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더 이상 밤무대가수를 원치 않아…마이크가 손님에게 넘어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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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인을 대상으로 노래 지도중인 1970∼80년대 대표적 향토 여가수 황금희씨(위), 김수야씨(가운데)와 자신의 라이브클럽 무대에서 노래하고 있는 박영옥씨. |
◆ 황금희, 베이시스트에서 여가수로
현재 수성구 범어동 효산병원 옆에서 노래교실을 20여년째 꾸려오고 있는 황금희씨. 그녀는 대구가수협회 이사를 역임했고 각종 향토가요제 심사위원, 동구케이블TV와 함께 하는 TV노래교실격인 CMB 진행자, 봉사무대까지 동시에 끌어가고 있다. 향토가수계에서 가장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특이하게 베이스기타를 치다가 나중에 여가수로 변신했다. 대구에서 최고급 극장식 비어홀 카네기클럽에서 7년간 김철환 밴드 주자로 활동했다. 어느 날 대구 최고의 오르간주자인 진철씨로부터 러브콜을 받는다.
“우리는 몸값이 너무 비싸 아무데나 갈 수가 없었습니다. 당시 일반 여가수가 50만원을 받았다면 저는 300만원을 받았습니다.”
88년 당시 대구에서 가장 잘나갔던 대림관으로 간다. 여가수로 드물게 10년 계약을 한다. 이때 나훈아와 주현미도 있었다.
“대림관을 그만둘 때 회관과 나이트클럽 문화가 붕괴되고 있었어요. 설 무대가 없었어요. 우린 자존심 때문에 축제 같은 행사장엔 좀처럼 가지 않았어요.”
수성구 황금네거리 근처에서 95년 지역에선 처음으로 노래교실을 연다. 처음에는 일반인이 아니라 청소년을 대상으로 신인발굴 프로를 운영한다. 나중엔 주부노래교실, 음치클리닉까지 연다.
“‘노래방비즈니스시대’가 열리는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노래를 잘해도 되고 안해도 되지만 지금은 노래가 필수인 것 같아요. 2000년 즈음 일반인들의 노래에 대한 욕구가 대폭발하더군요. ”
그녀는 매주 수·목요일 대구예술대 평생교육관에서 400여명을 대상으로 노래교실을 연다. 그녀가 요즘 폭증하고 있는 후배 주부가수들한테 ‘격려성 쓴소리’를 한다.
“정말 가수로 대성하고 싶다면 자신과 무대에 더 엄격해져야 될 것 같아요. 다들 무대를 너무 쉽게 여기는 것 같아요.”
◆ 김수야, 일본 도쿄무대 진출
김수야씨의 별명은 ‘대쪽 여가수’.
선후배도 모르는 인사성 없는 후배를 보면 호되게 야단을 친다.
대구 출신으로 처음엔 원화여중·고 기계체조 선수였다. 대학 1학년 때 모 방송국 노래자랑에 출전, 대상을 받았다. 여자 베이스 주자 강미선이 이끌던 5인조 밴드가 있었는데 강씨가 보컬 제의를 했다. 그래서 강씨 밴드에 들어간다.
“데뷔 시절엔 팝송이 대세였어요. 트로트는 노생큐였습니다. 당시 최고의 블루스 곡은 밥 딜런이 불렀던 ‘Knockin’ on Heaven’s Door’이었어요. 갈수록 손님이 원하는 곡을 원하더군요.”
당시 자기 곡이 있으면 중앙 무대로도 갈 수 있었지만 문제는 신곡이었다. 당시 200여만원을 줘야 새 노래를 살 수 있었다. 포기했다.
“연예계는 누구나 다 아는 그렇고 그런 ‘마(魔)의 구간’을 통과해요. 적당하게 눈웃음도 치고 적당하게 유혹도 할 줄 알아야 하는데….”
당시 여성 악단장 고개정씨가 이끄는 8인조 여성캄보밴드가 있었던 금잔디를 거쳐 보리밭 클럽에서는 팀싱어겸 오부리빵 무대 사회까지 겸했다. 이때 사회자의 끼를 키운다.
“돈 주면 손님도 노래를 부를 수 있었어요. 이를 ‘오부리빵무대’라고 하는데 1절에서 그치는데 급행료를 더 주면 2절까지 부를 수 있죠.”
돈은 벌었지만 ‘도대체 노래가 뭔지’란 독백도 자주했다. 한때 가수자격증 없이 노래를 부르다가 보리밭 주점에서 단속에 걸려 무려 3수를 해서 어렵사리 오디션을 통과한다.
