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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경북 아픈 역사의 현장] (9·끝) 美공군 잘못된 정보로 예천 민가 오폭...민간인 70여명 희생
6·25전쟁 당시 경북 예천군 보문면 산성리와 감천면 진평리에 가해진 미 공군의 폭격은 적군의 존재와 상관없는 초토화 작전이었다. 이 때문에 이 마을 주민들에겐 아직 기억조차 하기 싫은 사건으로 남아 있다. 보문면 산성리는 그나마 다행이다. 2007년 진실화해위원회로부터 미군 오폭 사건으로 규명을 받아서다. 보문면 산성리는 2010년 6월 예천군에서 위령비를 세워 희생자와 가족은 조금이나마 위안으로 삼고 있다. 위령비가 건립된 후 매년 합동위령제도 지낸다. 하지만 감천면 진평리는 지금까지 진실 규명을 받지 못한 채 아픔의 시간만 속절없이 흘러가고 있다. 특히 이번 사건은 충북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사건에 이어 두 번째로 미군 서류에 의해 민간인 살상이 확인됐다. 6·25전쟁 당시 잘못된 정보로 민간인 마을에 폭격이 가해져 많은 주민이 참사를 당한 이 사건들은 피해자들에게 아직 아무런 보상이 없는 상태로 역사 속으로 사라질 상황에 봉착해 있다. ◆보문면 산성리학가산에 패잔병 정보 입수한 미군마을 위치 오인 엉뚱한 곳에 폭탄 투하집안일 하던 부녀자와 아이들 희생주민들 노력으로 진상규명 했지만70년지난 지금도 피해자 보상없어◆보문면 산성리 미군 오폭 어떻게 알려졌나 예천읍에서 자동차로 40여 분 거리인 해발 880m의 학가산 중턱에 자리 잡은 보문면 산성리. 여느 산골 마을과 다를 바 없이 평온해 보였다. 하지만 6·25전쟁의 비극을 겪은 지 70년의 세월이 흐른 곳이다. 미군 비행기의 오폭으로 마을 주민 48명이 억울한 죽임을 당했다. 주민들은 아직 전쟁의 상흔을 씻지 못한 채 통한의 삶을 살고 있다. 이 마을에 악몽의 시간이 찾아온 것은 1951년 1월19일 낮 12시쯤이다. 마을 상공에 미군 정찰기 2대가 나지막이 선회하더니 곧바로 나타난 전투기 6대가 융단폭격을 퍼부었다. 휘발유까지 마구 뿌렸다. 이날 남자들은 대부분 인근 산에 나무하러 간 탓에 화를 면했다. 그러나 명절을 앞두고 집안에서 부업으로 명주를 짜던 부녀자와 아이들이 희생양이 됐다. 폭격은 명백한 미군의 오폭이었다. 미군은 당시 산성리와 같은 학가산 자락인 안동시 북후면 신전리(석밭)에 인민군 패잔병 수백여 명이 들어왔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폭격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미군은 마을 위치를 오인했고, 엉뚱한 마을에 폭탄을 투하했다. 주민들은 70년이 지나도록 억울한 죽음에 대한 위로를 받지 못하고 있다.마을의 비극이 알려지게 된 것은 1996년 마을 주민들이 오폭 진상조사위원회를 결성하고 보상추진위원회를 구성하면서부터다. 지난 45년 동안 베일에 가려져 그동안 말 한마디 못하고 숨죽여야 했던 시간이 멈춰지고 진상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주민들이 사건 진상규명과 보상을 요구하는 진정서 등을 관계기관에 보내자, 1999년 예천군의회도 보문면 산성리 오폭사건 진상규명위원회를 구성해 자체 조사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주민들의 끈질긴 진실 규명요구에 2007년 진실화해위원회로부터 '예천 산성리 미군 오폭 사건'으로 규명받았다. 미국이 배상 등 도의적 책임을 지도록 미국 정부와 적극적 협상을 하도록 정부에 권고까지 했다. 하지만 속시원한 답변은 아직까지 들려오지 않고 있다. ◆감천면 진평리 산성리와 동일 시점에 미군이 폭격 진실화해위, 진상 규명 '불가' 통보"당시 흰옷은 적으로 간주하고 폭격 국제법 위반여부는 확인할 수 없어" 유족들 "정부가 피해 보상해줘야"◆감천 진평리 오폭은 진실 규명 불능보문면 산성리와 동일 시점에 감천 진평1리에서도 주민 20여 명이 미군 폭격으로 희생됐다는 주장이 나왔다. 이 사건이 진실화해위원회에 접수된 것은 2006년 11월30일. 진실화해위원회는 그해 12월19일 진상 조사 개시 결정을 내렸다. 당시 주민들은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월19일 오후 3시쯤 장례식을 위해 주민들이 마을 뒷산 능선에 모여 있을 때 미군 전투기 7대가 기관총과 폭탄을 무차별로 퍼부었다"고 했다. 또 "이 폭격으로 동네 30가구 중 25가구가 불에 탔다. 노인, 부녀자, 어린이 등 26명이 숨지고 20명이 총상과 화상을 입었다"는 주장도 나왔다. 특히 사망자 중에는 진평리 주민 외에도 벌방리에서 피란 온 13세 이하 어린이와 20세 이상 부녀자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 마을은 조사 결과 진실 규명이 불가능하다는 통보를 받았다.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 결과서에는 "이 마을은 인민군이 침투한 소백산맥 인근 미군의 대게릴라전 합동 수색작전 지역이어서 인민군이 있는 것으로 의심된다. 흰옷을 입은 다수의 주민도 발견됐다"면서 "이런 상황에서 흰옷을 입은 다수의 주민 존재를 발견하고 이들이 주민인지에 대한 충분한 확인 없이 폭격을 가해 마을을 소각하는 등 민간인에 대한 집단희생이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국제법 위반 여부를 확인할 수 없다"라고 결론을 냈다. 이어 "이 사건은 6·25전쟁 당시 미군이 중·동부 전선 후방에 침투한 인민군과 게릴라들을 소탕하는 작전을 펼치면서 예천 감천면 진평리와 영주 봉현면 노좌리에 이르는 지역을 폭격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고 덧붙였다. 김홍년 진평1리 이장은 "당시 민간인 피해가 있었지만 인민군이 있는 의심 지역으로 오폭 피해에 해당하지 않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며 "시간이 흐를수록 진실 규명에 대한 의지가 떨어지고 있지만 언젠가는 진실이 꼭 밝혀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위령비와 보상 규정이렇듯 이들 마을은 7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피해자들에게 아무런 보상 없이 역사 속으로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보문면 산성리는 진실규명을 받았지만 지금까지 보상은 없다. 그나마 예천군이 2009년 12월 6·25전쟁 당시 억울하게 희생된 영령들의 넋을 위로하고 유가족의 아픔을 달래기 위해 과거와의 화해와 국민통합을 위한 합동위령제를 처음으로 열었다. 이듬해 6월에는 '미군 폭격 사건 희생자 위령비'를 건립해 공식적으로 희생자의 원혼을 달래주고 있다. 산성리 마을 초입 쉼터 옆에 화강석 재질로 세워진 위령비는 가로 1.8m, 높이 3.5m 규모다. 미군 오폭으로 희생된 안인모씨 외 50명의 이름을 새겨 넣고 제단을 마련했다. 제막식 당시 유족들은 "진실화해위가 미 공군이 인민군의 동향이 보고된 산성동 인근 지점의 좌표와 산성동 마을을 동일시했거나, 민간인이 거주하고 있다는 점 등을 충실하게 정찰하지 않은 채 산성동을 폭격한 것으로 판단된다"면서 "정부가 인민군의 민간인 위장 침투술로 인해 '흰옷을 입고 모인 자는 모두 적으로 간주하라'는 내부 묵인에 따라 흰옷을 입은 마을주민이 목격된 산성동을 적의 은거지로 간주하고 폭격 대상으로 삼았을 가능성도 있다고 밝힌 만큼 이에 따른 보상에 적극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산성리 주민들은 진실 규명을 넘어 보상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감천면 진평리는 진실 규명 자체가 불가능해 지금까지 아무런 조치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 2012년 10월 이한성 국회의원이 '예천 산성리 사건 희생자 명예회복 및 보상에 관한 특별법안'을 대표 발의했다. 국무총리 소속으로 예천 산성리 사건 희생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를 두고, 희생자와 그 유족에게 피해 정도 등을 고려해 보상금·의료지원금·생활지원금을 지급하도록 했다. 정부가 위령탑 건립 등 위령 사업에 필요한 비용을 예산 범위 내에서 지원할 수 있도록 했다. 현재 이 법안은 폐기된 상태다.산성리 오폭 피해자 가족인 안태기(74) 노인회장은 "미군 오폭으로 할아버지와 동생, 삼촌 등 무려 9명의 가족을 잃었다"면서 "미군의 오폭으로 규정된 만큼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 정부는 유족에게 국가유공자 대우와 피해를 보상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생존자는 대부분 80세가 넘었으며 언제 세상을 떠날지 모른다. 정부는 이들 피해 당사자와 유족들의 아픔을 껴안아 줘야 한다"고 촉구했다. 장석원기자 history@yeongnam.com미군의 오폭으로 마을주민 48명이 억울한 죽음을 당했던 산성리 마을이 자리한 학가산.마을 주민들이 최초로 폭탄이 떨어진 곳을 가리키고 있다. 〈영남일보 DB〉지난 6월21일 보문면 산성리에서 열린 산성동 미군오폭 위령제는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예천군협의회 주관으로 열려 의미를 더해주고 있다.
