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포항 '죽장 선바위 旅風시대' .2] 청하 과메기에 이끌려 이곳에 왔노라

  • 이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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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08-23  |  수정 2025-10-14 10:56  |  발행일 2012-08-23 제9면
“입암은 바다서 멀지않아 절인 생선이 있다고… 이 말에 그만 반하고 말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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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시 죽장면 입암리 솔안마을에 있는 일제당의 모습. ‘날마다 오르는 집’이란 뜻을 지닌 일제당에서 바라본 가사천이 시원스럽다. 이지용기자 sajahu@yeongnam.com

여헌은 선바위 곁 입암정사의 마루 난간 앞에 앉아 아래로 흐르는 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등 뒤에 일제당(日堂) 현판이 걸려 있다. 날마다 오르는 집이란 뜻이다. 감실(龕室)에 쌓아둔 책을 늘 읽고 마루에서는 늘 강론이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으리라. 바위에 가까운 오른쪽 방이 우란재(友蘭齋), 왼쪽은 열송재(悅松齋)다. 우란은 지란지우(芝蘭之友), 열송은 송무백열(松茂栢悅)에서 나온 말이니, 공부하는 제자들의 맑고 향기로운 사귐과 공부를 서로 격려하는 우정을 강조한 것일 터이다. 인터뷰 중에 얼굴이 뽀얀 여인 하나가 산막걸리에 산채(山菜) 안주를 놓은 술상을 차려온다.

빈섬이 말한다. “선생님이 쓰신 시 구절, 일포수작파 휴상남대아(日數酌罷 携上南臺)가 생각나는군요. 저녁답 몇잔 술 마시고, 남쪽 누대에 함께 올라 ‘아, 좋다’ 탄성을 지르네.” “허허, 그 시를 아는가?” “예. 부끄럽지만, 취재 오기 바로 전에 읽었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의 시 가운데 가장 저를 사로잡은 것은…” “음, 그게 무엇이었나?” “지금 선생님이 보고 계신 저 물을 읊은 시, ‘전간(前澗, 앞개울)’이었습니다. 그 시 구절 중에 시견화란부(始見花爛浮) 선작황류만(旋作黃流灣) 재관옥우함(觀玉宇涵) 복청빙하탄(復聽氷下灘) 스무 글자를 보고, 여헌은 조선의 대성리학자일 뿐 아니라 최고의 시인이었구나 하고 감탄 하였습니다.” “허허…” 선생의 너털웃음에 빈섬이 스스로 풀이해 정리해놓은 메모를 내보였다.


물결에 뜬 꽃잎, 막 보았는데

이내 황톳물 넘실대며 흘러가네

고운 집 그림자, 물속에 어른거리더니

어느새 얼음 밑 여울물 소리 듣네

-여헌의 ‘앞개울(前澗)’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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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암서원에서 상옥 쪽으로 600여m 올라가다 보면 물이 맑고 암벽이 절경을 이루는 곳이 있는데, 여기를 욕학담이라 한다. 욕학담은 학소, 학담, 학소대 등으로 부르고 있으며, 옛날에 욕학담 옆에 ‘낙문사’란 절이 있었다고 한다. 이지용기자 sajahu@yeongnam.com

지나가는 사람들은 그때 그 시냇물만을 보지만, 시냇가에 사는 사람은 사시사철 그 물이 쉼 없이 흘러가는 것을 본다. 한때의 물만을 보는 사람은 그 물이 전부인 것으로 생각하고 지나가지만, 늘 그 물을 들여다보는 사람은 그 물의 변화와 한결같음을 함께 본다. 4행은 봄·여름·가을·겨울, 계절마다 흐르는 시냇물의 모양을 담았다. 물결에 뜬 꽃잎은 봄이다. 그걸 막 본 듯 했는데, 벌써 여름이 와서 황톳물이 콸콸 흐르는 것이다. 집 그림자가 옥빛을 띠며 물 위에 아른거리는 것은 가을이다. 물이 맑기에 더욱 그림자가 고운 것이다. 그걸 보는가 했는데, 곧 얼음 밑에서 여울물 소리가 흐르는 소리를 듣는 것이다. 어떤 시인은 지리산에 살아보고서야 해마다 우는 뻐꾸기가 같은 놈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고 했는데, 여헌은 저 개울의 사계절 속에서 인간의 희로애락의 변화와 덧없는 삶 속에서 견지해야 할 것들을 깨닫는다. 물을 바라보는 저 눈길, 더없이 그윽하다.



다시 인터뷰로 들어갔다. “선바위마을은 언제 알게 되신 겁니까?”

