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기법의 인물스토리 人生劇場 .1] 시인 박기영편 - 옻닭집 아들, 시인 되더니 다시 옻사나이로 돌아오다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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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02-22   |  발행일 2013-02-22 제34면   |  수정 2013-03-29
“그땐 정말 싫었다, 짐승 사체와 옻에 손을 대는 아버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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옻기운 머금은 광기어린 눈빛. 박기영 시인은 옻을 딛고 시를 낚다가 다시 아버지 품 같은 옻 곁으로 귀향했다. 가장 한국적인 옻나무를 통해 가장 ‘한국적 문학’을 잉태하고 싶단다.
◆내레이션= ‘이 내 몸 살아 있는데 세상에 무슨 일인들 없으랴.’ 귀기(鬼氣)어린 시를 빚다가 27세에 단명한 당나라 천재시인 이하(李賀)의 넋두리다. 인간. 온갖 일을 만들고 또 스스로 그 일을 감당해야 한다. 결국 일이 곧 삶인 셈. 세상살이는 양파 껍질 벗기는 일이라서 가도가도 끝도 없다. 죽거나 살거나 버티거나 백기를 들거나…. 산다는 것, 봄날이었다가도 한순간 겨울이다. 좋게 보여도 꼭 좋은 것만도 아니고 나빠 보여도 그게 꼭 나쁜 것만도 아니다. ‘새옹지마’다. 사람들은 다 자기 고생을 ‘편애’한다. ‘자기 인생은 소설 몇 권짜리’라고 우긴다. 하지만 남들 눈에는 조족지혈(鳥足之血)이다. 칠십을 살고 팔십을 살아봐도 순간 돌아보면 허공엔 삶의 자국이 없다. 임종을 앞둔 상(上)노인들은 넋두리처럼 ‘일장춘몽(一場春夢)’을 되뇐다. 하지만 그 삶의 고비고비에는 항상 일진광풍이 인다. 그 구절양장 같은 삶의 묘리를 시인묵객이 아니면 어떻게 형언할 수 있을까. 대구는 한때 ‘시(詩)쟁이의 천국’이었다. 세상이 군부에 의해 독점됐을 때, 많은 이들은 피울음 같은 그들의 시에 한표를 던져주었다. 조금은 혈기방장한 객기로 광인(狂人)처럼 살아도 이해해 주었다. 박기영 시인(55). 지역 시단에선 ‘UFO 같은 시인’으로 불린다. 남한과 북한의 피가 스파크를 일으켜 80년대까지 시적으로 용틀임을 쳤고, 민주화의 봄이 오자 돌연 대한민국 최고의 비디오저널리스트로 한 시절 풍미하다가, 10여년전부터는 충북 옥천 금강 어느 강촌 마을로 들어가 ‘옻문화 전도사’로 변신한 돈키호테 같은 사내. 환몽의 광기를 몰고 최고의 적수를 찾아 으슬렁거렸던, 검객 같은 그의 삶에도 이젠 가을물이 들기 시작했다.

말과 글로 인생(人生)을 담을 수 있을까. 삶에 대해 왈가왈부하지만 그건 사족이다. 인생, 그 자체로 ‘완결판’이다. 돌아보면 주위에 기고만장의 삶을 산 주인공이 많다. 방송은 일찌감치 그들을 인간극장 스타일로 잘 녹여내 호평을 받았다. 하지만 일간지는 한정된 지면 때문에 한 인간의 내면을 더 농밀하게 그려내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위클리포유는 계사년 초입, ‘인간극장’이란 코너를 신설했다. 파란만장하고 우여곡절의 인생드라마를 배달하니 부디 심독(心讀)하시길. 아, 참. 인생극장은 취재한 내용을 바탕으로 ‘1인칭 주인공 시점’의 형식을 취했음을 알린다.

◆제1막: 나는 평안도 포수의 아들

나는 가끔 내가 사람이 아닌 것 같다.