2021.10.18
[대구경북 아픈 역사의 현장] (8) 경주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1천여 명…860여명은 국군-경찰에 의해 집단처형
#1. 1950년 8월 3일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에서 경찰관이 부친(이석환)과 삼촌 2명(석륜·석태)을 끌고 가서 아버지와 막내 삼촌은 천북면에서 사살되고, 둘째 삼촌은 목포 바닷가에서 사실 된 것으로 확인됐으나 사체를 찾지 못했습니다. <경주유족회 고문 이원길> #2. 1950년 8월 5일 경찰관 2명이 보도연맹 구실로 삼촌<조극환)을 잡으러 왔다가, 삼촌이 피하자 대신 부친(인환)을 연행해 간 후 행방불명됐습니다. 부친 사망 후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적색분자로 몰리는 등 평생 비통한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경주유족회 고문 조희덕> ◆6.25 격전지 등서 민간인 1천여 명 희생경북 경주시는 한국 전쟁 전·후로 민간인 희생자 수가 많은 지역으로 손꼽힌다. 경주는 한국전쟁 때 국내 최대 격전지인 안강·기계전투가 있었고, 북한군(빨치산)의 퇴각로가 있었기 때문이다. 경주는 이러한 지리적 여건으로 민간인 희생자가 많아 '낮에는 국군이, 밤에는 빨갱이가 들이닥쳤다'라는 어른들의 말이 실감이 날 정도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원회), <사>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경주유족회, 경주시 등에 따르면 경주의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수는 진실화해위 1차 조사 결과 895여 명으로 집계됐다. 제2기 진실화해위원회가 지난해 6월 출법해 올해 5월부터 경주지역 진실 규명에 나서 국민 보도연맹 사건 83건, 민간인 희생 사건 30건이 추가로 접수되면서 희생자가 늘어날 전망이다. 경주의 민간 희생자 유형은 △군경에 의한 민간인 희생 △대구 10월 항쟁 관련 민간인 희생 △국민 보도연맹 사건 △미군 폭격 사건 등 다양하다. 특히 5·16군사정변 이후 김하종 민간인 희생자 경주유족회장(전국유족회 국회 특별법추진위원장)이 당시 혁명재판소에서 반국가 혐의로 징역 7년을 선고받고, 2년 8개월 복역한 사건도 있었다. 진실화해위 1차 조사 결과, 한국전쟁 전·후인 1948년 2월 28일부터 1950년 9월 25일까지 2년 7개월간 경주시 13개 읍·면·동에서 860여 명의 민간인이 육군 정보국 CIC 경주파견대와 경찰에 끌려가 재판도 없이 예비 검속으로 집단 처형됐다. 지역별로 내남면이 150명으로 가장 많고 안강읍 107명·감포읍 90명·문무대왕면(양북면) 77명·양남면 71명·건천읍 53명·서면 40명 등이다. 집단 매장지는 100여명이 처형·매장된 내남면 노곡리(메주골)를 비롯해 내남면 이조리·명계리·용장리·망성리, 천북면 신당리, 건천읍 송선리·철교, 감포읍 나정리(큰 골짜기)·팔조리·감포 앞바다, 문무대왕면 용동리, 산내면 동창천 원두 숲, 경주시 황룡동 등이다. <사>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경주유족회와 경주시는 지난 2016년 11월 19일 황성공원에 경주지역 민간인 희생자 추모를 위한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위령탑’을 건립하고, 매년 10월 합동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경주 기계천 미군 폭격 민간인 35명 숨져진실화해위원회는 2009년 9월 25일 한국전쟁 당시 발생했던 ‘경주 기계천 미군 폭격 사건’으로 민간인이 집단 희생된 사실을 확인하고, 희생된 피해자의 구제를 위해 미국 정부와 협의할 것 등을 국가에 권고했다. 경주 기계천 미군 폭격 사건은 1950년 8월 14일 경주시 강동면 기계천에서 집단으로 피난길에 오른 민간인이 미군 폭격으로 이석영(당시 33세)씨 등 35명이 희생된 사건이다. 민간인 희생자는 최소 35명(남자 19·여자 16명)으로, 확인 희생자 30명·미신청 희생자 1명·추정된 미신청 희생자 4명이다. 10세 미만의 어린이 9명도 희생됐다. 경주시 강동면 안계리(심동·사곡·삽실·구경·초감) 주민들은 이날 북한군이 쳐내려온다는 소식을 듣고 “군인의 눈에 잘 띄는 곳으로 피난해야 피해가 없다”라는 마을 어른의 주장으로 마을 서쪽의 기계천으로 피난길에 올랐다. 당일 미군 정찰기 1대가 피난 지역 상공을 돌다 갔으나 대부분의 피난민들은 정찰 후 포격이 시작된다는 사실을 모른 채 흰 천을 흔들기도 했다. 정찰 후 전폭기 2대가 남쪽에서 날아와 1대씩 번갈아 가며 20분 정도 폭격했다. 미국 공군 문서에 따르면 1950년 7월 한국전쟁에 참여한 미 공군 제18전폭기단 소속의 제39전투편대가 피난민이 모인 강둑에 폭격했다고 기록돼 있다. 폭격은 낮 12시 30분에서 오후 2시 40분까지 F-51 전폭기 2대로 이뤄졌다. 2009년 7월 진실화해위가 이 사건이 미군의 폭격과 기총사격으로 발생한 것이라는 진실규명 결정을 내려 유족들은 사건 발생 60년을 맞은 지난 2010년부터 매년 강동면 양동초등학교 운동장에서 합동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진실화해위는 “폭격 당시 현장에는 인민군이 없었고, 일부러 노출된 장소에 피난해 있던 민간인에 대한 경고나 확인 등의 조치나 민간인과 적을 구별할 의무를 다하지 않고 폭격한 것은 국제관습법적 지위를 가진 국제인도법은 물론, 당시 미군 교범에도 위반된다"고 지적했다. 폭격 당시 부모와 형이 희생된 이원우 미군 폭격 사건 희생자 유족회장 “미군이 피난 길에 오른 민간인들을 무차별적으로 폭격한 것은 명백한 전쟁 범죄”라며 “반드시 미군 폭격에 따른 민간인 희생의 진실을 밝히고 위령탑 등을 건립해 돌아가신 분들의 원통한 한을 되새기겠다”고 말했다. 송종욱기자 sjw@yeongnam.com지난 2016년 11월 19일 경북 경주시 황성공원 내 '한국전쟁 민간 희생자 위령탑' 제막식 모습. 경북 경주시 황성공원 내 한국전쟁 민간 희생자 위령탑 모습.지난 2017년 11월 25일 미군 폭격 사건 희생자 유족회가 '제8회 경주 기계천 미군 폭격 사건 희생자 합동위령제' 모습.
2021.10.04
[대구경북 아픈 역사의 현장] (7) 경산 평산동 코발트광산사건...2~3명씩 밧줄로 묶어 총격…엮인 사람들 덩달아 갱도로 추락
"4·19 직후 유족회를 결성해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을 요구해 왔는데, 가까스로 조성한 위령탑이 군사쿠데타로 해체되고 유족회 간부들이 투옥되면서 지난 40년간 입이 있어도 말을 못 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암흑 같은 세월을 살아왔습니다. 그동안 연좌제로 직업선택의 자유를 빼앗기고, 빨갱이라는 오명을 쓰고 살아온 유족들의 한이 이제야 풀렸습니다."2009년 11월17일 진실화해위원회가 경산 코발트광산 등지에서 발생한 민간인 희생 사건은 군·경에 의한 집단학살이라고 판정하자 <사>경산유족회 고(故) 이태준 초대이사장은 감격해했다. 유족들은 "진실규명 결정이 내려짐에 따라 경산실내체육관에서 합동위령제를 거행하고, 향후 진실화해법 연장과 역사평화공원 조성 등에 본격적으로 나서겠다"고 밝혔다. 유족회는 수년 전부터는 돌아가신 분들의 날짜를 대부분 모르고 있어 음력 9월9일 합동위령제를 지내오고 있다.◆3천500여 명 민간인 학살6·25전쟁 중에 경산시 평산동 코발트광산에서 군·경에 의한 민간인학살이 자행됐다. 유족 등 주민 증언에 따르면 학살은 1950년 7월20일쯤부터 9월20일쯤까지 계속됐을 것으로 추정된다.갱도는 현재 인터불고경산CC 골프장 아래에 있다. 갱내 수평갱도와 수직갱도에서뿐 아니라 인근 대원골에서도 학살이 이루어졌다.피해자는 크게 대구형무소 및 부산형무소 수감자와 보도연맹원이다. 1960년에 이루어진 대한민국 제4대 국회양민학살 특위의 조사에 따르면 대구형무소 재소자 1천402명이 7월에 학살됐다고 한다. 또 대구형무소에서 부산형무소로 이감된 것으로 기록된 1천404명 중 1천172명의 명단이 부산형무소 재소자 명단에 나오지 않아 이 사람들도 학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대구형무소 수감자 등 피해자 대부분 좌익과 무관한 단순부역2006년 정부 주도로 유해 발굴 땅속에 묻혔던 진실도 드러나유족들 연좌제 두려워 입 닫아위령탑에는 달랑 160명 이름만국가가 나서 억울함 풀어줘야1950년 당시 경산·청도·영천·창녕·밀양 등지의 보도연맹원들은 6·25 전쟁 직후 검속되었고, 이후 학살된 것으로 보인다. 피해자 유족들에 따르면 대부분 좌익 사상 등과는 무관한 단순부역자나 농민이었다. 피해자들은 보도연맹원으로 가입 당시 이름과 주소까지 기재했기 때문에 손쉬운 표적이 됐다. 대부분은 집에 있다가 군·경에 의해 경산 코발트광산으로 끌려갔다. 이후 2~3명씩 손과 발을 밧줄로 묶고 수직갱도 앞에 세우고 밀거나 갱도 쪽 사람에게 총격을 가했다. 사망하거나 부상 당해 중심을 잃고 수직갱도로 기울어지면 그 무게로 인해 함께 엮인 사람들도 덩달아 갱도 밑으로 끌려 떨어졌다. 게다가 일부 인원이 살아남을 가능성에 대비해 갱도 밑으로 총격을 가하거나 기름을 뿌리고 불을 지르기도 하였으며, 심지어 발굴과정에서 76㎜ 고폭탄까지 발견된 것으로 보아 폭약까지 사용했다. 이런 끔찍한 생지옥에서 살아남은 일부는 갱도 위로 기어 나오려다 힘이 다해 죽기도 했다.1960년 6월, 사건이 발생한 지 10년 만에 유족회를 결성했다. 이들은 위령제를 지내고 위령탑을 세웠지만, 반국가단체로 규정돼 강제 해산됐고 당시 유족회 간부들은 실형을 선고받았다. 위령탑은 쇠망치에 부서졌다.◆진실화해위원회, 집단학살 판정그로부터 40년, 영원히 묻힐 것 같았던 민간인학살사건은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2000년부터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외치는 목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2005년 출범한 참여정부가 유가족과 시민단체·언론이 요구한 특별법을 제정했고, 이 법에 따라 진실화해위원회라는 국가기관이 설치되어 유해발굴이 시작됐다. 2006년 4월25일 정부 주도로 조사가 시작됐다. 