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포항 '죽장 선바위 旅風시대' .1] 입암에서 여헌을 인터뷰하다

  • 이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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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08-16  |  수정 2025-10-14 10:55  |  발행일 2012-08-16 제11면
“이 나라가 다시 외세를 물리치고 입암처럼 굳건히 서도록 기원했네”
◆ Prolog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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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헌 장현광(1554∼1637)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유학자다. 퇴계, 남명, 율곡의 사상을 뛰어넘는 여헌만의 독특한 이론인 ‘이기경위설(理氣經緯說)’을 제창한 인물로 유명하다. 과거와 출세에 뜻을 두기보다는 자연에 은거하며 한평생 후학양성에 힘쓴 여헌은 노계 박인로와 교류하며 시문학에 남다른 재능을 보인 문장가이기도 하다.

여헌의 행적이 오롯히 남아 있는 곳이 포항시 북구 죽장면 입암리 솔안마을이다. 임진왜란 때 처음 솔안마을과 인연을 맺은 여헌은 당시의 절경을 잊지 못해 훗날 이곳에 아예 터를 마련한다. 특히 선바위 ‘입암(立巖)’을 비롯해 우물, 산봉우리, 계곡 등 절경 28곳의 이름을 직접 지었는데, 당시 여헌이 이름 붙인 절경이 입암 28경이다.

여헌은 이곳에서 ‘입암십삼영’‘입암기’ ‘입암정사기’등 문학사적으로도 의미가 있는 다양한 작품을 남겼다. 또한 조선시대 가사문학의 대가인 노계 박인로도 당시 여헌과 교류하며 입암과 주변의 아름다운 산수를 읊은 시조 29수와 가사 ‘입암별곡’을 남기기도 했다. 이 때문에 포항 입암리 솔안마을은 가사문학의 산실로도 불린다.

영남일보는 오늘부터 스토리텔링 시리즈 ‘죽장 선바위 旅風시대’를 연재한다. 포항 죽장면 입암리 솔안마을에 은거하며 입암 28경을 노래한 여헌 장현광의 삶을 스토리 형식으로 구성, 재조명한다. 이야기는 2012년 대한민국 신문사의 기자인 빈섬이 조선시대의 여헌을 만나 인터뷰를 하는 형식으로 풀어냈다. 원고 집필은 전문 스토리텔러이면서 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의 초빙연구원 이상국씨가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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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시 죽장면 입암리 솔안마을에 있는 입암(立岩). 여헌 장현광이 이름 붙인 입암28경 중 가장 절경이다. 이 때문에 뛰어날 ‘탁(卓)’자를 붙여 ‘탁립암(卓立岩)’이라고도 부른다. 입암 앞을 흐르는 가사천이 입암과 함께 장관을 연출하고 있다. 이지용기자 sajahu@yeongnam.com
1637년 6월19일. 빈섬은 포항 죽장의 입암(선바위) 마을을 찾아갔다. 석달 전 84세의 여헌 장현광(張顯光, 1554∼1637) 선생이 이 마을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인터뷰를 하기 위해서였다. 전날 데스크로부터 여헌에 대한 간단한 메모를 받았다.

(1)16세기 조선 성리학에 퇴계, 남명, 율곡이 있다면 17세기에는 여헌이 있음.

(2)여헌은 전대의 위대한 세 스승의 학설이 피비린내 나는 붕당(朋黨)의 갈등을 불러일으킨 사실을 직시하고, 그 3사(師)를 뛰어넘는 탕평론(치우침이 없이 공평한 이론)을 내놓아 일대 학풍을 일으킴.

(3)인조임금이 ‘500년마다 한 분씩 나타난다는 성현’으로 찬사를 보냈다 함.

(4)조선시대 스토리텔링의 초절정고수라 할 만함.

