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九曲기행 .2] 구곡문화 탄생지 무이구곡...朱子, 무이산서 강학·풍류 7년…도교·불교 성지가 유학 요람으로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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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8-24 07:53  |  수정 2021-07-06 14:55  |  발행일 2017-08-24 제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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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나무 뗏목을 탄 관광객들이 무이구곡 중 2곡인 옥녀봉(오른쪽 우뚝 솟은 바위 봉우리)을 향해 가며 유람하고 있다. 무이구곡(9.5㎞) 유람은 9곡에서 출발해 1곡으로 내려가며 1시간30분 정도 걸린다.

구곡문화는 주자가 중국 푸젠(福建)성 무이산에 무이정사를 짓고 은거하면서 시작됐다. 주자가 이곳에 1183년부터 7년 동안 머물면서 계곡의 절경 가운데 아홉 굽이에 이름을 붙이고 무이도가(武夷櫂歌·무이구곡가)를 지은 것이 무이산의 문화를 바꿔놓음은 물론 후일 조선에 찬란한 구곡문화를 일구게 한 것이다. 무이산은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다양한 역사와 풍부한 전설이 서려 있게 된 명산이다. 한족(漢族)이 들어오기 전에는 남방의 이민족이 살았던 곳으로 절벽에 매장하는 장례풍속이 남아 있었고, 불교와 도교의 자취가 우세했던 곳이다. 그런 곳을 주자가 머물면서 유학자의 강학과 풍류의 공간으로 탈바꿈시켜 놓게 되었다.

 

무이산, 中 10대 명산으로 꼽혀
北宋∼淸왕조대 35개 서원 유적
세계자연·문화유산보호구 지정
구곡 9.5㎞ 뗏목유람 ‘점입가경’


주자, 유학 실천윤리 체계 확립
천리 본성이 이치 ‘性卽理’ 입장
道佛 흡수해 철학·수행법 완성
동아시아 사상계에 엄청난 영향


◆무이산

무이산은 중국 동남쪽의 최고 산수경관을 자랑하는 산이라는 찬사를 받는 명산이다. 무이산풍경구 내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는 삼앙봉(三仰峯)으로 높이는 717m다.

전설에 따르면, 요(堯)임금 시대에 팽조(彭祖)가 이 산의 만정봉(慢亭峯)에 은거했다고 한다. 팽조의 큰아들 팽무(彭武)와 둘째아들 팽이(彭夷)는 당시 홍수로 피해를 입은 백성들을 걱정해 아홉 굽이의 강을 파서 물길을 냈는데, 이를 구곡계(九曲溪)라고 부른다. 구곡계는 길이가 60여㎞. 무이산이란 명칭도 팽무와 팽이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라고 전한다.

무이산의 대표적 봉우리인 천유봉(409m) 정상 바로 아래에는 천유각이 있고, 그곳에 팽조·팽무·팽이 상이 모셔져 있다. 최고의 절경을 자랑하는 천유봉은 한 개의 엄청난 바위로 이뤄진 봉우리로 840개 정도의 절벽 계단으로 오를 수 있다. ‘천유봉에 오르지 않고는 무이산을 보았다고 하지 마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무이산의 최고 명소다. 이곳을 오르면서 보게 되는 무이구곡(4~7곡)의 풍광은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구곡계 협곡은 맑고 풍부한 물과 부드러운 바위 절벽이 어우러져 뛰어난 풍경을 만들어낸다.

무이산은 처음에는 도교의 중심지였지만, 불교 또한 함께 발전해 17세기에는 불교가 도교를 대신하게 되었다. 그리고 주자가 이곳에 정사를 세우고 성리학을 연구하면서 성리학의 요람으로 변했다. 무이산에는 북송 시대부터 청 왕조 사이(10~19세기)에 지은 35개의 서원(書院) 유적이 남아 있지만 대부분 온전하게 남아 있지 않다.

무이산은 무이암차 생산지로도 유명하다. 11세기부터 16세기까지 이곳에는 황실의 차 농장이 있었으며, 황실에 바칠 차를 생산했다.

36개 산봉우리, 72개 동천, 99개 암봉, 13개의 샘 등이 있는 무이산은 현재 세계자연유산보호구와 세계문화유산보호구라는 2개 타이틀을 함께 보유하고 있는 명산이자 유명 관광지다. 중국 10대 명산 중 하나이기도 하다.

◆주자와 무이구곡

주자는 이 무이산의 계곡 중 절경 9.5㎞ 구간에 구곡을 설정하고 구곡의 풍광과 감상을 읊은 무이도가를 지은 것이다.

