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영논리 무게 중심 잘 잡아줘야…지역민 가슴에 새 가치의 나무 파종해주길”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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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10-11   |  발행일 2019-10-11 제34면   |  수정 2019-10-11
■ 영남일보 24년 독자 문태갑 前 서울신문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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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평문씨 세거지 한편에 마련된 거경서사는 문태갑 전 서울신문 사장 마음의 쉼터이자 세월의 향배를 가늠하는 망루이기도 하다. 그는 영남일보가 폐간의 아픔을 딛고 새로운 도약기를 맞고 있는 만큼, 공공선을 위한 영남일보의 정론직필을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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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해인사에 기거하고 있던 법정 스님이 영남일보에 독자투고 한 시(詩) ‘쾌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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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백범 김구 선생이 죽기 3년전 영남일보 측에 보내온 신년호 축하 휘호

문태갑 전 서울신문 사장은 지식의 양대 보루가 신문, 그리고 책이라 힘주어 말했다. 그는 스마트폰시대는 다들 신문을 안 읽으려고 하는 세상이니 역설적으로 신문을 정독하는 자가 더욱 더 지역사회의 리더가 될 확률이 높을 거라고 강조했다.

“신문은 책이 충족시킬 수 없는 세상 정보의 마지막 보루란 생각을 합니다. 한 손에는 책, 그렇다면 반드시 다른 손엔 신문이 쥐어져 있어야 해요. 책만 편식해도 신문만 편식해도 안 됩니다. 둘이 균형을 이뤄야 됩니다. 그래야 지식이 완성돼요. 그런데 요즘 젊은이들, 너무 신문을 멀리해요. 자연 가벼운 지식, 좌고우면하고 혹세무민하는 쭉정이 같은 잡담 같은 지식만 득세해요. 그래서 사람들이 한쪽으로 몰려다니는 거예요. 태극기와 촛불의 균형감각. 현실은 진영논리 때문에 힘들겠지만 언론이 앞장서 그 무게중심을 잘 잡아줘야 해요. 시시각각 변하는 보편적 가치, 공공선이 뭔가도 순발력있게 알려줘야 해요. 그게 본분입니다.”

거경서사 툇마루에 앉아 잔디가 곱게 깔린 정원을 가만히 내려다 보았다. 해맑은 가을바람이 잠시 머물고 간다. 마당 좌우에 서고(書庫)가 좌청룡우백호처럼 좌정해 있다. 왼쪽은 윗대 어른이 일본과 중국 등지를 돌며 사 모은 고대의 경서, 문집류 등 2만여권의 서책을 보관 중인 ‘인수문고(仁壽文庫)’가 있다. 세인들에겐 ‘만권당(萬卷堂)’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리고 바로 옆에는 ‘중곡문고’가 있다. 거기는 그가 평생 접해온 5천여권의 책을 보관한 곳이다. 귀향하기 전인 1993년에 지어진 중곡문고는 21세기 현대사는 물론 미래로 향한 인문학 도서가 집중돼 있다.


80년 신군부의 언론통폐합 과정 목도
강제 폐간·복간·법정관리·재도약…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영욕의 세월’

달성 남평문씨 세거지로 돌아와 2부 인생
서울대 졸업, 기자 생활, 정관계 요직
권력 속에서 벗어나길 자청하며 귀향
영남일보 정독 일상…주제별 스크랩
책과 신문 균형 이뤄야 ‘지식의 완성’
자본체제 인권사각…신문이 고발해야
정의·평등·자유 사수 참언론의 역할
지자체별 숲 만들기 운동 동참도 바라


그는 지난 24년간 세파에 흔들리지 않고 종일 사색과 독서를 하면서 사랑채를 찾은 이들을 위해 얼추 2만 잔이 넘는 차를 대접했다. 다옹(茶翁) 문태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았다.

그의 1부 인생이 ‘찬 손길’이라면 2부 인생은 ‘따뜻한 손길’이었다. 그 몸짓은 돌연하면서도 신선했다. 모든 이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그는 권력의 눈속에서 살아왔지만 어느날 그 눈에서 벗어나길 자청했다. 고향에 내려온 그는 제일 먼저 나무를 심었다.