짐승이랄까. 호랑이 잡던 평안도 맹산 포수인 아버지(박도섭) 탓인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14살 때 포수가 된다. 일제강점기 총기를 만질 수 있는 포수를 한 군에 한 명씩 두었는데 아버지가 그 권한을 받는다. 백두산을 몇번 오르내리면서 호랑이도 몇 마리 잡았다고 한다. 그래서 비전의 동물성 민약(民藥)을 많이 알고 계셨다.

남으로 내려와선 오랫동안 경찰학교 식당을 위탁받아 재산을 증식하던 아버지는 도 단위 국립경찰학교가 생기면서 급속히 몰락했다. 과수원을 사고 여러 가지 사업을 시도했지만 한순간 재산을 탕진한다.

대구 안지랑이 계곡 초입, 현재 대덕식당 자리에 터를 잡았다. 앞산을 오르내리며 북에서 배운 사냥술을 발휘한다. 하루에 수십마리 산토끼와 노루를 잡았다. 그리고 그 산토끼로 별의별 요리를 다 만들었다. 1976년 무렵이었다.

아버지는 ‘맹산식당’이란 간판을 걸었다. 고향을 상호로 붙인 것이다. 등산객을 상대로 ‘옻닭’과 ‘옻해장국’을 끓여서 팔았다. 그 이전까지 대구에선 옻닭은 상품이 아니었다. 그것을 먹으려면 집에서 요리를 하거나 아니면 청송 주왕산 달기약수터로 가야만 했다. 그러던 것이 우리집 때문에 옻닭이 일반화된다. 주위가 옻닭거리로 변한다. 나중에 20개가 넘었다.

◆제2막: 옻닭집 아들 시인으로 미치다

“시란 놈도 옻을 좋아하는 모양이지.”

우리집은 시인들의 아지트였다. 류시화, 장정일, 김현경, 이문재. 이산하 같은 친구들이 남파간첩처럼 몰래 내 집에 숨어 지내다 갔다. 나는 아버지의 일이 싫었다. 죽은 짐승의 사체에 손을 대는 일, 그것은 아버지대의 일로 만족해야 한다고 최면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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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난 근본이 반동적이고 불온하다.

주위가 안정되면 스스로를 견디어 내지 못한다. 왜 그런가. 북쪽의 아버지와 남쪽의 어머니의 결합. 남쪽 어머니의 고향마저 온천 개발로 파헤쳐졌다. 그러니까 난 고향이 없는 존재였다. 문학이 유일한 도피처였다.

중학교 때 처음으로 한림출판사에서 나온 세계시인전집을 샀다. 낭송 레코드가 부록으로 들어 있던 것인데 그것을 펼쳐 든 순간 내 운명은 결정됐다. 일주일만에 그것을 다 읽고 석달만에 머리 속에 달달 외웠다. 아버지 덕분에 경찰대 도서관에 처박힌 숱한 불온서적도 맘대로 읽을 수 있었다. 함석헌의 ‘씨알의 소리’도 남보다 일찍 독파할 수 있었다.

민청학련, 인혁당 사건 관계자와도 몰려다녔다.

그런 어느 날 김수영 시인한테 감전된다. ‘삶은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라는 김수영의 방식을 몸으로 시를 쓸 수 있다고 해석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틀을 벗어나는 것이 중요했다. 학교를 그만뒀다. 낭인처럼 닥치는대로 살았다. 서울로 올라가서 중화요리집 배달부가 된다. 이어 자전거로 배달도 하고 직공 생활도 하며 숱한 직종을 전전한다. 옻닭집을 찾은 문곤 한국미술학원 원장을 만났으며, 그 인연으로 미술학원 급사로 자리잡아서 그림도 그린다.

박정희 시대의 끝은 지사적인 문인들에게는 천국이었지. 시 안으로만 도망가면 모든 것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77년 이성복 시인을 발견하곤 놀라서 지역 시인들에게 퍼트렸다. 82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사수의 잠’이란 시로 시인이 된다. 이제 본격적으로 싸울 수 있었다.