경산을 비롯해 청원·대전·진주·영광에서 유해발굴이 시작돼 3년간 수많은 유해가 쏟아졌다. 총에 맞아 죽은 사람, 기름에 불태워져 죽은 사람, 둔기로 두개골이 함몰된 사람, 수장되고 생매장된 유해들이 드러나면서 땅속에 묻혔던 진실도 드러나기 시작했다. 2009년 11월17일 진실화해위원회는 경산 코발트광산 등지에서 발생한 민간인 희생 사건은 군·경에 의한 집단학살이라고 판정했다. 또 전체 희생자 수는 1천800명을 상회할 것으로 추정되나 정확한 희생자의 수는 확인되지 않은 것으로 밝혔다. 진실화해위원회는 "경산코발트광산 등지에서 발생한 민간인 희생 사건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 보호라는 일차적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군과 경찰이 관할 지역의 국민보도연맹원 등 예비 검속자들과 대구형무소에 미결 또는 기결상태로 수감되어 있던 사람들을 불법 사살한 민간인 집단 희생 사건이다. 비록 전시였다고 하더라도 범죄사실이 확인되지 않은 민간인들을 예비검속하여 사살한 것은 명백한 불법행위"라고 덧붙였다.사법부도 이러한 국가기관의 조사결과를 받아들여 배·보상에 들어갔다. <사>경산코발트광산유족회 유족 109명이 2011년 10월12일 국가를 상대로 1인당 3억원을 보상하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2012년 11월22일 1심에서 승소하여 법원은 희생자 1명에 8천만원, 미망인은 4천만원, 희생자 자녀는 1인당 800만원, 형제·자매는 1인당 400만원씩 유족 109명에게 총 121억원을 보상하라고 판결했다.2년 뒤인 2014년 7월10일 2심 승소에 이어 다시 2016년 8월29일 대법원에서도 승소함으로써 만 5년 만에 최종 승소했다. 이로써 그동안 코발트광산 희생자와 그 유가족들이 주장한 억울한 희생이 국가기관에 의해 받아들여진 것이다. 유족들은 "60여년 동안의 피해를 보상하기에는 배상금이 적은 금액이지만, 국가가 불법행위를 인정하고 희생자 및 유족들의 명예를 회복한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하지만 이후 수습작업이 진행되지 않아 수습된 유해는 유족회가 마련한 컨테이너 안에 방치되고 있다. 2013년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갱도 입구가 큰 안전장치 없이 노출되어 있었다. 2013년 위령 공원과 탑·관람 데크 등이 조성됐으며, 2016년 유족회가 비를 세우고 위령탑과 주변 시설을 정비했다. 입구는 철문으로 폐쇄하고 CCTV를 설치하여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국가가 나서 희생자 찾아야 한다. 정부 추산 2천여 명, 유족회와 언론·시민단체가 추정하는 희생자는 무려 3천500명에 이르는 평산동 코발트광산과 대원골 위령탑에는 160여 명의 희생자 이름만 새겨져 있다. 2001년부터 2009년까지 6차례의 유해발굴과정에서 수습된 유해만 500여 구에 이르는데 왜 이렇게 적은 숫자의 희생자 명단만 적혀 있을까. 70년간 입이 있어도 말을 못 한 유족들이 국가기관이 억울함을 풀어준다고 신고하라고 했는데도 극히 일부만 신고한 것은 무슨 연유일까.그 이유는 1950년 학살 이후 유가족들을 철저하게 입막음하고 탄압해온 연좌제에서 찾을 수 있다. 90년대 중반까지 이어진 연좌제로 유가족들은 고위관리가 되기 어려웠고 해외 유학도 가기 힘들었다. 그렇게 오랜 세월을 살아오다 보니 정부를 믿을 수 없었다. 2005년 1기 진실화해위원회에 신고한 사람은 128명, 그나마 국가를 상대로 한 민사소송에는 109명만 참가했다. 그 109명이 적은 금액이라도 보상받았기에 그나마 2기 진실화해위원회에도 두 달여 동안 50명이 신고했다. 이제는 국가가 나서서 희생자를 찾아내 그들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 싶다. 최영현기자 kscyhj@yeongnam.com1950년 7월20일쯤부터 9월20일까지 군·경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자행됐던 평산동 코발트광산 유골발굴 현장. 2016년 11월25일 위령탑 제막식에서 참석자들이 묵념을 하고 있다.
2021.09.28
[대구경북 아픈 역사의 현장] (6) 6·25전쟁 당시 포항 미군폭격 사건…미군, 100가구 민가 무차별 폭격…1천여명 피란처엔 함포사격
지난 3일 오전 경북 포항시 북구 흥해읍 도음산 산림문화수련장. 이날 이곳에서 6·25전쟁 당시 미군의 폭격으로 억울하게 희생된 포항지역 민간인들을 기리는 위령제가 열렸다. 한국전쟁 폭격사건 민간인희생자 포항유족회(회장 허맹구)와 자유총연맹 포항시지회는 2015년 8월 경북도와 포항시의 도움으로 이곳에 위령탑을 세우고 매년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도음산은 6·25전쟁 때 낙동강 전선의 배후지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이다. 위령탑 뒤편에는 위패 봉안벽이 병풍처럼 둘러섰으며 미군 폭격에 희생된 민간인 135명의 이름과 실명이 불확실한 5명에 대한 내용이 돌에 새겨져 있다. 포항유족회 허맹구 회장은 " 청소년과 등산객이 많이 찾는 이곳에 위령탑이 세워져 6·25전쟁의 참상을 보여주는 교육의 장이 되고 있다"면서도 "잊어서는 안될 사건이 서서히 잊히는 것이 가슴 아프다"고 말했다.◆전국에서 셋째로 희생자 많아 1950년 8월 북한 인민군은 영덕을 거쳐 포항까지 점령했다. 이에 미군이 특수부대를 급파해 함포사격과 공중폭격을 진행해 인민군이 포항 외곽 산악지대로 철수하는 등 치열한 공방이 이어졌다. 8월16일 미8군은 포항 독석리 해안에 고립된 국군 3사단의 해상철수를 돕기 위해 예방공격(豫防攻擊)을 했는데, 이 과정에 북송리 등 포항지역 곳곳이 폭격당했다. 이 같은 공격이 9월 말까지 이어지면서 많은 민간인이 희생됐다.포항유족회에 따르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조사 결과, 6·25전쟁 당시 포항에서는 13개 마을에서 550여 명에 달하는 민간인들이 희생된 것으로 파악됐다. 이 중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는 189명이다. 성별로는 남성 81명·여성 108명으로 여성이 57.1%를 차지했다. 연령별로는 0∼20세(희생 당시 나이 기준)가 86명(47%)을 차지했고, 청장년층인 21∼40세 54명(29.5%), 41∼60세 27명(14.8%), 노년층인 61세 이상 16명(8.7%)이다. 미성년자와 노년층이 총 102명으로 전체 55.7%에 달한다. 또 일가족 내 2인 희생사례는 44건이며, 이 중 한 가족에서 7명이 희생된 사례도 있었다. 포항유족회 관계자는 "미군 폭격 사건이 발생한 전국 21개 지역의 희생자들 중 진실이 규명된 희생자 1천109명 중 포항지역 희생자는 모두 141명으로 전국에서 셋째로 희생자가 많은 곳"이라고 말했다.◆마른 하늘 날벼락 맞은 북송리# 흥해읍 북송리 사건부역 징집자 복귀 마을 잔칫날폭탄 투하·사격 100여명 사망흥안·마산리 등지도 폭격 피해포항시가지에서 20분 정도 떨어진 북구 흥해읍 북송리. 6·25전쟁 당시 100가구 정도가 살았던 이 마을에서는 인근 영덕전투에 부역으로 징집됐다가 돌아온 사람들을 축하하기 위해 주민들이 모여 돼지를 잡고 있었다. 낮 12시쯤 프로펠러가 1개 달린 검은 비행기가 2대씩 짝을 지어 포항 쪽에서 날아와서 마을 상공을 지나갔다. 그 후에 비행기 2대가 저공으로 마을을 2∼3바퀴 선회했다. 점심을 먹고 있을 무렵 검은 비행기 20대 정도가 날아와 다시 동네 위를 선회한 후 곧바로 폭격을 시작했다. 적어도 30분 이상 폭격을 했는데 당시 비행기가 거의 지붕에 가까이 날아와서 폭탄을 투하하고 사격을 했다. 폭탄이 떨어져서 사람 키 이상의 깊고 큰 구덩이가 생긴 곳도 있었다. 폭격으로 불이 났고, 그 불이 다른 집으로 옮겨붙어 3개 마을(큰 동네 70가구, 작은 동네 10가구, 서쪽 양촌 20가구)중 큰 동네의 3분의 2가 전소됐다. 이 폭격을 마치고 비행기는 동쪽 방향으로 날아갔고 당일 20여 대의 무리를 지은 검은 비행기가 다시 북송리를 포함한 흥해 지역 상공을 약 10~20분에 한 번씩 여러 시간 선회했고, 흥안·마산리 등이 폭격당했다. 마을과 인접한 곡강천변의 소나무 숲에는 피란 나온 주민들로 넘쳐났다. 이날 폭격으로 이 마을에서는 희생자가 100여 명에 이르렀고, 이 중 신원이 확인된 사람은 53명이었다. ◆'제2의 노근리' 포항 송골해변# 환여동 송골해변 사건국군 "피란민 속 북한군 섞여"포격 요청에 美군함서 15발 쏴100여명 숨지고 수백명 다쳐북송리 못지않게 피해가 큰 곳이 북구 환여동 '송골해변' 이다. 이 사건은 1999년 충북 영동의 노근리 사건이 알려진 뒤 피해자와 유가족이 국회에 진상을 요구하는 청원을 제기하면서 밝혀져 '제2의 노근리' 사건으로 불리기도 한다. 영국 BBC 방송은 2001년 5월부터 포항 현지 취재에 나서 당시 정황을 확인해 다큐멘터리 '모두 죽여라'(Kill Them All)라는 프로그램을 방영했을 만큼 해외에도 잘 알려진 사건이다. 1950년 9월1일 오후 2시쯤 포항 송골해변 앞바다에 미 군함(헤이븐호)이 나타나 30~40분간 육지 쪽으로 집중 포격을 가해 100명 이상 숨지고 수백명이 다쳤다. 송골해변은 높이 10m 정도의 절벽 아래 백사장으로, 포항 시내에 진주한 북한군이 발견하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한 주민들이 피란처로 삼은 곳이다. 유족에 따르면 해변에서 1㎞쯤 떨어진 바다에 있던 군함이 갑자기 피란민들이 모여 있던 백사장을 향해 포격을 했다는 것. 당시 너비 10m 길이 1㎞ 정도의 백사장에는 포항 주민 등 1천여 명이 피란생활을 하고 있었다. 당시 상황에 대해 한 유족은 "점심을 먹고 쉬고 있던 중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져 비를 피하려고 우왕좌왕하자 정찰기 한대가 머리 위를 저공비행한 뒤 곧바로 포격이 시작됐다"고 증언했다. 그는 포탄이 터지자 죽천리 쪽으로 도망가 목숨을 건졌으나 형과 형수가 그 자리서 숨졌다고 말했다. 