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12월 5일 경북도청 앞 천년숲에서 '근대화의 아버지'로 평가받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동상 제막식이 열렸다. 양복 차림에 동남쪽을 향해 오른손을 치켜든 박정희 동상의 높이는 8.2m이며, 동상 좌대에는 '오천년 가난을 물리친 위대한 대통령 박정희'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경북도 제공
박정희는 공만큼이나 과도 큰 인물이다. 그럼에도 그가 끊임없이 회자되며 가장 위대한 지도자로 꼽히는 이유는 박정희란 인물의 시대적 정합성이다. 빈곤과 안보 위기, 미성숙한 제도가 공존하던 시절, 그는 국가가 설계하고 사회가 총동원되는 모델로 산업국가를 세웠고, 통치 후반기에는 복지와 균형·환경 보호 등으로 시야를 넓히려 했다. 다만 박정희의 등장과 그의 통치는 자유·인권 억압, 불공정·불균형, 자율성 제약 등의 대가를 치렀다. 박정희의 빛과 그림자를 함께 보아야 '박정희를 넘는 보수'가 가능할 것이다.
◆가난과 혼란 속에서 등장한 리더
1960년대 초 한국 사회는 가난과 혼란, 불안 속에 빠져 있었다. 1인당 국민소득은 100달러가 채 되지 않았고, 농촌은 해마다 보릿고개를 넘지 못해 굶주림에 시달렸다. 한국전쟁으로 산업 기반은 무너져 내렸고, 남한은 농업국가에 머물러 있었다.
정치 또한 안정되지 못했다.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은 물러났으나, 장면 내각은 민주주의적 절차는 존중했을지 몰라도 경제와 안보 문제를 해결할 역량을 보여주지 못했다. 여기에 북한의 끊임없는 도발이 이어지면서 국민은 언제든 나라가 무너질 수 있다는 불안에 휩싸였다.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국민이 가장 절실하게 요구한 것은 '빨리 잘사는 나라가 되는 것'이었다. 민주주의적 제도 개혁이나 절차적 정당성보다 당장의 밥과 일자리가 더 중요했다. 바로 이 때 박정희가 등장했다.
군인 출신으로서 명령과 복종, 총동원의 논리에 익숙했던 그는 이를 국가 운영 원리로 가져왔고, 그 결과 한국형 근대화의 정치철학이 만들어졌다. 이는 국가주의, 유교자본주의, 발전개발론으로 요약된다.
◆박정희의 정치철학
박정희 체제의 중심은 국가주의였다. 그는 국가를 모든 사회·경제 활동의 지휘자로 세웠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통해 성장 목표와 산업 우선순위를 국가가 직접 정했고, 대통령이 직접 주재하는 수출진흥확대회의에서 기업 실적을 점검했다. 포항제철 설립이나 경부고속도로 개통처럼 민간이 감당할 수 없던 사업은 국가가 전면에 나서 강력히 추진했다. 이러한 국가주의적 운영은 민주주의를 제약했지만, 당시 가난에서부터 벗어나야 했던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는 데는 분명한 효과가 있었다.
박정희의 또 다른 정치철학은 바로 유교자본주의다. 그는 전통적 유교 질서에 기반한 충·효·위계와 집단주의를 자본주의적 근로 윤리와 결합시켰다. 그 집약체가 바로 새마을운동이었다.
'근면·자조·협동'이라는 구호는 유교적 공동체 윤리와 자본주의 노동 윤리를 동시에 강조했다. 초가집을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꾸고, 마을 길과 다리를 놓으며 농촌 환경을 개선한 것은 눈에 보이는 변화였다. 국가의 지원과 마을 단위의 협동이 결합해 가난을 극복하는 상징적 성과를 창출했고, 농촌 소득 증대와 생산성 향상은 산업화의 토대가 되었다.
박정희의 정치철학의 또 다른 축은 발전개발론이었다. 그는 경제기획원을 중심으로 관료 집단이 경제 정책과 자본 배분을 주도하게 했다. 1973년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을 통해 조선·자동차·철강·석유화학 같은 기간산업을 집중 육성했으며, 한일 국교 정상화와 베트남 파병을 통해 외화를 확보해 산업화 자금으로 투입했다. 이는 한국을 단기간에 농업국가에서 공업국가로 끌어올린 핵심 동력이었다.