시청 뒤 대구 최초의 소극장인 ‘분도’에서 처음으로 공간예술을 만난다. 한국미술학원에서 만났던 현대 회화에 친구가 경영하던 비디오방의 영상, 그리고 시 사이를 방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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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피를 가진 탓일까? 박 시인은 도무지 발을 씻지 않는다. 때가 덕지덕지 쌓인 뒤꿈치가 채석장처럼 돌먼지 인다. 신발도 항상 빠개 신는다. 세상은 갈수록 그의 호랑이 기질을 원치 않는 걸까. 그의 동공은 항상 낮달처럼 쓸쓸함 가득하다.
대구의 아지트는 24살까지는 중앙파출소 근처에 있었던 심지다방, 그 다음은 박상봉 시인이 차린 시인다방, 마지막엔 중앙초등 맞은편 그리운시인 등으로 옮겨진다. 서울에도 교두보를 둔다. 서울대 근처 속칭 ‘봉천대’라는 전설의 학교가 있었다. 불과 두평 남짓한 공간인데, 40여명의 문인이 그곳을 거쳐갔다. 방 주인 빼고는 모두 문인이었다. 류시화, 안도현, 장정일, 이정하, 이산하, 하재봉, 이문재, 박덕규, 권태현…. 전국을 유람했다. 방이 없어 대학교 강의실에서도 잤다. 전주의 이병천, 박두규, 백학기, 부산의 최영철, 마산의 정일근, 변산의 박영근 등을 만나 시를 마시며 밤을 새웠다.

과녁이 사라지면 활도 무용지물.

스무살 때 박정희 대통령이 죽었다. 나를 김지하처럼 만들어 줄 사람이 죽어버린 것이다. 충격이었다. 분노해야 될 대상을 찾기 어려웠다. 반복되는 일상은 덫이었다.

어느날 우상과도 같던 김춘수 시인이 금배지를 달고 민정당에 들어간다. 또 충격이었다. 훗날 소설가가 된 김훈 한국일보 기자가 대구를 취재하러 왔을 때 염매시장에서 술을 마시면서 ‘대구 시단은 애비가 없는 곳’이라고 말해줬다.

유감스럽게도 6월항쟁은 한국시의 변곡점이다. 이때를 기점으로 문학은 대중과 일치하기 위해서 매문(賣文)의 현장으로 들어갔다. 문학이 ‘장사의 수단’으로 변한 것. 선비의 시대에서 대중화 시대로, 그리고 대중화 시대에서 소일거리의 시대로 급속하게 변해버렸다. 취미 삼아 시를 쓰는 시대가 된 것이다.

사실 26살 이후 내 삶을 생각해보지 못했다. 그때까지 미치듯이 쓰다 죽을 줄 알았다. 그것에 실패했을 때. 27살의 아침, 나는 정말 황망했다. 난 일종의 불발탄이었다. 문학판을 뜨자고 결심한다. 그때 훌륭한 도피거리가 생겼다. 방송이다.

◆막간: 장정일 시인 만들기

장정일, 암울하지만 묘한 울림을 주는 친구다.

스무살 어름, 중앙파출소 옆에 있는 한 출판사(흐름사)에서 열일곱살의 장정일을 처음 만난다. 그는 종교적 신념 때문에 일부러 소년원에 들어갔고 그때 갓 출소를 한 상태였다. 옛 육군 제50사단 근처에 살았던 그는 이미 시마(詩魔)에 홀려있었다. 이후 제일서적 등 지역 서점가를 누비면서 독서목록을 짜주었다. 그는 천재적 감각이 있었다.

이태수 시인한테 부탁해서 매일시단에 ‘지하인간’을 발표하도록 했다. 이하석·이윤택·장석주가 꾸려가던 무크지 ‘언어의 세계’에 작품을 보냈는데도 인정은 못 받는다. 이어 둘이서 ‘성 아침’(청하 간)이란 2인 시집을 낸다. 하지만 그가 김수영 문학상 수상 기념으로 1987년 출간한 ‘햄버거에 대한 명상’ 서문에 그 시집을 나한테 바친다고 했을 때 허걱, 이제 더 이상 시를 못 쓰겠다는 직감이 들었다.

그가 모친상을 당했을 때 대구의료원 장례식장에서 본 이후 서로 만나지 못했다. 그가 자신이 그토록 싫어하던 권위주의 세계로 들어간 것 같아 안타깝다. 그 발랄한 상상력이 자신이 믿던 신을 조롱하고 도시문명을 뛰어넘어 가길 바란다.