그는 "포격이 멈춘 뒤 백사장과 앞바다가 온통 핏빛으로 물들었고 살아남은 사람들이 널려 있는 시체 더미에서 가족들의 시신을 찾았다"며 "적어도 100명 이상이 숨졌다"고 주장했다. 당일 헤이븐호는 '해안 함포사격통제반(SFCP)'으로부터 함포사격 명령을 받자 목표물이 피란민이라는 사실을 알리고 재확인을 요청했다. 통제반은 "육군으로부터 피란민 속에 인민군이 섞여 있다는 정보와 함께 포격 요청을 받았다"며 함포 사격을 명했다. 헤이븐호는 좁은 해변에 밀집해 있던 노인과 여자, 어린이가 대부분인 1천여 명의 피란민에게 10여 분간 함포 15발을 쐈다. 포항유족회 측은 "이 사건은 6·25전쟁 중 발생한 미군의 민간인 포격사건 중 유일한 함포사격 사건이지만 지금은 잊힌 사건이 되고 있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멀고 먼 국가 배상의 길# 특별법 제정 하세월수많은 민간인 미군폭격 희생배·보상 입법 번번이 '물거품'유족들 "잊혀선 안 되는 사건"6·25전쟁 당시 전국 곳곳에서 많은 민간인이 미군의 포격으로 희생됐지만 유족들은 국가로부터 배·보상을 받기는 너무나 힘들다. 전국적으로 '한국전쟁 후 민간인 희생자 진상규명및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지역 또는 개별적으로 추진됐으나 국가의 배·보상 조항 때문에 모두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실패했다. 이후 개별 입법(지역별)보다는 통합(전국)입법이 추진됐으나 이마저도 국회 문턱을 넘기지 못한 채 해를 거듭하고 있어 유족들의 가슴만 아프게 하고 있다. 하지만 포항 송골해변사건은 유일하게 재심 끝에 국가배상을 받은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송골해변 미군 함포사건으로 아버지와 동생을 잃었던 방모씨는 69년 만인 2019년 국가배상을 판결을 받았다. 서울고법 민사7부는 방모씨가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 재심에서 원고 패소 원심을 깨고 "4천800여 만원을 지급하라"고 원고 일부 승소 판결했다. 방씨는 "헤이븐호가 단순 피란민으로 보이는데 왜 함포사격을 하느냐고 국군에 재확인까지 요청했는데 국군은 다시 함포사격을 명령했다"며 국가에 대한 손해배상 소송 배경을 설명했다. 포항유족회 관계자는 "유일하게 국가배상 판결을 이끌어낸 소송에 많은 유족들이 참여하지 못해 아쉬움으로 남는다"고 말했다. 마창성기자 mcs12@yeongnam.com한국전쟁 폭격사건 민간인희생자 포항유족회와 자유총연맹 포항시지회 관계자들이 지난 3일 포항시 북구 흥해읍 도음산 산림문화수련장에서 위령제를 지낸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포항시 제공〉
2021.09.14
[대구경북 아픈 역사의 현장] (5) 김천 보도연맹원 학살사건...좌익 누명 씌워 무차별 체포…진위 안 가린 채 1200여명 총살
국민보도연맹원(國民保導聯盟員)은 좌익사상 전향자를 지도하는 등 효과적으로 관리함으로써 잔존 좌익세력을 없애고 반공정신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의 관변단체였다. 보도연맹 초기 가입자 대부분은 전향자들이었다. 그러나 가입대상이 확대되고, 모집인원이 말단 행정기관에 할당되면서 좌익과 관련 없는 국민이 가입했다. 본인 의사와 무관하게 가입이 강제되거나, 심지어 본인도 모르게 가입된 경우도 있다. 6·25전쟁 발발 후 적에게 협력할 가능성이 있다는 잘못된 판단으로 경북 김천에서도 보도연맹원에 대한 대규모의 무차별 학살이 있었고, 그 상흔은 깊고도 깊다.보도연맹 초기 전향자 대부분정부 반공정신 홍보 관변단체연맹원 늘리려 강제 가입까지6·25전쟁 터지자 빨갱이 몰이유족들 유해 수습조차 못한 채지역사회 따가운 눈총 시달려희생자 기리는 사업 펼칠 계획◆김천 보도연맹원 1200여 명 학살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자료(대구·경북지역 형무소 재소자 희생 사건 진실규명 및 불능 결정서)와 신기철 전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관의 자료에 따르면 김천지역에서 학살된 보도연맹원은 1천200여 명으로 추정된다.미24사단 CIC 보고서에 의하면, 당시 김천지역에서 예비검속된 주민은 1천200여 명이다. 이들은 김천경찰서 유치시설에 200여 명, 김천소년형무소(교도소)에 1천여 명이 수용됐다가 1950년 7월 중순에서 하순 사이에 총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장소는 김천시 구성면 광명리 대뱅이재· 송죽리 돌고개· 구미리· 마산리 등 구성면 일원과 대항면 직지사계곡, 대덕면 등으로 조사됐다.이때 김천지역(금릉군 포함)에서 체포된 주민들은 김천경찰서 유치장에, 선산·상주· 문경군(당시 행정단위 기준), 경남 거창군 등 김천 인근 지역의 보도연맹원들은 김천소년형무소에 감금된 것으로 나타난다.진실화해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김천소년형무소는 1950년 7월16일 후퇴했다. 이를 근거로 형무소 후퇴 이후 희생자들은 재소자가 아닌, 지역 주민들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6·25전쟁 발발 전 김천소년형무소에는 소년 기결수 600여 명과 성인 미결수 400여 명 등 1천여 명이 수감돼 있었다. 이들 가운데 349명이 전쟁 발발 후 대구형무소로 이감됐고, 여순사건 관련자를 비롯해 좌익재소자 등 남아 있던 재소자 650여 명 가운데 상당수는 김천에서 처형된 것으로 보인다.한편, 기록에 따르면 김천시 국민보도연맹은 일제 강점기 때부터 좌익 운동을 주도한 임종업을 간사로 선임한 가운데 결성됐다. 이후 가맹 자격이 확대되자 보도연맹은 여러 장의 신청서를 나눠주고, 누구에게나 신청서에 도장을 받아오게 하는 등의 방법으로 1천명이 넘는 연맹원을 확보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들은 6·25전쟁이 발발하자 남침을 규탄하는 벽보를 붙이는 등 선전 활동에 동원됐다. 이후 이들의 후방 교란을 의심한 정부의 수용령에 따라 경찰서에 집단 수용됐다가 공간이 좁아 김천소년형무소로 이송됐고, 공산군이 대전에 이르렀을 무렵 연맹원 전원에 대한 즉결처분 명령이 시달되자, 연맹원 명단을 인수한 헌병 당국은 진위도 가리지 않은 채 총살했다는 것이다.이러한 와중에서 1천명 정도의 희생자가 발생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희생자 가운데는 좌익활동 경력이 없으나 친구나 주변의 권유로 보도연맹 가입원서에 도장을 찍었다가 끌려간 사람도 상당수라고 밝히고 있다.문재원 전 김천향토사연구회장은 "당시 보도연맹 정식 가입자는 검거돼 재판을 받고 각 교도소에 수감된 상황"이라면서 "좌우 모두 집단 최면상태에서 저지른 만행"이라고 말했다. ◆"이유도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가" 강영구(76) 한국전쟁 전후 김천 민간인 희생자 유족회 회장의 지금까지 인생을 관통한 화두는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선친의 누명 벗기'였다. 김천시 개령면 부잣집 막내아들로 일본으로 유학까지 다녀온, 당시 인텔리였던 그의 부친 강태봉(당시 35세)씨는 면내에서 명망이 높았다고 한다. 이러한 가운데 1950년 7월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친 경찰관에게 끌려 집을 나간 게 그의 모친이 기억하는 남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가족들이 백방으로 수소문했지만 묘연했던 그의 부친 행방은 이웃 마을 사람에 의해 확인됐다. 김천시 구성면의 보도연맹원 학살 현장에서 총알이 빗나가 사체 더미에 묻혀 있다가 가까스로 탈출한 이웃마을 주민이, 강 회장의 모친에게 부친 죽음을 확인해 줬던 것이다. 탈출할 때부터 혼이 나가다시피 한 그 주민도 며칠을 앓다 끝내 숨졌다고 한다. 강 회장은 "선친은 단 하루도 활동한 적 없는 좌익으로 몰려 목숨을 잃었고, 우리 가족은 주변 눈총(좌익 가족)을 피해 김천 시내로 이사까지 했다"며 힘들었던 어린 시절을 회상했다. 그는 "군 복무 중(1967년) 베트남전 파병 요원으로 선발됐다. 생환을 장담할 수 없는 전장으로 가는 터라 선친께서 보도연맹원으로 지목된 연유만큼은 꼭 알고 싶었다"며 "보도연맹 사건 당시 면장을 찾아가 선친께서는 좌익활동을 한 적이 없었다고 따졌더니 '상부에서 인원이 할당돼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했다. 김천시(금릉군 포함) 각 동과 면별로 보도연맹원 색출 인원이 20~30명씩 배정된 것으로 알고 있다"고 주장했다.강 회장은 "선친은 구성면 무릉동에서 화를 당했다. 유골은 수습하지 못했지만 그곳의 흙을 가져다 가묘를 만들었다"며 "기일도 음력 6월14일로 정해 기제사를 모시고 있다. 이제는 진상이 규명돼 선친께서 '빨갱이'라는 누명을 벗었고, 나도 떳떳하게 살고 있다"며 다행스러워했다. 그는 "그동안 지역사회에선 보도연맹 관련 희생자들을 '빨갱이 앞잡이'로 보는 경향이 있었다. 심지어는 4촌 간임에도 희생자 유족에게 등을 돌릴 정도로 인식이 좋지 않았다"고 덧붙였다.◆"희생자 기리는 사업 펼칠 계획"보도연맹 사건에 대한 국가 차원의 진상규명이 시작된 시기는 참여정부 시절인 2007년 5월부터였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이때부터 3년간 보도연맹원 학살사건을 조사한 결과 민간인 4천934명이 군경에 의해 처형당했음을 확인했다. 하지만 사건 발생으로부터 시간이 너무 많이 흘렀고, 관련 기록이 소각되는 등으로 제대로 파악하기가 힘들었다고 밝혔다. 다른 관련 자료에 따르면 사망자가 20만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전국 168곳에 학살된 민간인들이 매장돼 있을 것으로 추정한 진실화해위원회는 2009년까지 경산 코발트광산·충북 청원 분터골 등 13곳을 발굴해 유해 1천617구를 수습하고 2010년 12월 위원회를 해산했다.이러한 가운데 대법원은 2011년 6월30일 울산 보도연맹원 유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에 대한 고등법원의 '원고패소'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되돌려 보냈다. 고등법원은 시효가 지났다고 판결했으나 대법원은 국민을 보호할 의무를 지닌 국가가 진실을 은폐해 원고들의 소송 기회를 박탈했기 때문에 소멸시효 주장을 권리남용이라고 해석한 것이다.김천에는 보도연맹 희생자의 유족이 200여 명 있으나 유족회에는 회원 40여 명이 등록돼 있다. 회원 가운데는 고령자가 많아 유족회장과 사무국장 등 몇몇이 이끌어가고 있다. 대법원이 국가로부터 손해배상을 받을 수 있는 길을 터줬으나 현재까지 18명이 소송을 제기, 16명이 승소한 상태다. 강영구 회장은 "다른 지역 유족회는 추모비를 세우는 등 활동이 활발하다. 김천 유족회도 관계 기관과 협조를 통해 희생자들을 기리는 특색 있는 사업을 펼쳐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박현주기자 hjpark@yeongnam.com'한국전쟁 전후 김천 민간인 희생자 유족회' 회원들이 현충일을 맞아 구성면 대뱅이재 집단 학살 현장을 찾아 추념하고 있다. 〈김천 민간인 유족회 제공〉김천시가 보도연맹원이 집단 학살된 구성면 대뱅이재 정상 부근에 세운 '김천국민보도연맹 사건 및 김천형무소 사건 희생지' 안내판. 〈독자 제공〉
