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란장수 김수영·다방주인 이상·서점주인 박인환…詩도 '밥'에서 나온다?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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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02-22   |  발행일 2013-02-22 제35면   |  수정 2013-02-22
■ ‘시인은 뭘 먹고 사나’ 시인의 직업
계란장수 김수영·다방주인 이상·서점주인 박인환…詩도
박인환(왼쪽)과 이상

시인(詩人)은 신탁을 받으려는 무당 같은 자다. 그는 모국어로 존재의 모순을 빛의 속도로 감지하는 자다. 이승과 저승 사이의 문제는 성직자들이 고민하지만 시인은 현실과 이상 사이의 경계를 칼날처럼 걷는다. 그래서 24시간 깨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신자유주의는 오로지 시만 붙들고 살지 못하게 만들어버렸다. ‘전업시인’이 불가능해진 세상이다.

결혼한 시인들은 식솔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일자리를 갖는다. 비교적 자유로운 시간이 넉넉하게 주어지는 교사와 교수의 길을 걷는 이가 많았다. 특히 국어 선생이나 국문학과 교수만큼 시인한테 안성맞춤인 직업도 없었다. 이밖에 신문기자를 비롯해 출판사, 서점, 다방 등 비교적 시와 공감대가 넓은 직종에 몸담기도 한다. ‘풀’이란 시로 유명한 김수영 시인은 한창 어려울 때 계란장수가 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시인 이상과 박인환이 용감하게 다방과 서점을 개점했다.

◆ 이상 시인의 다방, 박인환 시인의 서점

“제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4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

1934년 7월24일 조선중앙일보에 실린 이상의 시 ‘오감도 제1호’의 첫머리다. 당시 신문사에 폭탄 테러를 하겠다는 등의 빗발치는 항의로 연작시 오감도는 8월8일 연재가 중단되고 만다. 신문사 문예부장 이태준은 사표를 품속에 넣고 다니면서 그 작품을 살려보려 애썼지만 결국 포스트모던한 시는 막을 내린다.

경성공업고등학교 건축과를 졸업하고 19세에 조선총독부 건축기사로 근무하다 23세에 퇴직한 이상은 시인으로 전업하고 다방을 차린다. 지병인 폐병 치료를 위해 갔던 온천에서 만난 기생 금홍과 종로 2가에 연 ‘제비다방’은 당대 문인들의 아지트가 되었다. 정지용, 이태준, 이효석, 김기림, 이무영, 박태원 등 구인회 문인들을 비롯해 화가, 성악가 같은 예술가들이 드나들면서 서울 최고의 먹물들의 살롱이 된 것이다. 커피는 뒷전이었다.

문학과 예술을 논하며 일본인에게 받는 차별과 설움을 토로하던 곳이었다. 결국 제비다방은 2년 후 폐업을 선언하게 된다. 경영난으로 인해 문을 닫게 된 것이다. 돈 되는 손님은 없고 죄다 룸펜인 무일푼들이 진을 치고 있으니 적자를 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상은 제비다방을 정리한 이후에도 ‘쓰루(鶴)’ ‘69’ ‘맥’ 등의 다방을 인수하고 여는 과정을 반복하다가 완전히 빈털터리가 된다. 금홍과 다방을 열고 동거하면서 일어난 일들을 바탕으로 대표소설 ‘날개’를 발표한다. 이 외에도 여러 편의 소설과 수필에 다방을 배경으로 지루하게 살아가는 남자의 일상이 보여지는데 이것을 보더라도 제비다방이 이상의 작품 세계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

서른에 요절한 박인환 시인.

그도 입에 풀칠하기 위해 19세에 1945년부터 3년간 서울 종로3가에서 ‘마리서사(茉莉書舍)’란 조금 난해한 상호를 가진 서점을 차린다. 사람들은 마리의 뜻을 궁금해 했는데 권영민 단국대 석좌교수가 소상하게 설명해준다.

마리는 프랑스의 여성 시인이자 화가인 마리 로랑생(1883∼1956)의 이름에서 힌트를 얻었다. 로랑생은 조르주 브라크, 파블로 피카소 등과 교유하면서 현대미술의 새로운 경향에 일찍 접했고, 기욤 아폴리네르의 연인으로 장 콕토, 앙드레 지드 등과도 함께 어울리면서 프랑스 예술계의 중심에 서 있었다.