박정희가 죽자
분노의 대상 잃어 버렸고
김춘수의 금배지에
충격을 받았다…
6월항쟁 이후 詩는
취미 삼아 쓰는 시대 전락
문학판을 떠났다…
그리고,
돌아돌아 옻쟁이 되었다

◆제3막: 프리랜서 영상작가로 변신

문학과 담을 쌓았다.

29세부터 43세까지 프리랜서 영상작가로 변신한다. 방송가로 들어갔다. 팔도를 다 훑고 다닌다. 성철 스님 종정을 취재하던 중 스님이 되겠다는 여자를 만나서 가정을 꾸렸다. 밥이 필요했다. 그때 잡은 게 방송작가 일이다. 청하 출판사 사장이던 장석주 시인을 통해 방송작가 하는 후배 시인을 만났다. 이력서를 냈는데 덜컥 뽑혔다. KBS였다. 여전히 대한민국에서는 시인의 끗발이 통용되는 것 같았다. 골방에서 한 삼년 비디오테이프를 독파한 덕분에 프로 구성문제는 저절로 해결됐다.

14년간 200여편을 만든다. 첫 프로는 전국일주였다. 취재력과 문장력을 갖고 있었던 나에게 현장을 직접 누비며 세상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왔다. 전국 각지의 특산물을 보고 그것이 만들어지고 소비되는 통로를 직접 체험할 수 있었다.

‘남자의 자격’에 출연해 유명해진 괴짜 테너 김성록씨도 실은 내가 발굴했다. 영양 수하계곡 상류에서 벌을 치면서 살아가 일명 ‘꿀포츠’로 불렸는데 1년간 그와 꿀을 찾아 북상하는 ‘동행’이란 프로를 만들었다. 또한 하버드대 출신인 외국인 승려 현각도 내가 ‘만행’이란 프로그램을 만들 때 스카우트했다.

6·25와 원자폭탄의 상관관계를 파헤쳤지만 너무 충격이란 이유로 취소됐다. 세계 우라늄 매장량은 약 540만t, 이 중 북한에 400여만t이 매장돼 있다. 일본은 해군 주도로 원자탄을 만들려고 했고 실제 기폭실험까지 했다. 일본이 원자탄을 만들기 위해 조성한 도시가 바로 대전이다. 소련이 원자탄을 만들 때 흥남비료공장에서 나온 중수를 가져다 사용했다. 미국이 그 우라늄 때문에 6·25를 조장했다는 걸 밝히려고 했다. 월콕스란 미공군역사작가가 ‘비밀전쟁’을 펴냈는데 거기에도 내가 취재하려던 내용이 나온다.

체르노빌 3주기 방송을 하면서 원전은 피해야 하는 수단이라는 논조로 방송을 했다가 MC가 잘리는 것도 보았다. 97년, 캐나다로 떠나던 해 만들었던 불교 다큐멘터리 8편이 대상부터 상이랑 상은 죄다 휩쓴다. 하지만 내겐 일언반구도 없었다.

방송의 생리에 환멸을 느꼈다. 다시 방송을 떠났다. 2001년 귀국, 대구 수성구 만촌동에 캠프를 차렸다. 네편의 소설을 만지작거렸다. ‘산으로 가는 길’ ‘벵쿠브 블루스’ ‘금어(탱화 이야기)’ 등이다. 2004년 옥천으로 가기 전 지역을 위해 ‘시 달이기’ 행사를 추진했다. 시 달이기 행사는 물 달이기 행사에서 힌트를 얻었다. 예전엔 마을마다 원천이 있었다. 새로운 샘을 파면 아낙네들이 원천의 물을 길어 새 샘에 부어주는데 이걸 ‘물 달이기’라 한다. 시 달이기는 시와 시를 연결해준다는 의미다. 대구로 내려와 보니 대구 시판이 사분오열돼 있었다. 시적연대를 위해 데코타일 모양의 시화판 100여개를 건물마다 붙여주고 영상시 전광판에 틀어주고 시인을 불러 염매시장 근처에서 시 퍼포먼스도 공동기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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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년 묵은 옻나무 기운을 받고 있는 옻샘은 박 시인의 명상터다.

