴 음악 감상 기록을 읽어보는 것도 색다른 재미다. 다방처럼 음료와 과자도 함께 제공한다.
1957년 문 연 '하이마트 음악감상실' 내부. 그랜드 피아노 두 대와 대형 조각 작품 '불멸의 음악가'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조현희기자
한때 쇠락했던 북성로에 새 상가가 잇달아 들어서고 도시재생 등의 사업이 이뤄지며 활기가 돌고 있다. 이 가운데 대구문학관은 옛 예술가들이 활동한 북성로 일대를 둘러보는 '대구문학로드' 프로그램을 강화할 계획이다. 박미영 대구문학관 대외협력기획실장은 "기존 8개였던 코스를 내년 12개 코스로 늘릴 예정이다. 최근 이 근방에 젊은 층의 유입이 늘고 있는 만큼 더욱 많은 시민에게 공간에 얽힌 예술 이야기를 전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했다.
다만 지자체 사업과 관련해서는 지속 가능성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있다. 대구시는 꽃자리다방·무영당 등 역사·문화적 가치가 있는 유휴공간을 매입해 복합문화공간 등으로 조성해왔다. 하지만 공간을 살리고 활용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해당 공간에 담긴 가치를 지속적으로 알리고 새로운 콘텐츠로 이어가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온다. 이춘호 칼럼니스트는 "단순히 재생사업의 대상으로만 접근해서는 지속성을 갖기 어렵다. 사업이나 트렌드가 종료될 경우 어떻게 또 방치될지 모른다"며 "민간에서 장인정신을 갖고 전문적으로 운영해나갈 수 있는 분위기를 형성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제언했다.
조현희
문화팀 조현희 기자입니다.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