2021.09.07
[대구경북 아픈 역사의 현장] (4) 미군폭격기 모심듯 융단폭격...매년 음력 7월3일 밤이면 집집마다 불 켜는 구미 형곡동
경북 구미시 형곡동은 1951년부터 매년 음력 7월3일에는 한밤중에도 집집이 불이 환하게 켜진다. 마을 주민 대부분이 같은 날에 제사를 지내기 때문이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전쟁에도 안전하다고 소문이 난 형곡동은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8월16일(음력 7월3일) 미군 폭격기의 항공 폭격으로 주민 130여 명의 억울한 목숨을 앗아간 곳이다. 이날 미군 폭격기 8∼9대가 형곡동 일대를 융단 폭격하고, 기관총을 쏘아 130가구가 살던 마을은 쑥대밭이 됐다. 당시 요행히도 살아남은 주민은 "마을 도랑에 핏물이 흐를 정도로 참혹했다"고 한결같이 입을 모았다. 대구함락 우려한 맥아더 장군"왜관 북쪽 황무지 만들라" 명령 폭격 1시간만에 사망자 130여명 마을주민 대부분 같은 날 제사 유족측 진실규명·피해보상 요구 정부 등은 소극적 답변만 내놔 과거사정리위 지원사업 권고에 66년만에 희생자 위령탑 건립◆아무 경고 없이 시작된 미군 폭격1950년 여름은 6·25전쟁은 매우 유동적이었고 잦은 혼란을 겪던 시기로 인민군은 별다른 저지 없이 빠른 속도로 남한으로 밀고 내려왔다. 금산~영동~함창~안동선까지 진출한 인민군은 미군과 국군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낙동강을 건너 연합군 전선이 강화되기 전에 조기 결전을 강행했다.당시 유엔군은 우회 기동, 포위와 야간침투를 조직적으로 저지할 충분한 병력이 부족했다. 국군은 산악지대와 동해안 지역을 담당하고 미군 제24사단은 김천·군위·의성에서 재편성했다. 미군 제1기병사단은 영동 일대를 담당하고 미군 제25사단은 상주 정면을 방어하면서 우세한 공군에 의한 폭격으로 남하를 저지하려는 지연 작전을 펼치는 상황이었다구미시 형곡동은 산으로 둘러싸인 마을로 6·25전쟁에도 안전하다고 소문이 난 곳으로 마을주민은 피란을 가지 않았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 낙동강을 미처 건너지 못한 다른 지역 피란민도 많이 모여들었다. 폭격이 있었던 1950년 8월16일 마을주민은 평소와 다름 없이 밭일을 하거나 쉬면서 일상생활을 보냈고, 피란민은 형곡 냇가에서 더운 날씨를 피할 수 있는 하얀 천으로 천막을 쳐 놓고 있었다. 시무실 마을(70가구)과 사창 마을(60가구)로 나눠진 형곡동에는 폭격 당시 인민군은 없는 상태에서 아무런 경고 없이 폭격이 시작됐다. 그러나 "폭격 당일 아침에 인민군 4명이 마을로 내려와 돼지를 잡아갔다"라고 증언한 기록은 남아있다.폭격 목격자는 "1950년 8월16일 오전 8시쯤 비행기 정찰에 이어 오전 10시쯤 B-29 폭격기 2개 편대가 남쪽에서 날아와 1시간 동안 폭격과 기총 소사 공격이 있었다"고 한결같은 증언을 했다. "이날 폭격으로 시무실과 사창 마을의 희생자는 131~133명에 이른다. 형곡 냇가에 모여있던 수많은 피란민이 희생되면서 사상자 핏물이 한여름 냇가에 흐를 정도로 참혹했다"는 증언도 여러 곳에 기록돼 있다.◆미군 문서에 "융단 폭격 준비"미군 문서에는 '1950년 8월16일 미군 1기병 사단에 구미시 형곡동을 포함한 사각 지역에 B-29 융단 폭격을 준비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라는 기록이 존재한다. 1988년에 발간된 푸트렐(Futrell) 박사의 논문에는 '1 기병사단 병력은 8월16일 칠곡군 왜관의 사각 지역에 B-29 융단 폭격을 준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8월15일 공군은 총 260회 출격했고, 이 가운데 120회는 한국군 지역, 68회는 1기병사단 지역, 43회는 24·29·25사단 지역에서 이뤄졌다'라고 했다.푸트렐은 '이날 폭격은 맥아더 장군의 지시와 오도넬 준장의 지휘로 이뤄졌고 미군은 폭격 지역을 12곳으로 나눠 지역당 폭격대대를 보내 자유낙하 폭탄 500 파운드형 3천84기와 1천파운드형 150개를 투하했다. 북한군의 8월 공세로 임시 수도였던 대구의 함락이 우려되고, 인민군은 낙동강 건너에서 병력을 증강하는 상황에서 맥아더 장군은 스트레이트 메이어 장군과 오도넬 장군을 불러 B-29를 총동원해 왜관지역 융단 폭격 임무를 부여했다. 왜관 북쪽의 일정 지역을 황무지로 만들라는 맥아더의 지시에 따라 폭격의 성공 여부와 상관없이 임무를 수행한 것은 심리적 효과 때문으로 폭격 지역 언저리의 형곡동은 인민군 소재와 관계없이 대구를 지키려고 펼친 융단폭격의 대상이 됐다'라고 기록했다.◆"마을에는 인민군 없고 피란민뿐"2008~2010년까지 정부의 진실화해위원회는 형곡동 폭격을 목격한 주민을 대상으로 목격자 진술과 증언을 녹취했다. 당시 진술인은 한결같이 "형곡동에는 인민군은 전혀 없는 상태에서 피란민 수백 명이 모였고, 남쪽으로 3㎞가량 떨어진 산악지대 3곳에 인민군이 집결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고 주장했다.미군 폭격으로 부모를 한꺼번에 잃은 강응구(당시 21세)씨는 "미군기 폭격 전날에는 정찰기를 확인했고 폭격일 오전 10~11시에는 전폭기 8대의 기총소사와 폭격으로 마을 뒷산인 토깡골에서 소먹이를 하던 아버지와 집에 계시던 어머니가 모두 돌아가셔서 형님과 함께 부모님 시신을 수습했다"고 증언했다.가까운 이웃과 친인척 11명이 폭격으로 숨진 것을 목격한 박태식(당시 19세)씨는 "1950년 음력 7월2일 오전 8시쯤 프로펠러가 달린 정찰기 1대가 산 높이와 비슷한 고도 300m에서 2바퀴 돌면서 정찰을 했고 다음 날에는 전폭기 8대가 편대를 이뤄 남쪽에서 날아와 5분 정도 폭격했다. 2㎞ 떨어진 사창마을보다 시무실 마을에서 많은 사람이 희생됐고, 사창 마을에선 형곡 냇가를 집중적으로 폭격했다"고 진술했다.어머니와 누나·여동생이 희생된 김교탁(당시 15세)씨는 "미군 폭격이 시작된 오전 11시에 가족은 모두 집에 있는 상태에서 폭탄이 떨어져 아버지와 자신은 구사일생해 가족의 시신을 수습했다. 시무실과 사창 마을 130~140가구는 모두 파괴되거나 불에 탔다"고 기억했다.형·누나·고모부가 미군 폭격으로 사망을 목격한 김재수(당시 11세)씨는 "폭격 당시 사망한 가족은 시무실 집에서 쉬고 있었고, 오전 11시쯤 갑자기 전폭기 4~5대가 날아와 논에 모를 심는 형태로 집중적으로 포격하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라는 목격담을 녹취록에 남겼다. ◆정부·미국, 사망자 피해보상해야미군 오폭 피해 유족으로 구성된 형곡동위령탑건립위원회는 1992년 국방부에 진실 규명과 피해 보상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제출했으나 "미국의 ‘미’도 꺼내지 말라"는 냉담한 답변만 돌아왔다. 형곡동위령탑건립위원회는 1992년과 2005년 두 차례에 걸쳐 또다시 위령탑 건립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구미시에 냈으나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답변뿐이었다. 현재 피해 주민과 유가족은 "미군 오폭으로 형곡동 주민이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사실이 명백히 밝혀진 만큼 정부와 미국은 사망자와 유가족에 대한 명예회복과 피해 보상에 나서라"고 요구했다. 훗날 확인된 미군 문서에는 '미8군은 형곡동·왜관읍 등에 B-29 융단 폭격을 준비하라'고 명령한 내용이 확인됐다. 미군은 임시 수도였던 대구의 함락을 우려해 적군의 전투력과 사기를 꺾을 목적으로 인민군 병력이 은신했다고 의심한 민간인 마을을 폭격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형곡동 희생자 유가족들의 당시 마을엔 인민군이 없었다는 진술에 따라 과거사위원회는 미군 폭격을 인정했다. 1992년 결성된 형곡동위령탑건립위원회는 2006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 진정서를 넣었다. 과거사정리위원회는 '2010년 6월 미군 폭격으로 최소한 29명이 사망했다고 규명한 뒤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희생자 위령 사업을 지원하라'고 권고했다. 이에 따라 2016년 8월 구미시 형곡동 산33-5에서는 6·25전쟁 당시 미군 폭격기의 오폭으로 희생된 고인들의 넋을 달래자는 주민과 유족의 노력으로 66년 만에 '6·25전쟁 형곡동 폭격희생자 위령탑'이 세워졌다. 백종현기자 baekjh@yeongnam.com2016년 8월 6·25 전쟁 형곡동 폭격 희생자 위령탑을 건립한 주민·유족·기관단체장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구미시 제공1950년대 구미시 형곡동(시무실·사창 마을) 전경.