◆제4막: 옻문화 전도사로 또 변신

피는 못 속이는 모양이다.

그토록 밀어냈던 옻이 어느 날 내 몸 안으로 들어왔다. 사십을 넘어서 다시 만난 옻나무. 참 아이러니한 만남이었다.

옻나무는 우리 문화에 독특한 자리를 자리잡고 있다. 칠의 시선으로 보면 동양 삼국이 기능적인 차이가 보이지만 식(食)의 개념과 약(藥)의 개념으로 보면 이놈만큼 우리화되어 있는 존재도 없다. 세계 유일의 옻 식용 민족. 그 안에 한국인들의 또 다른 문화가 숨어 있다. 우리 선조들은 옻을 의식주에 응용했다. 그것을 일본은 칠의 문화로 한정시켰다. 조선 한양에는 옻칠한 숱한 갓이 대중화됐다. 하지만 옻을 타지 않았다. 다스리는 법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문학병 때문에 미워했던 아버지를 새로 복원하고 싶었다. 사실 난 중학생 때부터 옻 관련 아르바이트를 했다. 한때는 옻밭 관리도 했다. 옻과 관련된 문화적 스토리는 무궁무진하다. 그 다양한 스펙트럼을 정리하고 제대로 정착시키는 일이 사십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내 화두다. 일종의 제2의 고향 만들기다.

맹산식당은 옻닭만 취급한 것이 아니었다. 대구에서 오소리를 민약으로 본격적으로 만든 곳도 거기였다. 간경화·폐결핵 환자 치료는 물론 씨름선수는 체력을 위해, 지역 부자들은 뇌물로 쓰기 위해서 몰래 왔다 갔다. 겨울철이면 수십마리 멧돼지와 노루, 천연기념물인 산양과 밀렵한 곰도 거래됐다.

아버지는 옻 장인 못지않게 옻의 생리에 정통했다. 관절이 불편하면 맹산 포수들은 닭발에 옻을 넣어 먹었다. 맹산옻닭발진액을 해먹은 것이다. 사냥이 없는 철이면 여기저기 돌아다녔는데, 북한 태천에서 먹던 옻개 이야기도 자주 들었다.

거창, 김천, 합천, 비슬산과 선산 일대 밀렵꾼·도부꾼들이 동절기 우리집 문턱을 수없이 드나들었다. 옻순을 요리로 만들었고, 그것을 구하기 위하여 지리산 함양군 마천의 옻밭을 사서 관리했다. 함양 마천에는 아직도 그 무렵 아버지를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88고속도로가 생기기 전 옻순을 말려서 트럭으로 대구로 실어날랐다. 한창 때 옻닭 관련 집이 앞산 일대에 20여곳 흩어져 있었다. 아버지는 그 집에 원료를 공급했다.

난 옻과 연관된 고장과 인연이 깊었다. 충남 홍성군 광천읍에서 태어나 옻의 고장인 강원도 원주, 지리산 마천, 이젠 전국 첫 옻특구가 된 충남 옥천에 살고 있다. 사람들은 내가 옥천에서 옻사나이가 된 걸 궁금해한다. 현재 내가 머물고 있는 옻샘마을은 대청호 상류 강촌으로 바로 옆에 금강휴게소가 있다. 신한국기행 때 한국 최고의 오지로 여길 취재하러 왔다가 홍수가 나는 바람에 돌아갔고, 조카사위가 낚시를 왔다가 우연히 250년생 고목형 옻나무를 발견했다는 전갈을 받고 옥천으로 오게 된다.

처음으로 한 일은 전통이 끊긴 옻된장을 복원하는 일이었다. 예전 종부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된장을 담글 때 옻을 넣었지만 후에 식품으로 인정이 안돼 유통이 금지됐다. 그러던 걸 내가 식품허가를 받아낸다. 현재 옻된장, 옻티백, 옻물, 옻분말, 옻닭발진액 등 모두 8종의 상품을 팔고 있다. 게다가 옻 안 오르는 법 등 모두 열두가지 특허를 취득했다.