“마흔세 살 때(1596)였지. 그해에 참 어처구니없는 일이 있었어. 그 전 해 가을에 류성룡 대감이 나를 추천해 보은현감에 임명됐지. 나는 여러 번 벼슬을 사절해 왔지만 그땐 나라를 위해 봉사할 마음이 생겼네. 그런데 석달 만에 큰 병이 나서 도저히 일을 할 수가 없었어. 그래서 사직서를 몇 번 냈는데 충청감사가 받아들여주지 않았어. 하는 수 없이 도망치듯 봇짐을 싸서 나왔는데, 이 일로 체포되는 일이 생겨났지. 여러 사람이 변론해주어 풀려나긴 했으나 몸과 마음이 많이 피폐해져 있었네. 윤팔월 초하루에 일식(日蝕)이 있던 그해였네. 동봉(東峯, 권극립(1558~1611)이 나를 찾아왔네. 동봉은 영천에서 은거하던 선비였는데 임진란 때 입암으로 피란을 와서 솔안(松內)마을을 일궈 살고 있었네(지금도 이곳엔 안동권씨들이 많다).

우연히 그를 알게 된 뒤 서로 마음이 깊이 통하였네. 동봉은 편지를 보내 입암에 놀러오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네. “천하를 품은 절세처(絶世處)가 있는데 천하의 절세인(絶世人)이 빠졌으니, 어찌 안타깝지 않겠습니까. 선생이야말로 이곳에 탁립(卓立)해야 할 큰 바위임에 틀림없습니다.” 내가 그에게 쓴 편지는 이랬지. ‘늦봄의 산 속에서 유인(幽人, 은둔자)께서는 멋진 흥취가 절로 곱절이겠습니다그려. 못난 저는 번번이 봄빛 고운 날에 그대 숨어 사는 암혈로 가서 그 경승을 구경하지 못하니 한가한 가운데서도 어찌 한스러움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글을 나눴던 그가 문득 찾아왔지. 그리고 내 손을 이끌었네. “입암에는 모든 것이 다 사방 자연 속에 들어있습니다. 산에서 빚은 막걸리가 있고, 앞 논에서 거둔 쌀로 만든 밥이 있고, 개울에서 잡은 생선이 있으며, 뒷밭에서 갓 뽑은 채소가 있고, 또 산자락의 과수에서 딴 과일이 있습니다.” “이것만 해도 좋은데, 입암은 바다에서 멀지 않아서 소금에 절인 생선도 있다고 말하지 않는가. 이 마지막 말에 그만 반하고 말았지. 이 시절 처음 본 이곳 풍광을 잊지 못해. 선경(仙境)이었지.”

빈섬은 생각했다. 아, 바다에서 멀지 않다는 걸, 여헌도 깨닫고 있었구나. 그러니까 이곳이 청하(淸河, 포항) 부근이라 청어 과메기가 나오는 것을 좋아했구나. 이곳에 온 것은 ‘입암사우’라 일컬어지는 권극립, 손우남(두 사람이 임란 때 먼저 와 정착했다), 정사상, 정사진을 중심으로 문인(門人) 기반을 확장하려는 포부도 있었을 것이다. 여헌은 고향 인동(구미)에서 학맥을 형성했는데, 남명의 기반인 진주를 중심으로 한 영남우도와 퇴계의 기반인 안동을 중심으로 한 영남좌도 문인들의 대통합을 꿈꾸었던 그로서는, 입암이 상징적인 소통처(疏通處)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왜 곧 그곳을 떠나셨는지요?”

“이듬해 봄 정유재란이 일어났지. 나는 청송과 주왕산과 봉화 일대를 떠돌았어. 이렇게 떠돌 때(44세) 내 호를 나그네집(旅軒)이라 지었네. 그 뒤 인동(구미)의 생질과 함께 살게 되었지. 1600년, 내 나이 47세 때 입암이 눈앞에 사물거려서 견딜 수가 없었어. 식솔은 인동에 두고 홀로 솔안마을을 찾아왔어. 입암 28곳에 이름을 지었던 것은 바로 이때였지. 그 작명의 뜻을 새기며 시 13수를 지어 남겼던 것이 기억나네.”

“와, 그때가 바로 조선 최고의 스토리텔러가 탄생하는 순간이었군요?”

“그 스토리텔링이라는 것이, 내가 이름을 지어 자연을 거울 삼고 아름다움을 더욱 깊이 즐기며 학문과 도리를 환기하는 것과 같은 의미던가? 입암에 와서 이름을 붙일 때, 원래 이름 없는 자연에 굳이 이름을 붙여 시끄럽게 하는 것은 시냇물과 산을 자신의 물건으로 쓰고자 함이 아닌가 하고 따지는 사람들이 있었네.”

“그래서, 선생님은 뭐라고 하셨습니까?”

