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경북 아픈 역사의 현장] (7) 경산 평산동 코발트광산사건...2~3명씩 밧줄로 묶어 총격…엮인 사람들 덩달아 갱도로 추락

  • 최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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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09-28   |  발행일 2021-09-28 제5면   |  수정 2021-09-28 0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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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7월20일쯤부터 9월20일까지 군·경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자행됐던 평산동 코발트광산 유골발굴 현장. <경산시 제공>

"4·19 직후 유족회를 결성해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을 요구해 왔는데, 가까스로 조성한 위령탑이 군사쿠데타로 해체되고 유족회 간부들이 투옥되면서 지난 40년간 입이 있어도 말을 못 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암흑 같은 세월을 살아왔습니다. 그동안 연좌제로 직업선택의 자유를 빼앗기고, 빨갱이라는 오명을 쓰고 살아온 유족들의 한이 이제야 풀렸습니다."

2009년 11월17일 진실화해위원회가 경산 코발트광산 등지에서 발생한 민간인 희생 사건은 군·경에 의한 집단학살이라고 판정하자 <사>경산유족회 고(故) 이태준 초대이사장은 감격해했다. 유족들은 "진실규명 결정이 내려짐에 따라 경산실내체육관에서 합동위령제를 거행하고, 향후 진실화해법 연장과 역사평화공원 조성 등에 본격적으로 나서겠다"고 밝혔다. 유족회는 수년 전부터는 돌아가신 분들의 날짜를 대부분 모르고 있어 음력 9월9일 합동위령제를 지내오고 있다.

◆3천500여 명 민간인 학살

6·25전쟁 중에 경산시 평산동 코발트광산에서 군·경에 의한 민간인학살이 자행됐다. 유족 등 주민 증언에 따르면 학살은 1950년 7월20일쯤부터 9월20일쯤까지 계속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갱도는 현재 인터불고경산CC 골프장 아래에 있다. 갱내 수평갱도와 수직갱도에서뿐 아니라 인근 대원골에서도 학살이 이루어졌다.

피해자는 크게 대구형무소 및 부산형무소 수감자와 보도연맹원이다. 1960년에 이루어진 대한민국 제4대 국회양민학살 특위의 조사에 따르면 대구형무소 재소자 1천402명이 7월에 학살됐다고 한다. 또 대구형무소에서 부산형무소로 이감된 것으로 기록된 1천404명 중 1천172명의 명단이 부산형무소 재소자 명단에 나오지 않아 이 사람들도 학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대구형무소 수감자 등 피해자
대부분 좌익과 무관한 단순부역

2006년 정부 주도로 유해 발굴
땅속에 묻혔던 진실도 드러나
유족들 연좌제 두려워 입 닫아
위령탑에는 달랑 160명 이름만
국가가 나서 억울함 풀어줘야



1950년 당시 경산·청도·영천·창녕·밀양 등지의 보도연맹원들은 6·25 전쟁 직후 검속되었고, 이후 학살된 것으로 보인다. 피해자 유족들에 따르면 대부분 좌익 사상 등과는 무관한 단순부역자나 농민이었다. 피해자들은 보도연맹원으로 가입 당시 이름과 주소까지 기재했기 때문에 손쉬운 표적이 됐다.

대부분은 집에 있다가 군·경에 의해 경산 코발트광산으로 끌려갔다. 이후 2~3명씩 손과 발을 밧줄로 묶고 수직갱도 앞에 세우고 밀거나 갱도 쪽 사람에게 총격을 가했다. 사망하거나 부상 당해 중심을 잃고 수직갱도로 기울어지면 그 무게로 인해 함께 엮인 사람들도 덩달아 갱도 밑으로 끌려 떨어졌다. 게다가 일부 인원이 살아남을 가능성에 대비해 갱도 밑으로 총격을 가하거나 기름을 뿌리고 불을 지르기도 하였으며, 심지어 발굴과정에서 76㎜ 고폭탄까지 발견된 것으로 보아 폭약까지 사용했다. 이런 끔찍한 생지옥에서 살아남은 일부는 갱도 위로 기어 나오려다 힘이 다해 죽기도 했다.

1960년 6월, 사건이 발생한 지 10년 만에 유족회를 결성했다. 이들은 위령제를 지내고 위령탑을 세웠지만, 반국가단체로 규정돼 강제 해산됐고 당시 유족회 간부들은 실형을 선고받았다. 위령탑은 쇠망치에 부서졌다.