2021.08.31
[대구경북 아픈 역사의 현장] (3) 문경 석달마을 양민 학살사건 "빨갱이 누명 벗었지만 정부 차원 위령비나 위령 시설 하나 없다"
경북 문경시 산북면 석봉리 석달마을은 교통이 발달한 요즘도 굽이굽이 산길을 돌고 돌아 찾아가야 할 정도로 깊은 산골 마을이다. 70여 년 전의 그 사건이 없었다면 세상 시름 잊고 전원생활하기에 잘 어울리는 곳이다. 사건 당시 석달마을은 전체 25가구 가운데 14가구가 채씨거나 인척인 평화롭기 그지없는 채씨 집성촌이었다. 이러한 산골 마을에 참극이 벌어진 것은 6·25전쟁이 일어나기 전해인 1949년 12월24일 정오쯤이었다. 국군 제3사단 25연대 3대대 7중대 장병 69명이 석달마을에 느닷없이 들이닥쳐 첫돌도 지나지 않은 유아 5명과 12세 미만 어린이 26명 등 주민 86명을 학살하고 집 24채를 불태우는 만행을 저질렀다. 하지만 정부는 1950년 공비 출몰에 의한 총살로 호적을 정리했다. 국군이 아니라 공비에 의해 마을 주민이 희생됐다고 결론을 내린 것이다. 심지어 "희생자들이 빨갱이였다"라고 왜곡되기도 했다.◆아무런 이유없이 무차별 사격한겨울인 1949년 12월24일 정오쯤 국군 복장에 중무장한 괴한 80여 명이 마을을 포위하고 주민 모두 마을 앞 논으로 나오라고 했다. 하지만 추운 날씨에 주민들이 잘 응하지 않자 집에 불을 지르고 뛰쳐나온 주민들을 논에 모이게 한 뒤 어떤 확인이나 조사도 없이 무차별 사격해 그 자리에 모인 주민 대부분을 숨지게 했다.이들은 살아있는 사람들은 살려줄 테니 일어서라고 한 뒤 다시 모이자 또다시 총격을 가했다. 두 번째 만행을 저지른 것이다. 이웃 동네에 갔다가 석달마을에 연기가 솟아오르자 급히 돌아온 주민들과 겨울방학을 맞아 일찍 귀가하던 초등학생들을 마을 뒤 산모퉁이에 모아놓고 사격하는 세 번째 학살을 했다.1949년 중무장 국군 들이닥쳐채씨 집성촌 주민 무차별 총격각계 끈질긴 진상조사 요구로57년만에 과거사위 통해 규명소송제기 일부 유족만 배상금보상·위령시설 특별법은 감감세 차례의 무차별 사격으로 전체 주민 128명 가운데 81명이 현장에서 숨지고 10명의 중상자가 발생했다. 중상자 중 2명은 날이 어둡기 전에 숨지고 2명도 그날을 넘기지 못했다. 1명은 병원으로 후송됐으나 끝내 숨져 모두 86명이 희생됐다. 여자가 41명, 15세 이하 어린이가 26명, 65세 이상 노인이 13명이었다.사건이 발생한 다음날 문경경찰서와 산북면사무소 직원들이 찾아와 중상자들을 병원으로 후송했다. 다음 해 1월17일 신성모 당시 국방부 장관이 석달마을이 아닌 인근 김룡초등을 방문해 생존자들을 위한 구호품과 집을 지을 비용을 지원했다. 살아남은 주민들은 이 돈으로 다시 집을 짓고 마을로 돌아왔다. 그리고 정부는 직권으로 이 사건을 공비 출몰에 의한 총살로 호적을 정리했다. 마을 주민 누구도 믿지 못했고 군인들의 소속이나 만행 이유에 대해서도 전혀 알지 못했다.◆사건 발생 57년 만에 진실 규명주민들은 4·19혁명이 일어난 다음 달인 1960년 5월 국회와 정부에 호소문을 전달하고 진상 규명을 요구했다. 국회와 정부는 진상조사를 발표했으나 1961년 5·16 사태로 모두 중단되고 호소문을 만들었던 유족 2명만 3개월간 경찰서에 구금되고 말았다. 이후 군사정권이 이어지면서 학살사건에 대한 진상 조사는 분위기조차 형성하지 못했다.유족들은 1993년 '석달마을 양민집단학살자유족회'를 만들어 31명의 이름으로 입법·사법·행정부에 탄원서를 제출하고 국회를 찾아가는 등 다시 진상을 밝혀줄 것을 각계에 요청했다. 그해 7월 문경군의회에서 진상조사를 시작했고 12월24일 첫 위령제를 지냈다. 1995년 지역 출신 국회의원의 주도로 특별법이 발의됐으나 여야 정쟁으로 본회의 처리가 무산됐다. 이처럼 진상규명이 진척이 없던 차에 유족들은 재미 사학자에게 부탁해 1998년 미국에서 미 극동군사령부의 기밀 해제된 문서에서 '석달마을 사건이 처음에는 공비들의 범행으로 보고됐다가 국군의 소행으로 확인됐다'는 문서를 입수했다.하지만 이러한 자료를 바탕으로 사건 진상규명과 해결을 촉구하는 탄원서를 대통령 등에게 보내고 특별법 제정을 청원했지만 여전히 해결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경북도의회도 1999년 양민학살진상규명특별위원회를 구성해 석달마을 사건을 조사했고 2004년 배상법 제정을 국회에 청원하기도 했다. 유족들은 2000년 전국 처음으로 진상조사와 피해배상 등에 관한 법률 제정을 하지 않는 것은 위헌이라는 취지의 헌법 소원을 냈다.2006년 정부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를 발족하자 유족들은 이곳에 조사를 신청했다. 위원회는 사건 발생 57년 만인 2007년 석달마을 사건이 국군에 의한 범행이라고 진실을 규정했다.◆배상이나 보상은 아직 미지수"제주와 여순사건, 광주항쟁 등은 모두 특별법이 제정돼 국가가 배상과 보상을 해줬지만 석달마을 양민학살사건은 몇 차례의 청원에도 아직 특별법을 만들지 않고 있습니다."사건 당시 어머니 배 속에 태아로 있었다는 채홍달(72) 유족회 총무는 "빨갱이라는 억울한 누명은 벗었지만 국군에 의해 무고하게 희생된 주민에 대한 배상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면서 "저항 한 번 못해보고 희생 당한 주민들의 원혼과 살아남은 유족들의 아픔을 국가가 방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유족회는 진상규명 노력과 함께 위령 사업도 펼쳤다. 유족회를 결성하면서 합동위령제를 지내기 시작했다. 석달마을에서 지내다 2001년부터 점촌역 광장으로 옮겨서 사건의 진상을 알리려고 했다. 다시 마을에서 위령제를 올리고 있으나 코로나19 여파로 지난해는 이마저도 지내지 못했다. 더욱이 위령제를 산자락에서 지내다 보니 한겨울의 추위도 고난이었다.2009년 문경시의 지원으로 학살 현장에 미처 꽃을 피워보지도 못하고 희생된 어린이 26명의 원혼을 달래기 위한 위령비를 세웠다. 그 옆에 여류 시인이 어린 혼을 위로하는 작은 시비도 세웠다. 하지만 정부 차원의 위령비나 위령 시설은 하나도 없다. 이것이 수많은 생목숨을 앗아간 뒤에 취해진 조치의 전부다.유족회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 의해 진실이 공식 결정되자 국가를 상대로 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지만 1심과 2심 재판부는 손해가 발생한 날로부터 5년, 손해를 안 날로부터 3년의 소멸시효가 완성되었다는 이유로 청구를 기각했다. 하지만 2011년 대법원은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대법원은 "진실을 은폐하고 진상 규명을 위한 노력조차 게을리한 국가가 이제 와서 문경 학살 사건의 유족인 원고들이 미리 소를 제기하지 못한 것을 탓하며 시효 완성을 이유로 채무 이행을 거절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판시하고 손해배상 청구권 시효는 진실화해위가 진실 규명 결정을 한 2007년 6월부터 시작된다고 봤다.이 덕분에 일찍 소송을 제기했던 유족 4명이 다소의 배상금을 받았으나 나머지 유족들은 아무 배상이나 보상을 받지 못했다.참사의 화를 피해 살아남은 석달마을 유족은 이제 몇 명 남지 않았다. 현재 이 마을은 9가구 16명이 살고 있으며 유족은 12명이다. 사건 당시 생존했던 유족은 2명뿐이다. 국민을 지켜야 할 정부가 오히려 무고하고 선량한 국민을 학살한 사건이 석달마을 양민학살사건이다. 당연히 희생자와 유족에 대한 보상과 배상이 이뤄졌어야 했다. 유족회는 "다행히 뒤늦게나마 진실이 규명됐지만 배상이나 위령 시설 건립을 위한 특별법 제정은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인다"며 그래도 정부만 쳐다보고 있다. 글·사진=남정현기자 namun@yeongnam.com문경 석달마을 양민학살사건 현장에 세워진 어린이 위령비 앞에서 유족회 채홍달 총무가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2019년 열린 제70주기 문경 석달마을 양민 희생자 합동 위령제. 〈유족회 제공〉
2021.08.24
[대구경북 아픈 역사의 현장](2) "양심이 일어났는데 그게 어째서 반역이던가" 달성 가창에 74년만에 건립된 10월항쟁 추모시설
대구 달성군 가창면 용계교에서 가창호 방면으로 향하는 샛길이 있다. 비포장 길이다. 이 길을 따라 300m 남짓 걸어가면 먼저 위령탑이 보인다. 뜻밖의 장소라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가까이 다가가면 '10월 항쟁 등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위령탑'이라는 명칭을 확인할 수 있다. 위령탑을 중심으로 양 옆에는 추모비가 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원회)가 확인한 희생자 155명, 10월 항쟁 유족회가 정리한 희생자 573명 등 총 728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주변에는 희생자를 추모하는 시인들의 시비가 세워져 있고, 위령탑 뒷편에는 10월 항쟁의 참상을 담은 사진들이 전시돼 있었다. 한 켠에 통일운동가 고(故)백기완 선생의 글도 마련돼 있다. "민중의 목숨 절로 일어났는데 그게 어째서 죄악이던가… 양심이 일어났는데 그게 어째서 반역이던가." 추모시설은 지난 2020년 11월 건립됐다. '10월 항쟁'이 있은 지 74년만이다. '10월 항쟁'은 1946년 발생했다. 일제강점기를 끝내고 나라를 되찾은 지 불과 1년만이다. 도대체 1946년 10월 대구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 1946년 10월 1일의 '함성'1946년 10월 1일 오전 10시쯤 당시 대구부청(현 대구시의회) 앞에는 여성과 어린이를 포함한 1천여 명이 모여 집회를 열었다. 이들은 기아·빈민 문제를 해결할 것을 촉구했다. 경찰의 무력진압에 맞선 시위대는 경북도청으로 이동하며 시위를 이어나갔다. 같은 날 대구역 광장에서는 철도 노동자 총파업 시위가 전개되고 있었다. 노동자 시위대는 태평네거리 방향으로 행진했다. 