옛 황제예식장 자리에 있었던 대림관 시절, 크나큰 시련을 겪는다. 드물게 수백만원의 전속료를 미리 받았지만 성대결절 때문에 일방적으로 계약해지 통보를 받는다. 이게 아니다 싶어 1년 이상 대림관과 갈등을 빚는다. 밤무대의 비정함을 절감하곤 대구를 접는다. 일본 도쿄와 나고야를 들락거리며 쇼무대에 선다. 이때 일본노래를 배워 김수희, 김연자 등과 대등한 무대를 펼친다.
90년대 들면서 황성수씨가 이끌던 차돌연예봉사단의 팀싱어로도 활동한다. 이젠 ‘행사진행자 김수야’로 전성기를 누린다. 10년 전부터는 1대 1 가요레슨을 겸한 노래교실을 꾸려간다. 만촌동에 개인 레슨실이 있다.
◆ 박영옥 ‘대구의 작은 임희숙’
특이하게 네덜란드 재즈보컬 로라 피지 같은 ‘재즈싱어적 유전자’를 갖고 있다.
스타일은 가수 임희숙을 상당히 빼닮았다. 현재 수성구 시지 수성동아스포츠프라자 근처에 자신의 라이브클럽이 있다. 강원도 강릉 출신인 그녀는 18세에 데뷔한다. 76년 서울 KBS 전속가수가 된다.
“70년대 최고의 가수등용문은 전국노래자랑 전신 격인 후라이보이 곽규석의 사회로 진행된 노래자랑 프로였어요.”
77년 고봉산 작곡의 ‘순정의 길’, 다음 해에 김학송 작곡의 ‘생각이 나요’를 발표했다. 무교동에 있던 극장식 비어홀 등 하루에 14군데쯤 뛰어다녔다. 아도로, 하바나길라 등 팝송을 주로 불렀다.
서울에서 대구로 내려왔다. 시청 옆에 있던 카네기홀과 인연을 맺는다. 대구역전 뉴대구호텔 나이트클럽에서는 ‘신중현과 엽전들’과 무대를 서기도 했다.
“대구는 타지 뮤지션에 대해 상당히 배타적이죠. 조금 필을 넣어 부르면 이해를 잘 못해요. 물론 골수팬도 몇몇 있죠. 제 음색이 좋다면서 꽃다발도 주고 업소를 옮기면 지인을 이끌고 찾아오기도 했습니다. 그런 분들 때문에 힘들어도 견뎠던 것 같아요.”
그때는 실력이 없으면 밥줄이 끊긴다. 끊임없이 노력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항상 정통파 가수란 자부심을 갖고 매일 신곡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았어요. 밴드 주자들은 악보가 없었어요. 리더가 알려주는 곡을 직접 녹음해 자기 파트만 직접 오선지에 따갖고 왔어요. 그런데 이젠 엘프와 같은 반주기에 의존한 연주자가 많아 실력파 밴드도 점점 찾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93년 건들바위 네거리 근처에 있던 동제 회관의 드러머였던 조승찬을 만나 결혼을 한다. 좀 쉬다가 2001년 다시 마이크를 잡는다. 2007년부터 현재 자리에서 자기 이름을 건 라이브클럽을 남편과 함께 운영하고 있다. 틈틈이 노래 레슨도 하고 어려운 사람을 위한 힐링무대로 만들고 있다.
한때 신중현·최진희·김수희
들고양이·함중아 등과 한무대
수입 등 자부심 대단했는데…
한순간 밤무대 붕괴되자 멘붕
노래교실·라이브클럽 등
말년에 ‘쓸쓸한’ 활로 찾기
대구와 달리 포항 등은 ‘붐’
“최근 주부가수 폭증에 우려
자신과 무대에 더 엄격해야”
◆ 강소연, 칸초네까지 소화 팔방미녀
강소연은 칸초네 등 제3세계 노래까지 소화하는 실력파.
전남 광주 출신으로 경희대 신문방송학과 3학년 때 휴학하고 대구 한일호텔나이트클럽 무대에 선다. 이미 중학교 1학년 때 KBS 노래자랑에 출전, 입상한다. 광주KBS라디오 전속가수가 된다. 서울로 와서 KBS악단장 김강섭 등을 만나면서 모던하게 창법을 바꾼다.
목소리와 미색을 겸비한 그녀는 대학1학년 때 미스전남 예선에 출전한 경력도 있다. 이어 무교동 엠파이어, 월드컵, 종로의 국일관 등의 캄보밴드 반주를 앞세우고 노래를 했다. 명동에서 정장 한벌에 2만원 할 때 한 업소에서 90만원의 월급을 받았다.
