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엽 엘엔피파트너스(주) 대표
작년 이맘때도 필자는 '이런 국감을 매년 왜 해야 하는가?'라며 씁쓸한 자문(自問)을 던진 바 있다. 행정부를 매섭게 견제하고 대안을 제시해야 할 국정감사가 이미 그 본령(本領)을 잃었다는 회의감 때문이었다. 다행히 올해는 과거 연례행사처럼 반복되던 기업인들을 줄 세워놓고 호통치던 구태나 원색적인 망신 주기는 한풀 꺾인 모습이다. 하지만 안도의 한숨도 잠시, 그 자리를 더 은밀하고 교묘한 정치적 술수가 빠르게 파고들었다. 바로 무분별한 국정감사 제출자료의 각색과 정치적 목적을 앞세운 자의적 해석의 난무다.
최근 대법원 국정감사장에서 벌어진 소위 '1억 와인 구매' 논란은 이러한 병폐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전형적인 씁쓸한 자화상이다. 민주당 소속 모(某) 의원이 대법원이 업무추진비로 1억 원이 넘는 와인을 샀다며 술을 입에도 대지 않는 조희대 대법원장을 거세게 몰아붙였다. 마치 현 사법부 수장이 막대한 혈세를 와인 파티에 탕진한 것처럼 프레임을 씌운 것이었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진실은 전혀 달랐다. 전체 1억 원어치 중 4분의 3에 달하는 76%는 전임 대법원장 시절에 집행된 것이었고, 현 대법원장 취임 이후의 집행액은 1/4의 수준이었다.
진위야 어찌 됐든 자극적인 타이틀로 피의자 심문하듯이 망신을 주고 보자는 전형적인 '아니면 말고' 식의 폭로였다. 철저한 사전 검증과 팩트 체크는 사라지고, 오직 상대방을 흠집 내기 위해 수치를 입맛대로 재단하고 왜곡하는 기술만 남았다. 면책특권이라는 법적 방패 뒤에 숨어 일단은 여론의 주목을 받으면 되고, 나중에 사실이 아니었음이 밝혀져도 그만이라는 식의 무책임은 폭력과 다름없는 것이다.
지금 민생의 현장은 어떠한가. 고물가와 극심한 경기 침체의 늪에서 서민들의 한숨은 깊어질 대로 깊어졌고, 묵묵히 일터와 시장을 지켜온 개미투자자들은 연일 폭락을 거듭하는 주식시장의 참화(慘禍) 속에서 자산의 허탈한 증발과 생계의 위협을 동시에 마주하고 있다. 나라의 근간을 지탱해야 할 인사 시스템은 거듭되는 코드인사 논란 속에서 적재적소 원칙을 잃어버린 지 오래다. 이처럼 나라 안팎의 경제·사회적 불확실성이 최고조에 달해 대통령의 정치와 국정 쇄신 능력을 향한 우려의 목소리가 사방에서 터져 나오고 있건만, 정작 이를 수습해야 할 정치는 눈을 감고 있다.
국민이 국회에 바란 것은 탁상공론식 공방이나 얄팍한 정치적 술수가 아니라, 흔들리는 경제를 바로잡고 내 삶의 바탕을 지켜줄 실효성 있는 입법과 정책이다. 그러나 이번 국정감사 기간에도 국민이 마주한 것은 왜곡된 통계와 정쟁의 혼돈 속에서 시급한 민생 법안들은 먼지를 뒤집어쓴 채 방치되어 있고, 국가의 미래를 책임질 거시적 정책 토론은 '정치적 득실'이라는 계산기에 밀려 흔적도 없이 실종된 현실이었다. 무책임한 정쟁과 부실한 왜곡 사기극을 구경하기 위해 국민이 세금을 내고 투표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정치권은 뼈저리게 자각해야 한다.
국정감사가 이토록 타락한 근본적인 이유는 정치가 주권자인 국민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상대를 짓밟기 위해서라면 자료 왜곡조차 서슴지 않는 제로섬(Zero-sum) 게임의 망령을 떨쳐내지 못한다면, '국정감사'라는 이름의 이 거대한 세금 낭비 쇼는 차라리 폐지하는 것이 국익(國益)에 이로울 것이다. 정치가 민생을 구제하지 못하고 오히려 피로감과 왜곡의 근원이 된다면, 주권자인 국민이 나서서 그 낡고 오만한 판을 갈아엎어야 한다. 내년에도 이 한심한 왜곡의 풍경을 또다시 지켜봐야 하는가. 더 이상 물러설 곳 없는 한계에 이르렀음을 정치권은 무겁게 경청해야 한다.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