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복 공인회계사
서예를 배우고 있다. 처음에는 획을 바르게 긋고, 글자 하나하나 모양을 제대로 만드는 데 집중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글씨만큼 여백에도 눈길이 갔다. 한 장을 쓰고 나서 뒤로 물러서 보면 가까이에서는 미처 보이지 않던 글씨와 여백의 관계가 눈에 들어온다. 글자와 글자 사이, 행과 행 사이의 여백이 어떻게 놓이는가에 따라 작품 전체의 느낌은 많이 달라진다.
청나라 서예가 등석여가 강조한 서예 원리 가운데 '계백당흑(計白當黑)'이 있다. 먹으로 채운 곳과 비어 있는 곳을 함께 헤아려야 한다는 뜻이다. 여백의 크기와 위치, 흐름에 따라 글씨의 기운이 막히기도 하고 트이기도 한다. 여백 역시 글씨와 함께 작품을 이룬다. 그래서 비어 있는 곳까지 살펴야 비로소 전체가 보인다.
우리는 눈앞에 드러나는 모습만으로 전체를 판단하는 데 익숙하다.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고, 숫자로 표시되는 것을 먼저 본다. 기업을 평가할 때도 그렇다. 매출은 얼마인지, 영업이익은 얼마나 늘었는지, 자산과 부채는 어느 정도인지 살펴본다. 그러나 숫자가 기업의 모습을 모두 보여줄 수는 없다. 같은 이익을 내는 기업도 그 이익을 만들어 내는 과정은 다를 수 있다. 어떤 기업은 오랜 거래관계와 기술력, 안정적인 조직을 바탕으로 이익을 내지만, 또 다른 기업은 미래에 필요한 투자와 지출을 줄여 실적을 끌어올리기도 한다. 재무제표에 찍힌 숫자는 비슷해도 그 숫자 사이에 놓인 여백은 사뭇 다르다.
좋은 경영자는 눈앞의 숫자를 읽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숫자가 무엇을 말하는지 살피는 동시에 무엇을 말하지 않는지도 함께 본다. 매출이 늘었다면 그 성장이 지속될 수 있는지, 이익이 좋아졌다면 그 뒤에 어떤 선택과 비용이 있었는지를 묻는다. 숫자로 드러난 것과 드러나지 않은 것까지 함께 볼 수 있어야 기업의 모습이 제대로 보인다.
계백당흑은 여기에서 한 가지 더 생각하게 한다. 여백에는 비어 있기 때문에 생겨나는 힘이 있다. 기업도 그렇다. 자원을 빈틈없이 활용하는 것이 반드시 효율적인 경영일까. 눈앞의 수익만 놓고 보면 자원을 남김없이 활용하는 것이 합리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기업도 여유가 필요하다. 예상하지 못한 위기에 대응하고 새로운 기회가 왔을 때 적시에 움직이려면 언제든 활용할 수 있는 여력을 확보해 두어야 한다. 평상시에는 이런 여유가 비효율처럼 보일 수 있지만, 상황이 바뀌는 순간 여백의 가치가 드러난다.
우리 삶은 어떤가. 우리도 살아가면서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채우려고 한다. 더 많은 성취, 더 많은 재산, 더 많은 경험, 더 많은 관계를 원한다. 일정표가 가득 차 있으면 부지런히 살고 있다고 느끼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에는 왠지 불안해한다. 얼마나 많이 채웠는가로 삶을 평가하는 데 다들 길들어 있다.
하지만 삶에도 여백이 필요하다. 멈출 틈이 있어야 지나온 길을 돌아볼 수 있다. 모든 관계를 붙잡을 수 없듯, 모든 기회를 선택할 수도 없다. 남겨야 할 것을 위해 때로는 다른 것을 내려놓을 줄도 알아야 한다. 그렇다고 여백이 많을수록 좋다는 뜻은 아니다. 채워야 할 곳에는 힘 있게 획을 긋되, 비워야 할 곳에서는 붓을 거둘 줄 알아야 한다. 채움과 비움은 결국 어디에 힘을 쓰고 어디에 여지를 남길 것인가 선택의 문제다.
계백당흑의 뜻은 그저 종이 위에만 머물지 않는다. 좋은 작품은 먹으로만 완성되지 않는다. 좋은 기업은 숫자로만 완성되지 않는다. 좋은 삶 역시 채운 것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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