(5)여헌이 포항의 입암을 특히 사랑하여 떠돌이를 자처한 가운데서도 늘 돌아오고 싶어했던 의지처(依支處)였다 하니 그 곳곳을 꼼꼼히 취재해올 것.


메모를 읽고 빈섬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퇴계·남명·율곡을 넘어서서 독자적인 논의를 펼칠 만큼 대단한 분인데 왜 이리 이름이 생소하단 말인가? 그리고 스토리텔링이라니? 요즘 유행하는 문화콘텐츠인데 조선시대에 벌써 고수가 있었다고?”

대구를 거쳐 포항 근처 봉계라는 곳에서도 한참 굽이굽이 들어갔다. 산과 개울이 서로를 감아돌며 흐르는 길을 타고 올라갔다. 심산유곡(深山幽谷). 마을이 있을 것 같지 않은 곳인데 산 아래 오순도순 모여앉은 촌락이 눈에 들어온다. 물고기가 노니는 1급수 개울 위에 우뚝 솟은 바위가 하나 보인다. 저게 여헌이 탁립암(卓立岩)이라 이름붙였던 그 선바위구나.

그냥 바라보기만 해도 한자락 이야기가 그냥 걸어나올 것 같은 신비하고 우람찬 포즈. 마을에 들어서자 많은 선비가 나무를 심고 있다. 그중의 한 분에게 여헌선생이 어디 계시냐고 묻자 지팡이를 짚고 있는, 흰 수염이 인상적인 노인 한 분을 가리킨다. 빈섬이 다가가서 꾸벅 인사를 했다.

“어디서 오신 분인가.”

“저는 2012년 대한민국의 신문사에서 왔습니다. 선생님을 좀 인터뷰할까 하고요.”

“병든 노인에게서 무슨 얘기를 들을 게 있겠는가?”

“병자호란(1637년 2월 남한산성 함락) 난리통에 나무를 심으시는 뜻은 무엇입니까?”

“나라가 위급하니 선비로서 나가 싸워야 하겠으나 젊은 시절 무릎을 상한 뒤로(모친상을 극진히 치른 다음 이 병이 생겼다) 기동이 몹시 어려우니 이 은처(隱處)에서 때를 기다리고 있는 셈일세. 지금 심는 나무는 복숭아나무일세. 이 아름다운 곳을 무릉도원처럼 가꿔놓으면 후세 언젠가는 좋은 여행처가 될 것 아닌가. 얼마 전엔 저 선바위 아래서 제문을 지어올리고 제사를 지냈네. 이 나라가 다시 외세를 물리치고 입암처럼 굳건히 서도록 기원하는 행사였네.”

“인조반정 이후에 선생님을 조정에서 ‘VIP 대우’를 하며 모시고자 했는데 거절하신 까닭은 무엇입니까? 당시 인조임금은 당대 최고의 산림(山林, 재야학자)으로 선생님을 모시려고 특별가마까지 준비한 것으로 압니다만.”

“허허. 자네, 처사(處士)가 뭔지 아는가?”

“학생부군신위 대신에 쓰는 처사부군신위에서 본 것 같습니다.”