“조물주가 만물을 만든 이유가 쓸모없는 물건을 만들고자 함은 아니었을 걸세. 물건이 있는데도 쓰지 않는다면 조물주가 어찌 좋아하겠는가. 곡식은 인간에게 밥이 되려고 태어난 건 아니지만, 사람이 스스로 그것을 먹지 않던가. 밥을 먹는 것이 조물주를 번잡하게 하는 일이 아니듯, 사물 이름을 짓는 일도 스스로의 쓸모를 위하여 하는 일이니 자연을 잘 쓰고자 함일세. 이곳의 자연은 지금껏 이름이 없었기에 사람들이 놀고 감상하는 곳이 되지 못하였네. 이름을 지음으로써 버려지는 시냇물과 돌덩이가 아니라, 사람들이 호명하고 즐기는 것이 되게 한 것이지. 또한 이것은 내가 즐거움을 붙이는 장소로 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연을 벗으로 삼는 하나의 도(道)를 실천한 것이니, 어찌 망세(忘世)의 유희로 삼는 것이라 하겠는가.”

“와, 바로 선생님의 그 말씀이, 제가 살고 있는 2012년에도 그대로 적용되어야 할 스토리텔링 이론이 아닌가 합니다. 약간 다른 질문인데… 선생님은 26세(1579) 때 한강 정구의 질녀인 청주정씨와 결혼하셨던 것으로 압니다. 그리고 6년 만에 사별하셨고… 그리고 임란 이태 전인 1590년에 야로송씨와 재혼하셨지요? 송씨와는 후사가 없어서 15년 뒤인 1605년(52세) 때 종제인 장현도의 둘째 아들 응일(1599~1676)을 양자로 들였습니다. 76세(1629년) 때 39년을 해로(偕老)한 야로송씨가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동봉에게 보낸 편지에 보면 ‘가실(家室)을 들이는 문제는 마음속에 작정한 것이라 늦출 수 없습니다’라고 하셨는데, 재취 이후에 또 다른 부인을 들인 바가 있으신지요? 혹시, 아까 술상을 봐온 분은…”

여헌은 빙긋이 부드러운 웃음을 지었다. 그리곤 수염을 잠깐 어루만지며 기침을 돋우더니 얘기를 꺼냈다.

“허허. 독자를 위해서 그러는 것인 줄은 알겠으나 상상을 지나치게 펼치는 건 진상을 그릇되게 알게 할 수도 있소이다. 입암정사를 짓고 나서 제자들에게 내가 한 말은 이것이오. ‘작은 서재가 이뤄졌으니 우린 이곳에 거처하며 무엇을 닦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정자와 당(堂)을 짓는 이들은 많으나 그 목적은 같지 않다. 주색을 즐기는 자는 유흥처로 삼고, 활쏘기에 빠진 자는 싸움터로 삼고, 바둑을 일삼는 자는 도박장으로 여긴다. 이는 굳이 입에 담을 바가 못된다. 또한 인륜을 버리고 공허한 것을 일삼는 노장(老莊)의 은둔도 우리가 취할 바가 아니다. 오직 우리는 변함없이 우뚝한 저 바위를 배워, 수신양성(修身養性)에 힘을 기울일 것이다.’ 그 여인은 비록 규중(閨中)의 몸이기는 하나 호학(好學)하는 것이 남자 못지않아, 가히 여사(女士)라 할 만한 인재요. 이름은 도화(桃花)라 하오. 그 여학(女學)처럼만 공부하라는 뜻으로 오늘 제자들에게 복숭아나무를 심게 한 것이오. 허허.”

빈섬은 머쓱해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곁에 와있던 여헌의 제자 쌍봉(雙峯, 정극후(鄭克後)의 호, 1577~1658)에게 입암정사 수업의 한 장면을 좀 묘사해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쌍봉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렇게 말했다.

“하루는 선생님이 정사의 서쪽마루에 앉아 계셨는데, 제자 열두명이 모시고 있었습니다. 저녁비가 걷혀 하늘이 맑게 개고 환했습니다. 선생님은 책상 위에 있는 책 한 권을 펴시고는 ‘활개운무견청천(豁開雲霧見靑天, 구름 안개 확 걷히고 푸른 하늘이 보이도다)’이란 구절을 보여주셨지요. 선생님은 ‘이게 어떤 경지인지 알겠느냐’라고 우리에게 물었습니다. 제자들은 아무도 대답을 못하였습니다. 선생님은 천천히 일어나시며 말하기를 ‘이것은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의 경계다’라고 하셨습니다. ‘구름이 걷히고 하늘을 보는 것은 사람의 욕망을 걷어내고 하늘의 이치를 만나는 것과도 같다. 미혹(迷惑)에 갇혀 헤매던 학문이 홀연히 그 벽을 뚫고 나서서 십분통투(十分通透)하는 경지가 바로 저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선생님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그곳을 바라보며, 학문의 깨달음이 무엇인지 느꼈습니다. 선생님은 자연 모두를 학습 교보재로 사용하십니다.”<3편에 계속>



글=빈섬 이상국<스토리텔러·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초빙연구원>
도움말 : 김윤규 한동대 교수·포항문화원
공동기획 : 포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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