주자는 무이구곡 아홉 굽이의 절경에 각기 이름을 붙였는데 1곡은 승진동(升眞洞), 2곡은 옥녀봉(玉女峯), 3곡은 선조대(仙釣臺), 4곡은 금계동(金鷄洞), 5곡은 무이정사(武夷精舍), 6곡은 선장봉(仙掌峯), 7곡은 석당사(石唐寺), 8곡은 고루암(鼓樓巖), 9곡은 신촌시(新村市)다. 선조대는 선기암(仙機岩)으로 불리기도 한다. 금계동은 금계암(金鷄岩), 오곡은 철적정(鐵笛亭)으로 된 기록도 있다. 철적정은 인지당(仁智堂), 은구재(隱求齋), 지숙료(止宿寮), 석문오(石門塢), 관선재(觀善齋), 만대정(晩對亭) 등 무이정사의 부속 건물 중 하나였다. 이 구간에 실제 물굽이는 13군데 정도 된다.

무이구곡 구간은 대부분 양쪽으로 솟아 있는 커다란 암벽과 높은 암봉들 사이로 맑고 많은 물이 흘러 탄성을 자아내는 절경을 이룬다. 굽이가 많으나 물결은 대부분 잔잔하게 흐른다. 작은 폭포라도 한 곳 없다. 옛날에는 1곡에서 뗏목을 타고 9곡까지 거슬러 올랐다고 하나, 지금은 9곡에서 대나무 뗏목(竹筏)을 타고 1곡까지 내려오면서 유람한다. 걸리는 시간은 1시간30분 정도인데, 관광객이 많아 하루종일 뗏목이 이어지며 장관을 이룬다.

무이산의 죽벌(竹筏)은 600~700여 명의 사공에 의해 600여 척이 운항되고 있다고 한다. 죽벌은 2척을 묶어 6인승으로 운항되며, 죽벌 사공은 앞뒤로 1명씩 있다. 3~4m의 대나무 장대를 이용해 강바닥을 이리저리 밀어 배의 흐르는 방향을 조정하는 죽벌인(竹筏人)의 솜씨는 감탄할 정도다. 이런 죽벌은 황금 시즌인 5월이 되면 1주일에 7천~8천명이 이용한다고 한다.

9곡을 향해 1곡인 승진동에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멀리 대왕봉(大王峯·527m)이 솟아 있고 철판봉(鐵板峯·404m)도 눈에 들어온다. 계곡 위쪽으로는 멀리 2곡의 상징인 옥녀봉(313m)이 멋진 자태를 자랑한다. 앞으로 펼쳐질 절경을 예고하기에 충분한 풍광이다. 옥녀봉은 무이산의 랜드마크로 무이산 관광 안내간판의 상징 디자인으로 활용되고 있다. 옥녀봉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온다.

옥황상제의 딸 옥녀(옥녀봉)가 무이산에 내려왔다가 무이산 풍광에 취한 데다 대왕(대왕봉)을 만나 천상으로 돌아갈 생각을 않자, 옥황상제가 철판도인을 사자로 보내 불러오려 했으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러자 사자는 두 사람에게 술법을 써서 바위로 변하게 한 뒤 계곡 양쪽에 떨어져 있게 했다. 그리고 서로 보지도 못하도록 그 사이에 병풍바위(철판봉)를 만들어놓았다.

2곡 옥녀봉을 돌아 올라가면 3곡 선조대를 거쳐 점입가경의 절경들이 굽이마다 펼쳐진다. 8곡에 이르면 계곡 주변이 보다 평범해지며, 구곡을 지나면 좌우에 멀리 산이 보이는 평지가 펼쳐진다. 갈수록 골이 깊고 물길도 험해지는 것이 아니라 구곡을 지나면 오히려 평평하고 평범한 계곡이 펼쳐지는 특이한 지형이다.

◆칸트에 비유되는 주자

주자(朱子)는 선대 유학자들의 성과를 집대성하고 유학의 방향을 새롭게 전환시킴으로써 이후 동아시아 사상계의 지형도에서 커다란 산맥으로 자리 잡은 인물이다.

도교와 불교에도 흥미를 갖다가 24세 때 이연평을 만나 유학에 복귀하며 그의 유학을 계승한 주자는 양명학자인 육상산과 더불어 절차탁마하면서 학문(유학)을 비약적으로 심화·발전시켜 중국 및 동아시아 사상사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사변철학과 실천윤리의 체계를 확립하게 되었다. 그는 ‘천리에서 부여받은 본성(本性)이 곧 이치(性卽理)’라는 입장을 취했고, 육상산은 ‘마음이 곧 이치(心卽理)’라는 입장을 취했다. 두 사람은 치열한 자세로 논쟁에 임했지만, 주자는 나중에 육상산을 백록동서원 강의에 초빙했고, 육상산은 형 육구령의 묘지(墓誌)를 써줄 것을 부탁했다. 학문적 입장을 달리하면서도 서로를 깊이 존경했던 것이다.

주희가 편찬한 책은 80여 종, 남아 있는 편지글은 2천여 편, 그의 대화를 기록한 대화록이 140편에 달한다. 그의 제자라고 할 수 있는 학자들이 467명에 달했다.

주자는 위로는 공자와 맹자에 거슬러 올라가고, 옆으로는 불가·도가까지 흡수해 새롭고 치밀한 유가의 사상과 수행 방법을 완성했다. 이러한 주자는 서양의 대표 철학자 칸트(1724~1804)에 비유되기도 한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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