“아, 그렇구먼. 학생부군신위의 학생은 원래 성균관 학생을 가리키는 말로 아무나 쓸 수 없는 말이었지. 그러다가 벼슬 못한 사람(無品)을 높여 학생이라 불러주는 관행이 생겼더군. 처사는 그야말로 관직에 나아가지 않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일세. 조선시대에 이 말은, 긍지의 낱말이었지. 퇴계 선생도 세상을 떠날 때 자신의 비석에 ‘처사’라고 써달라고 말했지. 그러자 경쟁자였던 남명 선생이 이렇게 되쏘았지. ‘아니, 가끔 벼슬도 했던 사람이 무슨 처사란 말인가? 평생 벼슬 없이 산 나 같은 사람도 감당하기 어려운 호칭이거늘.’ 처사 얘기를 길게 한 것은, 내 뜻이 어디에 있었는지 말하고 싶어서일세. 광해군이 물러나고 인조대왕이 나를 불렀을 때 나가지 않은 것은 물론 병이 깊어서였지만 때가 옳지 않았네. 사실 선비에게 출처(出處, 벼슬에 나가는 일과 시골로 들어와 은둔하는 일)보다 더 고심해야 할 일이 어디 있겠는가. 반정(反正)은 명분이 상쾌하지 않았어. 남명이 아끼던 정인홍을 죽인 것도 과한 태도였지. 89세의 고령인 내암(來庵, 정인홍의 호)은 광해군이 거듭 불렀으나 벼슬도 거부하고 고향 합천에만 머물러 있었는데 굳이 그를 참한 것은, 남명이 내세운 군자당-소인당의 논리를 죽인 것이지. 여보게, 어떻게 생각하는가. 남명의 가르침을 당리당략에 이용한 대북파의 이이첨 같은 이가 큰 이름을 더럽힌 셈이지만, 어쨌거나 남명의 뜻을 참(斬)한 반정세력이 남명의 뜻을 귀하게 여기는 나를 조정에 앉혀 반정에 대한 비판론을 잠재우겠다는 것은 경우에도 맞지 않았다고 보네. 하지만 반정 전체를 옳지 않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네. 성심성의껏 왕에게 조언을 드린 것은 그런 의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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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헌 장현광이 머물렀던 솔안마을 전경. 여헌은 이 마을에 정자(일재당)를 짓고 입암28경의 절경을 노래했다. 이지용기자 sajahu@yeongnam.com

“16년 전에 선생님이 발표하셨던 경위설(經緯說)에 대해 좀 듣고 싶습니다.”

“아, 그거? 1621년이었지. 내가 68세 때였구먼. 그 전해에 한강 정구(1543∼1620)선생이 돌아가셨어. 한강은 남명 조식(1501∼1572)의 으뜸 제자였지. 나의 처숙부이기도 하고.(첫 아내 청주 정씨를 연결해준 사람이 정구였다). 세상 사람들은 11살 연상인 한강과 내가 학문적 동지였다고도 하고, 내가 그의 제자였다고도 하지. 둘 다 틀린 말은 아니네. 그에게서 남명의 학문하는 법과 삶의 태도를 많이 배웠으니 사승(師承)이라고도 할 수 있고, 또 수평으로 서로 의론을 펼치며 경쟁했던 점을 떠올린다면 동지라고도 할 수 있지. 1614년 영창대군이 광해군에게 죽임을 당할 무렵에, 한강은 그를 살려야 한다는 전은론(全恩論, 온전한 은혜를 베풀자는 주장)을 내놨었지. 당시로선 참으로 용기 있는 주장이었는데…. 그런데 권력에 괘씸죄로 찍혀 그의 기반인 성주 일대의 사람들에게 과거 응시 금지령이 내려졌어. 기막힌 일이었지. 죽음에 이르렀을 때 그는 이렇게 중얼거렸어. ‘자리가, 자리가 도무지 바르지 않구나.’ 그 말이 어찌나 가슴에 와 닿던지…. 그때 생각했어. 자리를 바르게 만드는 일이야말로 내가 할 일이다. 이제 내가 오랫동안 고심해왔던 성리학의 새로운 이론을 내놓을 때가 되었구나. 붕당의 갈등과 피비린내 나는 정쟁(政爭)을 낳아온 이기선악(理氣善惡)의 틀을 좀 바꿔보자.”

“어떻게 바꾸고자 하셨는지요?”

