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경북 아픈 역사의 현장] (5) 김천 보도연맹원 학살사건...좌익 누명 씌워 무차별 체포…진위 안 가린 채 1200여명 총살

  • 박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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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09-07   |  발행일 2021-09-07 제3면   |  수정 2021-09-16 0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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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전후 김천 민간인 희생자 유족회' 회원들이 현충일을 맞아 구성면 대뱅이재 집단 학살 현장을 찾아 추념하고 있다. 〈김천 민간인 유족회 제공〉

국민보도연맹원(國民保導聯盟員)은 좌익사상 전향자를 지도하는 등 효과적으로 관리함으로써 잔존 좌익세력을 없애고 반공정신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의 관변단체였다. 보도연맹 초기 가입자 대부분은 전향자들이었다. 그러나 가입대상이 확대되고, 모집인원이 말단 행정기관에 할당되면서 좌익과 관련 없는 국민이 가입했다. 본인 의사와 무관하게 가입이 강제되거나, 심지어 본인도 모르게 가입된 경우도 있다. 6·25전쟁 발발 후 적에게 협력할 가능성이 있다는 잘못된 판단으로 경북 김천에서도 보도연맹원에 대한 대규모의 무차별 학살이 있었고, 그 상흔은 깊고도 깊다.

보도연맹 초기 전향자 대부분
정부 반공정신 홍보 관변단체
연맹원 늘리려 강제 가입까지
6·25전쟁 터지자 빨갱이 몰이

유족들 유해 수습조차 못한 채
지역사회 따가운 눈총 시달려
희생자 기리는 사업 펼칠 계획


김천보도연맹(3)
김천시가 보도연맹원이 집단 학살된 구성면 대뱅이재 정상 부근에 세운 '김천국민보도연맹 사건 및 김천형무소 사건 희생지' 안내판. 〈독자 제공〉

◆김천 보도연맹원 1200여 명 학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자료(대구·경북지역 형무소 재소자 희생 사건 진실규명 및 불능 결정서)와 신기철 전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관의 자료에 따르면 김천지역에서 학살된 보도연맹원은 1천200여 명으로 추정된다.

미24사단 CIC 보고서에 의하면, 당시 김천지역에서 예비검속된 주민은 1천200여 명이다. 이들은 김천경찰서 유치시설에 200여 명, 김천소년형무소(교도소)에 1천여 명이 수용됐다가 1950년 7월 중순에서 하순 사이에 총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장소는 김천시 구성면 광명리 대뱅이재· 송죽리 돌고개· 구미리· 마산리 등 구성면 일원과 대항면 직지사계곡, 대덕면 등으로 조사됐다.

이때 김천지역(금릉군 포함)에서 체포된 주민들은 김천경찰서 유치장에, 선산·상주· 문경군(당시 행정단위 기준), 경남 거창군 등 김천 인근 지역의 보도연맹원들은 김천소년형무소에 감금된 것으로 나타난다.

진실화해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김천소년형무소는 1950년 7월16일 후퇴했다. 이를 근거로 형무소 후퇴 이후 희생자들은 재소자가 아닌, 지역 주민들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6·25전쟁 발발 전 김천소년형무소에는 소년 기결수 600여 명과 성인 미결수 400여 명 등 1천여 명이 수감돼 있었다. 이들 가운데 349명이 전쟁 발발 후 대구형무소로 이감됐고, 여순사건 관련자를 비롯해 좌익재소자 등 남아 있던 재소자 650여 명 가운데 상당수는 김천에서 처형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기록에 따르면 김천시 국민보도연맹은 일제 강점기 때부터 좌익 운동을 주도한 임종업을 간사로 선임한 가운데 결성됐다. 이후 가맹 자격이 확대되자 보도연맹은 여러 장의 신청서를 나눠주고, 누구에게나 신청서에 도장을 받아오게 하는 등의 방법으로 1천명이 넘는 연맹원을 확보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들은 6·25전쟁이 발발하자 남침을 규탄하는 벽보를 붙이는 등 선전 활동에 동원됐다. 이후 이들의 후방 교란을 의심한 정부의 수용령에 따라 경찰서에 집단 수용됐다가 공간이 좁아 김천소년형무소로 이송됐고, 공산군이 대전에 이르렀을 무렵 연맹원 전원에 대한 즉결처분 명령이 시달되자, 연맹원 명단을 인수한 헌병 당국은 진위도 가리지 않은 채 총살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와중에서 1천명 정도의 희생자가 발생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희생자 가운데는 좌익활동 경력이 없으나 친구나 주변의 권유로 보도연맹 가입원서에 도장을 찍었다가 끌려간 사람도 상당수라고 밝히고 있다.