책방은 20평(약 66m²) 남짓이었지만 서구의 예술과 문학 관련 서적을 많이 비치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마리서사가 문을 열자 새로운 예술에 목말라 하던 문인 예술가들에게 알려졌고, 곧바로 종로의 명소가 되었다. ‘말리(茉莉)’라는 한자어는 일본 모더니스트 시인 안자이 후유에(安西冬衛)의 시집 ‘군함 말리(軍艦茉莉)’에서 차용했단다.

문인協 등 등록된
대구 시인 750명 중
전업작가 거의 없어

건설사 대표부터
입시학원 이사장
정치인까지 다양

의사·약사도 다수
여류시인의 경우
꽃집 운영하기도

◆ 대구의 시인들 뭘 먹고 사나

현재 대구에 시인은 몇 명일까.

대구문인협회 시분과, 대구시인협회, 민족문학작가회의 대구시지회 관련 회원을 다 포함할 경우 무려 750여명에 육박한다. 문협에 등록된 회원만 480여명.

하지만 단 한번도 다른 일을 갖지 않고 오직 시를 써서 밥먹고 사는 전업시인은 현재로선 단 한명도 없다. 한때 교사생활을 했던 서지월 시인 정도만 그래도 대구의 대표적 전업시인군에 속한다.

다방 주인 경력이 있는 시인은 박상봉 시인과 김동원 시인이다. 현재 구미공단 기업주치의센터 홍보실장으로 있는 박 시인은 1980년대초 봉산동에서 시인다방을 운영했다. ‘텃밭시인학교’ 교장인 김동원 시인은 중구 공평동에서 ‘차하늘’이란 찻집을 운영했고 현재는 수성구 녹원맨션에서 시천(詩天)국어 공부방을 운영하고 있다.

사업가도 있다. 정태일 시인은 강동건설 대표, 김환식씨는 <주>한중, ‘고물장수’란 시로 유명한 김창제 시인은 건국철강 대표로 있다.

의사도 꽤 많이 포진하고 있다. 윤성도 시인은 동산병원 산부인과 의사, 송광순 시인은 동산병원 정형외과장, 노태맹 시인은 성주 효병원 원장으로 있다. 전 대구시인협회장인 김세웅 시인은 이비인후과 원장이고 박영호 시인은 효목동에서 외과의원을 갖고 있다. 이재호, 남재만, 김중광, 박언휘 시인도 모두 의사다. 송재학 시인은 치과의사다.

약사도 여럿 있다. 김호진 시인은 의성군 탑리에서 동산약국을 30년째 운영하고 있으며 이밖에 송종규·이동백 시인도 시내에서 약국을 경영하고 있다.

박진형 시인은 출판업에 오래 몸을 담았다. 78년 형설출판사 편집부에 입사, 15년 뒤 만인사로 독립한뒤 50권의 만인시인선과 150여권의 각종 책을 펴냈다. 전 대구문협회장을 역임했던 구석본 시인은 최근 월간지 우먼라이프 편집장이 됐다. 참고로 수필가 장호병은 ‘북랜드’, 수필가 이은재는 ‘그루출판사’, 소설가 손희경씨는 ‘꽃마을’을 지키고 있다.

정치권에 몸담은 이도 있다. 국회의원과 대구교육감 선거에서 낙마한 김용락 시인은 민주통합당 북구갑지구당위원장으로 있다. 고희림 시인은 체인지대구 공동대표와 10월항쟁시민모임 대표로 있다. 소설가 오철환씨는 대구시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학원업에 간여하고 있는 시인도 있다.

윤일현 시인은 88년 일신학원에 들어가 이어 송원학원을 거쳐 현재 지성학원 이사장으로 있다. 80년대 반월당 근처에서 ‘성문도서’를 차렸던 홍승우 시인도 특이한 직업을 갖고 있다. 현재 북구 침산2동에서 침산2동 우편취급국에 몸담고 있다. 김은영 시인은 동아관광 대표다.

꽃 파는 여류시인도 있다. 박언숙·박숙이 시인이다. 박언숙 시인은 21년째 내당동에서 ‘대자연꽃집’, 한때 ‘빵집 숙이’였던 박숙이 시인은 ‘숙이 플라워’를 운영하고 있다.
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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