◆진실화해위원회, 집단학살 판정

그로부터 40년, 영원히 묻힐 것 같았던 민간인학살사건은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2000년부터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외치는 목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2005년 출범한 참여정부가 유가족과 시민단체·언론이 요구한 특별법을 제정했고, 이 법에 따라 진실화해위원회라는 국가기관이 설치되어 유해발굴이 시작됐다.

2006년 4월25일 정부 주도로 조사가 시작됐다. 경산을 비롯해 청원·대전·진주·영광에서 유해발굴이 시작돼 3년간 수많은 유해가 쏟아졌다. 총에 맞아 죽은 사람, 기름에 불태워져 죽은 사람, 둔기로 두개골이 함몰된 사람, 수장되고 생매장된 유해들이 드러나면서 땅속에 묻혔던 진실도 드러나기 시작했다.

2009년 11월17일 진실화해위원회는 경산 코발트광산 등지에서 발생한 민간인 희생 사건은 군·경에 의한 집단학살이라고 판정했다. 또 전체 희생자 수는 1천800명을 상회할 것으로 추정되나 정확한 희생자의 수는 확인되지 않은 것으로 밝혔다.

진실화해위원회는 "경산코발트광산 등지에서 발생한 민간인 희생 사건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 보호라는 일차적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군과 경찰이 관할 지역의 국민보도연맹원 등 예비 검속자들과 대구형무소에 미결 또는 기결상태로 수감되어 있던 사람들을 불법 사살한 민간인 집단 희생 사건이다. 비록 전시였다고 하더라도 범죄사실이 확인되지 않은 민간인들을 예비검속하여 사살한 것은 명백한 불법행위"라고 덧붙였다.

사법부도 이러한 국가기관의 조사결과를 받아들여 배·보상에 들어갔다. <사>경산코발트광산유족회 유족 109명이 2011년 10월12일 국가를 상대로 1인당 3억원을 보상하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2012년 11월22일 1심에서 승소하여 법원은 희생자 1명에 8천만원, 미망인은 4천만원, 희생자 자녀는 1인당 800만원, 형제·자매는 1인당 400만원씩 유족 109명에게 총 121억원을 보상하라고 판결했다.

2년 뒤인 2014년 7월10일 2심 승소에 이어 다시 2016년 8월29일 대법원에서도 승소함으로써 만 5년 만에 최종 승소했다. 이로써 그동안 코발트광산 희생자와 그 유가족들이 주장한 억울한 희생이 국가기관에 의해 받아들여진 것이다. 유족들은 "60여년 동안의 피해를 보상하기에는 배상금이 적은 금액이지만, 국가가 불법행위를 인정하고 희생자 및 유족들의 명예를 회복한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후 수습작업이 진행되지 않아 수습된 유해는 유족회가 마련한 컨테이너 안에 방치되고 있다. 2013년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갱도 입구가 큰 안전장치 없이 노출되어 있었다. 2013년 위령 공원과 탑·관람 데크 등이 조성됐으며, 2016년 유족회가 비를 세우고 위령탑과 주변 시설을 정비했다. 입구는 철문으로 폐쇄하고 CCTV를 설치하여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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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1월25일 위령탑 제막식에서 참석자들이 묵념을 하고 있다. <경산시 제공>

◆국가가 나서 희생자 찾아야 한다.

정부 추산 2천여 명, 유족회와 언론·시민단체가 추정하는 희생자는 무려 3천500명에 이르는 평산동 코발트광산과 대원골 위령탑에는 160여 명의 희생자 이름만 새겨져 있다.

2001년부터 2009년까지 6차례의 유해발굴과정에서 수습된 유해만 500여 구에 이르는데 왜 이렇게 적은 숫자의 희생자 명단만 적혀 있을까. 70년간 입이 있어도 말을 못 한 유족들이 국가기관이 억울함을 풀어준다고 신고하라고 했는데도 극히 일부만 신고한 것은 무슨 연유일까.

그 이유는 1950년 학살 이후 유가족들을 철저하게 입막음하고 탄압해온 연좌제에서 찾을 수 있다. 90년대 중반까지 이어진 연좌제로 유가족들은 고위관리가 되기 어려웠고 해외 유학도 가기 힘들었다.

그렇게 오랜 세월을 살아오다 보니 정부를 믿을 수 없었다. 2005년 1기 진실화해위원회에 신고한 사람은 128명, 그나마 국가를 상대로 한 민사소송에는 109명만 참가했다. 그 109명이 적은 금액이라도 보상받았기에 그나마 2기 진실화해위원회에도 두 달여 동안 50명이 신고했다. 이제는 국가가 나서서 희생자를 찾아내 그들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 싶다.

최영현기자 kscyhj@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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