도보로 20분 내외 거리를 두고 동시에 벌어진 시위의 규모는 점차 커졌고, 경찰은 대치 중이던 민간인에게 총을 발포했다. 미 24군단 사령부 감찰참모실이 작성한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이날 오후 5시 기준 모인 시위대 규모는 3천~4천 명으로 추산되며 군중을 해산시키기 위해 이동하는 과정에서 발포가 있었다. 사격은 밤 11시까지 산발적으로 이어진 것으로 기록돼 있다. 다만, 발포 이유와 경위에 대한 명확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다음날(2일)에는 청년·학생 중심의 시위가 일어났다. 대구의대 학생과 교원 150여 명은 전날 숨을 거둔 20대 노동자 김용태의 시신을 앞세워 행진했다. 대구사범대, 중앙파출소, 경북도청 등을 거쳐 목적지인 대구경찰서 앞에 도착했다. 시위대에는 대구사범대 학생들과 중학생들도 합세했다. 경찰은 일시적으로 무장을 해제하고 대화에 나섰다. 하지만 시내 곳곳에서 봉기가 발생하는 등 상황이 악화되자 미군은 오후 5시를 기해 계엄령을 선포하고 경찰과 함께 진압에 나섰다. 일부 시민들이 파업을 지속하며 저항했으나, 8일 노동자들이 직장으로 복귀하면서 '대구 항쟁'은 일단락됐다. 그러나 끝이 아니었다. 대구에서 시작된 항쟁은 경북 칠곡, 영천 등을 넘어 전국으로 확산했고,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 이념의 시대, 보듬지 못한 아픔10월 항쟁의 원인은 복합적이었고 참여 계층도 다양했다. 발단은 식량난이었다. 미 군정의 미곡 수집 및 배급정책이 실패하면서 굶주리는 시민들이 늘었다. 특히 대구·경북의 경우 해방 직후 만주 등에서 귀국한 인구가 적지 않아 식량난은 심화된 상태였다. 9월부터 전국적으로 진행된 노동자 파업도 10월 항쟁의 배경이 됐다. 노동자 집회는 일반 시민들과 연대하면서 시위 규모가 급격히 커졌다. 또 경찰의 발포로 희생자가 나오면서 대학생, 청년들이 집회에 앞장섰다. 학계에서는 노동자와 시민이 중심이 된 해방 이후 첫 민중운동으로 보는 해석도 있다. 진실화해위원회 1차 조사 결과를 보면, 10월 1~2일 이틀동안 대구에서 60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직업 분포를 보면 농업 종사자가 45명(75%)으로 가장 많았고, 노동자·자영업자·공무원·학자·학생 등이 희생된 것으로 조사됐다. 연령별로는 20대가 20명(33.3%)으로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했다. 30대(19명·31.7%), 40대 이상(13명·21.7%)이 뒤를 이었다. 또 10대 미성년자 8명(13.3%)이 당시 목숨을 잃었다. 10월 항쟁에 대한 시각차가 유족들을 괴롭혔다. 파업과 민중 봉기에 당시 진보 세력의 영향이 작용했다는 점을 문제로 삼고 있다. 이념 대립으로 남과 북이 갈라지면서 진상 규명은 미뤄졌고 유가족들의 아픔은 치유되지 않은 채 오랜 시간이 흘렀다. '반공이 국시'인 시대를 살았던 유족들은 국가 권력에 소중한 가족을 잃고도 피해자라는 사실조차 드러낼 수 없었다. '10월 항쟁'이란 명칭을 공식적으로 사용하게 된 것도 불과 5년 전이다. 지난 2016년 대구시가 '대구 10월 항쟁 등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위령사업 지원 등에 관한 조례'를 마련한 것이다. 이전에는 주로 '대구 10월 사건', '대구 10·1 사건' 등으로 불렸다. 일각에서는 폭동, 소요사태 등 부정적인 단어가 쓰이기도 했다. 채영희 10월 항쟁 유족회장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한평생 보이지 않는 주홍글씨를 새긴 채 힘겹게 자식을 키우셨다. 연좌제로 낙인이 찍히면 취업도 못하는 시대였다"며 "억울한 죽음이 많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진상은 밝혀지지 않았다. 그 슬픔과 아픔은 말로 다 할 수 없다"고 했다. ◆ "역사의 아픔을 숨기는 게 대구의 본 모습은 아니다."잊혀진 대구 10월 항쟁의 역사가 수면 위로 드러난 것은 2007년 12월 진실화해위원회가 '대구 10월 사건 관련 민간인 희생'에 대한 조사를 시작하면서부터다. 국가기관 및 미 군정 기록 외에도 유족과 현장을 목격한 생존자 등 참고인 100여 명에 대한 증언을 토대로 진실에 한 발짝 다가섰다. 2010년 3월 진실화해위원회는 10월 항쟁을 진실로 규명했다. 국가기관이 사건의 실재를 공식적으로 인정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다만 항쟁의 상세한 전개 과정과 배경, 영향에 대한 연구가 더 필요한 상황이다. 또한 조사 기간 중 피해 신청을 하지 못한 유족도 적지 않다. 10월 항쟁유족회는 '누락'된 피해자들을 포용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진실화해위원회 1기가 해산한 뒤 10년 동안 진상규명, 명예회복을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올해 5월 진실화해위원회 2기가 활동을 시작함에 따라 10월 항쟁에 대한 조사도 재개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제는 아픈 역사를 외면하지 않고 드러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10월 항쟁의 비극을 주제로 한 시집 '천둥의 뿌리'를 펴낸 이하석 시인(대구문학관 관장)은 "경험을 드러내고 실상을 정확하게 파악해야 진정한 치유를 할 수 있다. 역사의 아픔을 숨기고 외면하는 것이 대구의 본모습은 아니다. 죽음을 기록하고 재해석하고 또 공유할 필요가 있다. 그 과정에서 많은 결실이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고 했다. 또 "기억이 유실되지 않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흩어진 기록과 유족들의 증언 등 자료를 모으는 작업도 체계적으로 이뤄져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김문주 영남대 교수(국어국문학과)는 "역사는 '현재화'할 때 의미가 있다. 과거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닌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가 의식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그동안 이념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자체를 두려워했던 것 같다. 우리는 아픈 역사를 통해 국가 권력에 의한 민간인의 희생되는 일이 다시 벌어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사유할 수 있다. 기억하지 않으면 역사는 반드시 반복된다"고 강조했다. 정우태기자 wtae@yeongnam.com대구 달성군 가창면에 위치한 10월항쟁 등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위령탑. 정우태기자wtae@yeongnam.com1946년 대구 10월 항쟁 당시 무장한 경찰이 시위대를 진압하고 있다. 영남일보 DB10월 항쟁 주요 사건 및 전개 과정. 10월항쟁유족회 제공1946년 대구 10월 항쟁 당시 집결한 군중들 모습. 출처: 미국 국립문서기록 관리청대구근현대역사관 내 전시물 일부. 1946년 10월 항쟁에 대한 기록은 연표에 적힌 '10월 항쟁 발발'이 전부다. 정우태기자wtae@yeongnam.com
2021.08.16
[대구경북 아픈 역사의 현장](1) 서대문형무소보다 순국 서훈자 많았던 대구형무소이건만...독립투사 이름 적힌 벽돌 조형물만 남아
일제 강점기의 아픈 현장을 살펴볼 수 있는 사적이 대구 도심 한 가운데 있다. 독립운동이 가장 활발했던 삼남(경상도·전라도·충청도) 지방의 투사들이 투옥되고 순국한 '대구형무소' 터가 바로 대구 중구 삼덕동에 존재한다. 현재 대구형무소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지만, 순국선열의 희생정신은 생생히 살아남아 후손들에게 전해지고 있다. ◆ 3.1운동 당시 5천여명 수용 조선시대 죄인을 수용하는 감옥은 주로 지방행정 최고 관직인 관찰사가 머물던 경상감영에 위치해 있었다. 대구의 경우 현재 경상감영 공원 인근에 2개소(좌옥·우옥)의 감옥이 있었다.일제의 침략이 본격화된 1908년 대구경찰청(현 대구 중부경찰서) 뒷편에 대구 감옥이 설치됐으며, 1910년 삼덕동에 감옥을 신축했다. 대구형무소로 이름을 바꾼 것은 1923년이었다. 해방 후에도 같은 자리에 있던 대구형무소는 1961년 대구교도소로 개칭했고, 10년이 지난 1971년 달성군 화원읍으로 옮겨졌다. 대구 형무소는 한강 이남에서 가장 큰 감옥이었다. 삼덕동으로 이전할 당시 1만2천561여㎡(3천800평) 규모로 설치됐으나, 확장을 거듭해 1920년대 들어서는 처음의 2배 이상 크기인 2만5천785여㎡(7천800평)이 됐다. 박경목 서대문형무소역사 관장의 '일제 강점기 서대문형무소 연구' 을 보면 1937년 기준 대구형무소 수감자는 1천197명으로 기록돼 있다. 이는 전국 수감자의 6.48%로, 서대문형무소에 이어 가장 많다. 3.1운동이 전개된 1919년에는 5천여 명에 이르는 인원이 수용되기도 했다. 대구형무소 내부에는 태형, 사형을 집행하는 장소도 별도로 마련돼 있었다. 대구형무소요람 등에 따르면 사형 집행 혹은 다른 이유로 옥중에 목숨을 잃은 입소자가 적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사형집행과 사망자에 대한 상세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참혹한 형무소의 일상일제시대 형무소의 환경은 열악함을 넘어 생명을 위협하는 수준이었다. 일제는 조선인들을 무차별적으로 잡아들였다. 그 결과 좁은 공간에 수용 인원은 많아졌고 위생상 문제로 인해 각종 질병에 걸린 재소자가 적지 않았다. 