“이(理)는 선이요, 군자당이며, 기(氣)는 악이며 소인배라는 구도는 남명의 단호한 의불의(義不義)의 구분에서 왔지. 남명과 퇴계는 더없이 훌륭한 분이었지만, 그들의 이론이 정치에 적용되면서 물의가 일어났네. 오래전 나는 아내가 베를 짜고 있는 것을 보고 문득 깨달았지. 아아! 하늘의 이치가 저기에 있구나. 이(理, 四端)와 기(氣, 七情)는 저런 것이구나. 사단은 날줄이며 칠정은 씨줄이다. 그러니 사단만이 선이 아니고 칠정만이 악도 아니며, 씨줄과 날줄이 나눠지고 합해져야 베를 짤 수 있듯이 붕당도 좌우종횡으로 서로 역학관계를 형성해야 공존과 견제가 동시에 가능하지 않겠는가. 퇴계의 선악론(이기이원론,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엄격히 구분해야 한다)은 분쟁을 부르고, 율곡의 우열론(이기일원론, 좋고 나쁨보다 우열이 있을 뿐이므로 보완하고 함께 가야 한다)은 가치 혼란과 옳은 비판의 차단을 부르니, 이와 기가 교직하는 경위(經緯)야말로 현실적이면서도 근본적인 해석이 아니겠는가.”

스스로가 평생을 두고 야심차게 준비했던 학설이었던지라 여헌은 장광설을 뿜는다. 명쾌하게 이해가 가진 않았지만 퇴율(退栗)의 극단을 통합하여 당쟁의 소모를 줄이고자 했던 그 열정은 피부에 와 닿았다.

“1595년 성주목사 허담이 한강 선생에게 영남 최고의 학자가 누구냐고 물었을 때 선생님(장현광)을 꼽았는데, 그때 연세가 어떻게 되셨는지요?”

“42세 때였을 거야.”

“한강이 선생님을 가리켜 공자의 최고 제자인 안자(顔子)에 비유하셨지요?”

“허허. 과분한 말씀이셨지. 나의 무엇을 보시고 그렇게 평하셨는지…. 내가 18세 때 ‘우주요괄첩’이란 10개의 도표를 만들었는데 이걸 보고 사람들이 천재가 나왔다고 놀라던 기억이 나네. 중국과 우리나라의 성리학설을 종합하여 우주 근원부터 실천 단계까지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정리한 것이었어. 물론 나로선 체계적으로 공부를 하려는 방편이었지. 그리고 21세 때 안동에서 유생들 자체 시험을 볼 때 마침 안자에 관한 시문이 예제로 나왔어. <활개운무견청천(豁開雲霧見靑天)-구름과 안개 열어젖히니 푸른 하늘이 보이는구나>라는 시제가 나왔지. 안자가 가난했지만 학문적으로 뛰어났다는 것을 은유한 시였지. 거기에 나는 <견천이미도우천(見天而未到于天)-하늘을 보았으나 하늘에 도달하진 못했구나>라고 답을 썼어. 하늘을 본 것만으로는 모자라고 그것에 닿기 위해 끝없이 수행정진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밝힌 시였지. 내 시험지를 본 관리가 깜짝 놀라며 ‘속유(俗儒)를 뛰어넘는 큰 그릇’이라며 극찬을 했다더군. 나이가 들면서 나는 여러 책을 보지는 않았어. 오직 주역에만 몰두했지. 왜란을 겪으면서 금오산, 구지산을 돌아다녔지만 주역은 표지가 너덜거리도록 놓지 않고 들고 있었어. 한강 선생이 그런 학문적 집요함을 높이 평가하셨는지도 모르겠네.” <2편에 계속>

글=빈섬 이상국<스토리텔러·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초빙연구원>
도움말 : 김윤규 한동대 교수
공동기획 : 포항시


▶여풍(旅風)은 17세기에 불던 ‘여헌(旅軒) 장현광 바람’을 의미한다. 여헌은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을 아우르는 당대 유학의 거장으로, ‘여풍’은 그가 포항 죽장의 선바위(立巖)마을에 은거하며 남긴 위대한 가르침과 입암28경을 따라 떠나는 ‘스토리여행(旅)의 신바람(風)’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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