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교육] ‘복학왕’에게 ‘은수저’를 권하다

  • 박종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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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8-06 07:47  |  수정 2018-09-21 14:03  |  발행일 2018-08-06 제14면
20180806
김언동 <대구 다사고 교사>

‘18개월 플래너’라는 제품이 있습니다. 7월부터 이듬해 12월까지 18개월을 사용할 수 있는 수첩인데요. 이게 제법 잘 팔리는 모양입니다. 연초에 세웠던 계획과 결심들이 조금씩 흐트러지는 것을 가다듬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불안한 심리를 잘 파고드는 모양입니다. 누구나 한 해의 절반을 보낼 때가 되면 한번쯤은 자기의 생활을 돌이켜 보게 되는 것 같습니다.

여름방학을 맞이하며 저도 올해 ‘1학기’를 나름 정리해 보았습니다. 얼마 전 사회학과에 수시원서를 내려는 3학년 학생에게 소개해 준 ‘1학기의 책’은 계명대 사회학과 최종렬 교수의 ‘복학왕의 사회학, 지방 청년들의 우짖는 소리’입니다. 이 책은 2017년 지방대생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 한국 사회의 모습을 지적하며 학술지식 플랫폼 DBpia에서 사회학 분야 논문 이용 상위 1%를 기록했던 저자의 논문 ‘복학왕의 사회학: 지방대생의 이야기에 대한 서사 분석’을 대거 보충했습니다. 책은 대구지역 2·3위권 대학의 재학생과 그 학교 졸업생들의 삶의 경로를 추적하면서 지방대생들의 삶에 대한 의문에 마지막 퍼즐을 맞추기 위해 지방대생 부모가 살아온 삶의 이야기까지 담고 있습니다. 저자는 학생들에게 반복해서 묻습니다.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 ‘좋은 삶을 실현하기 위해 무엇을 실행하고 있는가?’라고요. 지방대 학생들은 한결같이 ‘가족’의 틀 안에서 ‘평범한 행복’을 꿈꿉니다. 경쟁에 뛰어들어봐야 실패할 것이 뻔하다고 생각해 시도조차 않으려는 이들의 태도를 저자는 ‘성찰적 겸연쩍음’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지방에서 가족 간의 유대도 끝이 난다면 지방의 미래는 참담해질 수밖에 없으므로 그들이 가족 밖으로 나와 살 수 있도록 사회적 여건을 만들어줘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들 스스로 변화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인터뷰에서 지방대 학생들이 ‘선호의 언어’로 표현되던 그것,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고 싶다고 말한 그것, ‘미적 체험에 대한 강렬한 열망’을 내뱉는 것이 가족주의 언어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길이라고 말합니다.

이 책을 읽고 한동안 마음이 부대꼈습니다. 여름방학 방과후 수업을 하러 학교에 나와 있는 아이들에게서 몇 년 뒤 ‘복학왕의 사회학’에 등장하는 지방대생들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노력했지만 실패했던 경험이 반복되면서 지쳐버린 몇몇 아이들의 모습이 안타깝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은 좀처럼 마음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 크기를 더해가며 화까지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제야 모든 걸 내려놓고 무엇을 하면 좋을지 방법을 찾아 나섰습니다. 혼란스러운 마음에 지친 어느날 저녁, 집 근처 도서관에서 우연히 한 책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은수저’는 중학교 내내 학업 스트레스와 아버지의 압박을 받아온 하치켄 유코가 그간 당해온 억압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홋카이도에 위치한 오오에조 농업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벌어지는 일상을 그린 만화입니다. 하치켄은 도시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끝없이 광활한 대자연에 둘러싸인 오오에조 농고의 모습에 적잖이 놀라지만, 농가의 자식이 대부분인 동급생들과 지내면서 서서히 학교생활에 적응해 나갑니다. 새벽 5시 일어나 맡은 일을 잘 수행하고 틈틈이 공부와 마술(馬術)부 활동까지 하며 몸이 건강해지는 걸 느끼며 착실하게 학교 생활을 해내지요. 그렇다고 이 만화가 농사짓는 법, 가축 키우는 법만 다루는 건 아닙니다. 우리나라와 다를 바 없는 일본이 직면한 농촌의 현실과 더 나은 농업의 미래, 먹거리에 대한 고민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목적 없는 삶이나 삶의 가치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면 이렇다 할 심리학 책보다 이 만화를 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지인의 조언에 귀 기울이고, 타인의 경험담에 불안해하고, 자신의 삶이 남보다 못하다거나 남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바라는 사람이라면 꼭 읽어보길 권합니다.

지난주 학교에 졸업생 S가 찾아왔습니다. 농업 전문가가 되겠다고 수도권 대학이 아닌 지방대를 선택했던 아이. 반가움에 대학 생활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물었지만 자퇴를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동기들은 국립대라는 간판이 필요해서 관심도 없는 과에 와서 탈출만 꿈꾸고 있고, ‘안정적이어서’ 기약없는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는 선후배들 모습에서 자기도 목적을 잃는 것 같아 견딜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섣불리 위로나 충고의 말을 건넬 수 없었던 그날은 내가 하치켄이 된 날이었습니다. 그날 S에게 하지 못했던 나의 말을 ‘은수저’의 대사를 빌려 전합니다.

“네 인생은 교과서에 다 나와 있지 않아.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일을 다른 방향에서 다시 바라보는 것도 중요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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