최진희, 김수희, 이은하, 박일준, 김연숙 등과 같은 무대에 섰다. 78년에는 서울가요제에서도 입상을 한다. 그룹사운드 자이언트, 장욱조와 고목나무와도 노래를 불렀고 군대위문공연까지 갔다.
친구 권유로 대구로 온다. 한일·동인나이트클럽, 수성호텔 옆 리더나이트클럽 등을 돈다.
“그땐 프라이드가 대단했죠. 단골이 술 한잔 청해도 절대로 합석을 안 했죠. 누가 날 ‘강도도, 강까칠’이라고 하더군요. 당시에는 선후배 문화가 정말 엄격했습니다. 공연장 대기실 의자가 있어도 선배 허락이 없으면 절대 앉을 수 없었어요.”
운동권 유전자가 있어서 그런지 그녀는 특이하게 5·18 광주 영령을 위로하는 추모곡(5월의 그대)까지 냈다. 광주 5·18전야제에도 참가해서 노래를 불렀다. 지금까지 모두 3장의 음반을 냈다. ‘안속아’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등이 방송을 탄다.
90년 서울 앰베서더호텔 나이트클럽 무대를 끝으로 서울 생활을 정리한다. 대구로 와선 팔공산 등지의 통기타라이브클럽 싱어로 활동한다.
“저는 팝송, 칸초네, 라틴 음악까지 가능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녀의 마지막 무대는 TBC 맞은편 ‘블루문’이라는 라이브바였다. 거기에 쟁쟁한 멤버가 모인다. 위대한 탄생의 김청산(피아노), 사랑과 평화의 이용기(건반), 그리고 그녀였다. 2004년쯤 지산동 수성동아스포츠프라자 근처에 재즈클럽 같은 라이브클럽을 연다. 손님 무대를 거부했다. 그러자 수준 높은 고객이 달려왔다. 대박이었다. 강소연 클럽을 벤치마킹하는 업소가 지산범물쪽에만 14개 정도가 생겨난다.
◆ 손혜진, ‘탈대구’ 포문을 열다
손혜진은 대구 밤무대가 무너지자 포항 무대에 입성한다.
대도시 무대는 ‘그믐밤’이었지만 포항, 울산, 마산, 창원, 진주 등은 ‘보름밤’이었기 때문이다. 대구 출신인 그녀는 현재 포항 죽도동 라이브클럽 ‘스카이’에서 노래를 부른다. 여긴 가수보다 손님 노래가 더 우선시 된다. 그래서 전성기 시절이 더 그립다.
17살 때 대구시청 앞 동경회관에서 오디션을 봐서 정식 가수가 된다. 처음 일을 한 업소는 78년 8월 향촌동 황금마차. 거기 4인조 밴드의 팀싱어였다. 그땐 정식 개런티도 없었다. 알아서 벌이를 해야만 했다. 이어 숱한 밤무대를 달린다. 달성네거리 동경나이트, 칠성시장 뉴욕나이트, 평리동 신천지, 대림관, 성당동 통일관, 칠성시장 신뉴욕까지.
86년 범어동 한국관 시절이 가장 전성기였다. 한국관은 당시 ‘유흥백화점’으로 불렸다. 지하에 가라오케, 1층에 카바레, 2층은 나이트클럽, 3층은 비즈니스바였다. 거기에는 ‘마음약해서’로 유명한 들고양이, ‘내게도 사랑이’로 유명한 함중아 밴드가 진을 쳤다. 그녀는 오르간주자 최천과 함께 2인조 독주무대를 꾸린다.
35세에 결혼을 하고 6년간 쉰다. 눈을 떠보니 밤하늘의 별만큼 많던 무대가 줄줄이 도산해버렸다. 대구에서는 더 이상 노래를 부를 수 없었다. 그때 포항에서 밤무대 붐이 일었다. 2004년 호박나이트클럽 팀싱어가 된다.
“포항 밤무대 문화는 대구보다 딱 10년 뒤처져 있다고 보면 될 겁니다. 빠른 곡 3곡에 이어 느린 곡 1곡 이런 패턴으로 돌아갑니다.”
현재 포항에는 태풍, 한국관, 신광장, 톱맨 등 4개의 대형 나이트클럽이 있는데 그녀는 지난 9월까지 북구 남민동에 있는 태풍나이트 전속 싱어였다. 하지만 포항도 점점 손님이 직접 노래를 부르는 ‘오부리빵 라이브클럽’으로 기울고 있다. 교향악단 같은 사운드를 들려주는 반주기 ELP707 때문에 밴드도 죽을 맛이다. 손님이 노래부를 수 있는 라이브클럽이 포항에만 무려 140여개나 있다고 한다.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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