영양 공급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면역력이 떨어진 상태에서 병을 얻으면 사망에 이르기도 했다. 반인륜적인 고문도 자행됐다. 비밀리에 운영되는 독립운동단체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취조 과정에서 구타는 물론 잔혹한 방벙의 고문을 일삼았다. 성주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장석영 선생이 대구형무소에서의 경험담을 쓴 '흑산일록'에는 수감자들의 참혹한 일상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당시 69세 고령의 나이였던 장 선생은 4개월여 동안 수감돼 있다 출옥한 후 경험담을 남겼다. 장 선생은 "밤인데도 누워 있지 않은 자가 있으면 모두 문을 열고 들어가 뺨을 때리거나 허리를 차서 가지로 능욕을 하였다. 대개 이 속에 들어온 한인(韓人)은 일찍이 짐승만도 못하였다"고 서술했다. 감옥 환경에 대해선 "방마다 사람 수가 적어도 스물 네댓 명은 되기에 앉거나 누울 때 빽빽하게 어깨와 등이 서로 부딪혔고, 밤에는 제대로 누울 수 없어 어떨 때는 앉아서 아침을 기다리기도 했다"고 했다. ◆ 독립운동가들의 터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대구형무소를 거쳐 갔다. 항일투쟁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인물들도 적지 않다. 저항시인 이육사(본명 이원록)는 대구형무소에서 받은 수인번호 264를 따서 호를 '육사'로 삼았다. 경북 안동 출신인 그는 1925년 독립운동단체 의열단에 가입했으며, 1927년 중국에서 귀국해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가담한 죄목으로 대구형무소에 수감돼 약 3년간 옥고를 치렀다. 이후 1930년대 독립의 의지를 담은 작품을 발표하며 활동을 이어가던 중 베이징 감옥에 다시 투옥돼 광복을 1년여 앞두고 숨을 거뒀다. 대한광복회 총사령관 박상진 의사는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했다. 울산에서 태어난 그는 판사 시험에 합격해 평양법원에 발령을 받았으나, 경술국치로 일제의 식민지가 되자 '일제의 관리자는 되지 않겠다'며 판사직을 사임했다. 이후 박 의사는 대구에 상덕태상회를 설립하고 독립운동의 거점을 마련했으며, 비밀결사인 조선국권회복단을 창립했다. 또한 대한광복회를 조직하고 만주에 군관학교를 설립했다. 1918년 일본 경찰에 체포돼 대구지방법원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고 1921년 대구형무소에서 생을 마감했다. 유학자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심산 김창숙 선생, 전수용 의병장, 안규홍 의병장 등도 대구형무소를 거쳐갔다. 최근 독립운동정신계승사업회에서 출간한 '묻힌 순국의 터, 대구형무소' 개정판에 따르면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한 독립지사는 206명에 이른다. 이 가운데 202명은 국가 서훈을 받은 것으로 확인됐다.◆ 기억의 공간 생기나대구형무소의 흔적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역사교육의 현장으로 서대문 형무소가 보존돼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서울시는 서대문 형무소의 복원 및 보존에 노력을 기울였다. 1990년대 중반 '독립공원 사적지 성역화' 계획을 추진하면서 구치소의 제9~13옥사·중앙사·한센병사·지하옥사, 사형장, 망루, 담장 등을 원형 그대로 되살렸다. 현재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은 과거를 교훈으로 삼고 자유와 평화의 가치를 되새기는 역사관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대구형무소를 기억할 수 있는 별도의 역사관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지난해부터 추진 중인 대구독립운동기념관이 설립되면 기념관 내부에 대구형무소를 재현한 공간을 만들겠다는 의견도 나온다. 우대현 독립운동정신계승사업회 상임대표는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한 서훈자가 서대문형무소보다 많음에도 불구하고 대구에는 흔적이 하나도 없다. 영남 뿐 아니라 호남, 충청 독립투사들도 대구형무소에 투옥된 분들이 많아 역사적으로 중요한 장소"라며 "민간단체에서 주도적으로 기념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있는 그대로 복원은 못 하겠지만 새롭게 세워질 대구독립운동기념관에 대구형무소를 재현한 공간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했다. 삼덕교회에는 대구형무소 터임을 짐작케 할 수 있는 조형물이 설치돼 있다. 교회 건물 외곽에는 이곳을 거쳐 간 독립투사의 이름이 적힌 벽돌 모양의 조형물이 자리하고 있다. 삼덕교회 60주년 기념관 1층 로비에서는 '이육사의 벽'이 위치해 있다. 최근 대구 중구청은 교회 측과 MOU(업무협약)를 체결하고 사적기념관(가칭 '이육사 전시관') 조성을 추진하고 있다. 중구청 관광진흥과 관계자는 "근대 골목투어 코스에 옛 대구형무소 터가 포함돼 있지만 자취가 남아있지 않아 아쉬운 면이 있었다. 교회와 업무 협약을 맺으면서 공간을 확보했고 기념관 건립을 본격적으로 추진할 수 있게 됐다. 독립운동의 역사를 기억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도록 노력하겠다"고 했다. 정우태기자 wtae@yeongnam.com<대구형무소 연혁>1908년 대구감옥 개청(경상감영)1910년 기관 신축 이전(대구 중구 삼덕동 102번지)1923년 대구형무소 명칭 변경1961년 대구교도소 명칭 변경1971년 현재 대구교소도(달성군 화원읍 비슬로 2624)1924년 조선총독부와 조선치형협회가 발간한 '조선형무소 사진첩'에 수록된 대구형무소 전경 (대구시립중앙도서관 일제시기 자료)1924년 조선총독부와 조선치형협회가 발간한 '조선형무소 사진첩'에 수록된 대구형무소 (대구시립중앙도서관 일제시기 자료)대구형무소 터에 위치한 삼덕교회 한 켠에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독립투사들의 이름이 새겨진 벽돌 모양 조형물이 설치돼 있다. 정우태기자 wtae@yeongnam.com대구형무소 터에 세워진 삼덕교회 60주년 기념관 입구. 대구형무소 수감 당시 수인번호 264에서 '육사'라는 호를 따온 저항시인 '이육사'의 이름이 새겨진 현판이 걸려져 있다. 정우태기자 wtae@yeongnam.com
2021.08.09
[대구경북 아픈 역사의 현장] 상처를 딛고 희망을 키운다
대구와 경북에는 '상처'가 많습니다. 아픈 역사의 상흔입니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생긴 상처들입니다.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사건과 희생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상처 없는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 '역사의 화살'은 우리나라 전역을 정조준했고, 대구와 경북도 당연히 예외가 될 수 없었습니다. 참 고단한 역사였습니다. 숱한 역경을 딛고 눈부신 발전을 이룬 현재가 놀랍기만 합니다. 일제 강점기라는 어두운 터널을 지나 맞은 해방의 기쁨도 잠시. 우리나라는 남북으로 분열됐고 참혹한 전쟁을 겪었습니다. 이념의 희생자가 너무 많았습니다. 영남일보는 대구와 경북지역 아픈 역사의 현장을 찾아봤습니다. 아픈 역사가 주는 교훈이 남다르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역사학자 함석헌 선생은 저서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아픈 역사를 되짚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사람은 고난을 당해서만 까닭의 실꾸리를 감게 되고 그 실꾸리를 감아 가면 영원의 문간에 이르고 만다."라고 했습니다. 맞습니다.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반복될 것입니다. 아픈 역사를 기억하면 미래의 희망을 찾을 수 있습니다. '순국의 터'로 불리는 대구형무소의 흔적부터 살펴봤습니다. 대구형무소는 일제강점기 시절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투옥된 곳입니다. 당시 경상도는 전라도, 충청도와 함께 독립운동이 활발한 삼남지방으로 불렸습니다. 1919년 3.1운동 당시 5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투옥되기도 했습니다. 남북의 분열에 따른 이념 갈등과 한국전쟁의 최대 피해자는 무고한 양민입니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 하는 군과 경찰이 민간인들을 학살하는 믿을 수 없는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경산 코발트 광산에서, 김천 등에서 민간인 학살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른바 '보도연맹 사건'입니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오폭'으로 영문도 모른 채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습니다. 대구와 경북지역 아픈 역사의 현장은 과연 어떻게 기억되어야 할까요. 정우태기자 wtae@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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