◆산업화를 넘어선 '비전'
박정희의 시선은 산업화에만 머물지 않았다. 1970년대 중반 이후 그는 성장의 토대 위에 복지·균형·환경을 얹는 선진국형 국가 구상을 시험했다. 우선 국민의료보험 도입은 국가가 국민의 생존을 제도적으로 책임지기 시작했다는 신호였다. 초기에는 일정 규모 이상의 직장 근로자를 중심으로 적용됐지만, 단계적 확대를 전제로 한 보편 복지의 문을 연 조치였다.
그린벨트(개발제한구역)제도는 도시의 무질서한 팽창을 제어하고 녹지와 환경을 보전하려는 선제적 정책이었다. 산업화의 속도에 휩쓸리기 쉬운 도시계획을 법으로 통제하고자 한 것으로 당시 개발도상국에서는 보기 드문 선택이었다.
특히 국토종합개발계획을 통해 국가 차원의 공간 전략을 수립했다. 울산·포항·창원·여천 등지의 산업단지와 항만·도로망을 연동해 권역별 성장 거점을 육성했고, 수도권 일극 체제를 완화하려는 행정 기능 분산 구상도 내부적으로 검토됐다.
아울러 환경보전법을 통해 공해와 환경파괴 문제를 다루면서 성장의 질을 고민했고, 과학기술처· KIST·KAIS(KAIST의 전신) 등의 설립으로 과학기술 인재 생태계를 설계해 고부가가치 산업 전환을 준비했다.
◆박정희의 그림자
그러나 박정희 체제는 분명한 한계도 함께 남겼다. 첫째, 권위주의다. 유신체제로 대표되는 장기집권 구조와 긴급조치 등은 정치적 자유를 크게 훼손했다. 국가 발전이라는 명분 하에 시민의 자율성과 언론 자유 등을 크게 위축시켰다.
둘째, 불균형의 구조화다. 재벌 중심의 정책금융·특정 산업 집중은 대기업·중소기업, 수도권·지방, 도시·농촌의 격차를 확대했다. 산업화의 과실이 고르게 배분되지 못했고, 지역의 소멸 위험은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셋째, 혁신 토양의 취약성이다. 국가가 내린 과제를 기업이 집행하는 '명령형' 구조가 자율적 실험·실패를 두려하지 않는 민간의 도전을 제약했다. 포항제철·조선·자동차의 도약은 외부 기술 도입과 정책금융의 결합으로 이뤄졌지만, 창의적 파괴를 통한 혁신 생태계 조성은 상대적으로 빈약했다.
이같은 취약성은 1997년 외환위기(IMF)에서 폭발했다. 위기의 직접 원인은 1990년대의 세계화·금융자유화 속 정책 실패에 있었지만, 과잉 차입·문어발식 확장·재벌 편중이라는 구조는 박정희 시대부터 축적된 것이었다. 국가주의·유교적 자본주의라는 권위주의형 총동원체제를 기반으로 한 '추격형 성장(패스트 팔로워)'의 한계가 명확히 드러난 것이다.
◆박정희란 신화에서 벗어나야
대한민국이 직면한 과제는 패스트 팔로워에서 퍼스트 무버(선도자)로의 전환이다. 이를 위해 보수 정치권은 선거철만 되면 박정희 향수를 자극하는 행태를 반복할 게 아니라, 박정희 산업화 성공 방정식의 종언을 선언하고 박정희를 뛰어넘는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박정희가 죽고 유신이 끝난 지 45년이 넘었는데도 우리는 아직 그 유산 속에서 살고 있다"며 "박정희와 그의 시대를 긍정적으로만 보는 사람들이나 부정적으로만 보는 사람들이나 모두 신화에 사로잡혀 있다. 이로 인해 자신이 갖고 있는 신화와 다른 이야기에는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고, 상대방을 비난한다"고 지적했다.
박 교수는 "우리 사회가 두 가지 극단의 신화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면, 박정희와 그의 시대뿐 아니라 한국현대사 전체에 대해 객관적으로 이해하기 어렵고 올바른 교훈을 얻어내기도 어려울 것"이라며 "우리 사회에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중요한 이슈들을 냉철하게 들여다보며 과거와 미래를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구경모(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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