문재원 전 김천향토사연구회장은 "당시 보도연맹 정식 가입자는 검거돼 재판을 받고 각 교도소에 수감된 상황"이라면서 "좌우 모두 집단 최면상태에서 저지른 만행"이라고 말했다.

◆"이유도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가"

강영구(76) 한국전쟁 전후 김천 민간인 희생자 유족회 회장의 지금까지 인생을 관통한 화두는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선친의 누명 벗기'였다. 김천시 개령면 부잣집 막내아들로 일본으로 유학까지 다녀온, 당시 인텔리였던 그의 부친 강태봉(당시 35세)씨는 면내에서 명망이 높았다고 한다. 이러한 가운데 1950년 7월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친 경찰관에게 끌려 집을 나간 게 그의 모친이 기억하는 남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가족들이 백방으로 수소문했지만 묘연했던 그의 부친 행방은 이웃 마을 사람에 의해 확인됐다. 김천시 구성면의 보도연맹원 학살 현장에서 총알이 빗나가 사체 더미에 묻혀 있다가 가까스로 탈출한 이웃마을 주민이, 강 회장의 모친에게 부친 죽음을 확인해 줬던 것이다. 탈출할 때부터 혼이 나가다시피 한 그 주민도 며칠을 앓다 끝내 숨졌다고 한다.

강 회장은 "선친은 단 하루도 활동한 적 없는 좌익으로 몰려 목숨을 잃었고, 우리 가족은 주변 눈총(좌익 가족)을 피해 김천 시내로 이사까지 했다"며 힘들었던 어린 시절을 회상했다.

그는 "군 복무 중(1967년) 베트남전 파병 요원으로 선발됐다. 생환을 장담할 수 없는 전장으로 가는 터라 선친께서 보도연맹원으로 지목된 연유만큼은 꼭 알고 싶었다"며 "보도연맹 사건 당시 면장을 찾아가 선친께서는 좌익활동을 한 적이 없었다고 따졌더니 '상부에서 인원이 할당돼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했다. 김천시(금릉군 포함) 각 동과 면별로 보도연맹원 색출 인원이 20~30명씩 배정된 것으로 알고 있다"고 주장했다.

강 회장은 "선친은 구성면 무릉동에서 화를 당했다. 유골은 수습하지 못했지만 그곳의 흙을 가져다 가묘를 만들었다"며 "기일도 음력 6월14일로 정해 기제사를 모시고 있다. 이제는 진상이 규명돼 선친께서 '빨갱이'라는 누명을 벗었고, 나도 떳떳하게 살고 있다"며 다행스러워했다. 그는 "그동안 지역사회에선 보도연맹 관련 희생자들을 '빨갱이 앞잡이'로 보는 경향이 있었다. 심지어는 4촌 간임에도 희생자 유족에게 등을 돌릴 정도로 인식이 좋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희생자 기리는 사업 펼칠 계획"

보도연맹 사건에 대한 국가 차원의 진상규명이 시작된 시기는 참여정부 시절인 2007년 5월부터였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이때부터 3년간 보도연맹원 학살사건을 조사한 결과 민간인 4천934명이 군경에 의해 처형당했음을 확인했다. 하지만 사건 발생으로부터 시간이 너무 많이 흘렀고, 관련 기록이 소각되는 등으로 제대로 파악하기가 힘들었다고 밝혔다. 다른 관련 자료에 따르면 사망자가 20만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전국 168곳에 학살된 민간인들이 매장돼 있을 것으로 추정한 진실화해위원회는 2009년까지 경산 코발트광산·충북 청원 분터골 등 13곳을 발굴해 유해 1천617구를 수습하고 2010년 12월 위원회를 해산했다.

이러한 가운데 대법원은 2011년 6월30일 울산 보도연맹원 유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에 대한 고등법원의 '원고패소'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되돌려 보냈다. 고등법원은 시효가 지났다고 판결했으나 대법원은 국민을 보호할 의무를 지닌 국가가 진실을 은폐해 원고들의 소송 기회를 박탈했기 때문에 소멸시효 주장을 권리남용이라고 해석한 것이다.

김천에는 보도연맹 희생자의 유족이 200여 명 있으나 유족회에는 회원 40여 명이 등록돼 있다. 회원 가운데는 고령자가 많아 유족회장과 사무국장 등 몇몇이 이끌어가고 있다. 대법원이 국가로부터 손해배상을 받을 수 있는 길을 터줬으나 현재까지 18명이 소송을 제기, 16명이 승소한 상태다.

강영구 회장은 "다른 지역 유족회는 추모비를 세우는 등 활동이 활발하다. 김천 유족회도 관계 기관과 협조를 통해 희생자들을 기리는 특색 있는 사업을 펼쳐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박현주기자 hjpark@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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