내가 와서 처음 한 일은 옥천을 옻특구로 만든 것이다. 옻된장이 2005년 출시된 직후였다. 옥천군청에서 나를 옻전문가로 인정 해줬다. 방송가 인맥을 동원해 우리 마을을 소개했다. 덕분에 2007년 전국 첫 옻순축제를 띄울 수 있었다. 6시내고향 제작진은 마을 초입에 금강힐링센터를 지어줬다. 옻과 도자기를 이용해 옻세라믹 찜질방, 옻나무 톱밥으로 효소욕도 만들었다.

내 집에 옻샘이 있다. 250년 묵은 고목 같은 옻나무를 머금고 있다. 자주 그 샘에 치성을 들인다. 옥천군은 옻특구로 정해진 후 모두 14만그루의 옻나무를 심었다. 하지만 객지는 참 무섭다. 제대로 방향을 알려 주어도 굴절시킨다. 나는 옻을 사명으로 보는데 공무원은 하나의 행정 수단으로 받아들인다. 늘 충돌이다.

 

아버지에게 부침

 

뒤를 돌아본다.

옻과 동고동락하면서 겨드랑이에 시가 깃털처럼 돋아난다.

그러기 위해선 옻부터 탈고해야 된다. 우선 옻관련 책을 내고, 지난 방송 경력을 총정리하는 4권의 소설을 펴내고, 다음에 박기영표 시집을 묶고 싶다. 예전에는 종이문학시대라서 활자가 대장이었다. 이젠 영상문학의 세상이다. 그래서 활자보다 모니터가 더 파워풀하다. ‘모니터문학’의 신지평을 열고 싶다.

나한테 질문해본다. 문학은 뭔가라고. 문학은 사물을 인식하는 힘이고 신들이 만들어 놓은 것을 인간의 시선으로 해석하고 그들을 남들과 공감시키는 작업이다. 나는 ‘멀티미디어적 문학’을 꿈꾼다. 그것을 훈련시켜준 내 삶에 감사한다. 한 십년 내 그 세계를 맛볼 수 있을 것 같다. 갑자기 죽은 아버지가 내 울대를 울컥하게 만든다.

 

목욕탕에서 - 아들 종익에게 보내는 시

 

섣달 그믐

읍내 목욕탕으로 간다

코밑이 검어지면서 한사코, 함께 가지 않겠다는

아들내미 데리고

읍내 하나밖에 없는 대중탕 탈의실에서

윗도리부터 하나씩 벗어

겨울 동안 겹겹이 싸 두었던 맨살을 드러낸다

안경에 하얗게 김 서리는 목욕탕

서로 들키고 싶지 않은 아랫도리 감춘 욕조는

조용히 용암처럼 끓어오르고

아들과 나는 한 지붕 아래 살며

켜켜이 쌓아 온 사연

물에 불려 밀어낸다

섣달 그믐

읍내 목욕탕 바람소리 스쳐가는 문틀 사이 뿌연 세월

물방울 타고 흘러내리고

자꾸만 흐려지는 눈동자 위로

어른거리는 수십년 전 어느 해 섣달 그믐

거웃마저 서리 내린 아버지 야윈 다리를

묵묵히 비누거품으로 닦으며

눈물을 바가지로 씻어내던 수증기 터널 지나

나는 젖은 몸을 자꾸만 수건으로 벌겋게 닦아낸다

목욕탕 처마 밑 흰 눈발 소리 없이 휘날리고

이제 턱밑에 새파랗게

수염자욱 세운 아이의 번들거리는 머리칼

열풍기로 말리며

거울 속으로 다가오는

주름살 같은 세월의 신음소리 듣는다

문을 열고 나서면

또다시 온 몸 겹겹이 싼 채 살아갈 세상

기다리는 섣달 그믐

타일 바닥 살얼음처럼 미끈거리는

읍내 목욕탕 계단을 내려와

나는 아들과 조심스럽게 걸어

이제는 밀어 낼 때조차 없이 하얗게 반짝이는

내 아버지가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간다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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