“뒤늦게 귀향한 잘못, 그리고 한때 권력의 중심에 서성거렸음을 사죄하는 의미도 있어요. 말보다 나무 한 그루가 더 가치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이처럼 언론사도 지역민의 가슴에 새로운 가치의 나무를 파종해 줄 줄 알아야 됩니다. 지금 언론은 다들 호기심만 팔아먹는 공장 같아요. 요즘 지역 언론들이 사업에 너무 올인하는 것 같아요. 그게 옥에티처럼 보여요. 물론 사업도 중요하지만…. 아너스 기부클럽 캠페인 펼치듯 지자체별 다양한 숲만들기 운동을 새마을운동처럼 전개해주세요.”

21세기 최고 관광자원 중 하나가 숲이라고 믿는 그는 고향을 명소로 만들기 위해 20년 전부터 세거지 초입에 매화나무를 심기 시작한다. 목표는 5천그루. 현재까지 500여주를 심었다. 뿐만 아니라 지인 사업가들을 만나면 괜찮은 산을 사서 거기를 모두 은행나무로 뒤덮어보라고 권유한다. 그는 그런 취지의 칼럼을 달성군이 발행하는 대구달성신문에 ‘지역을 사랑하는 한 늙은이’란 이름으로 투고하기도 했다. 그의 사촌동생은 문희갑 전 대구시장. 문 시장도 그처럼 대구도심 녹화사업에 올인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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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세워진 영남일보 신사옥 전경.

◆일어나면 영남일보부터 정독

아침에 일어나면 영남일보부터 정독한다. 그게 중요한 일상이 돼 버렸다. 필요한 내용이다 싶으면 가위로 잘 잘라내 쇼핑백에 넣어둔다. 1년에 한번씩 주제별로 분류해 스크랩북에 옮겨놓는다. 그는 1980년 강제폐간과 89년 복간, 그리고 법정관리, 그리고 재도약…. 그간 영남일보가 감내해왔던 영욕의 세월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내가 서울로 올라 갈 즈음 대구 언론은 크게 영남일보, 매일신문, 그리고 대구일보가 균점하고 있었어요. 영남일보는 나중에 대시인으로 불리는 구상씨가 편집국장 겸 주필을 맡을 때 영남지역의 문화예술적 에너지를 집결시켜요. 구씨는 자신이 받은 월급을 거의 50년대 가난한 문인들을 위해 쾌척한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는 이어 반골·저항의식이 특출했던 주필 주도 시절 대언론인 이야기를 해 주었다.

“영남일보에 구상이 있었다면 같은 시기 매일신문에는 김천 출신의 최석채가 있었어요. 둘 다 주필이었죠. 영남은 선비·문화정신이 강했고, 매일은 야성이 무척 강했어요. 그 무렵 동아일보 주필 천관우, 조선일보 주필 선우휘, 언론인 장준하, 리영희, 송건호 등이 언론의 정도(正道)가 뭔지를 보여주었죠. 군부독재시절의 독립운동가였죠. 나는 그런 족적을 밟지 못했어요. 하지만 권력에 기대 염치없는 짓은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어요. 그리고 때가 되면 다 정리하고 고향으로 내려가리란 결심을 품고 살았어요. 권력의 무상함과 덧없음을 누구보다 리얼하게 느끼며 살았기 때문이죠.”

생각해 보면 신문인에게 남는 건 기사 스크랩과 자존심밖에 없다. 언론인이 자존심을 버리면 언론에 대한 사명감도 없어지고, 언론의 권위도 떨어지고 만다. 군부독재, 그 시절에는 희한하게 이에 맞서는 정론직필의 언론정신이 살아 있었다. 그도 그와 관련된 여러 정황들을 술회했다.

“영남일보도 박정희 대통령 서거와 함께 점차 위기를 맞게 됩니다. 12·12 정국이 되기 전 비상계엄 정국을 향해 시대의 요청을 사설을 통해 피력했던 것으로 알고 있어요. 신군부에는 눈엣가시였겠죠. 79년 11월27일자는 충격이죠. 한국언론 사상 처음으로 사설이 없는 지면을 영남일보가 발간하게 돼요. 계엄하 언론검열이 반체제적인 사설을 묵고할 수가 없었겠죠. 그때부터 영남일보는 신군부의 눈 밖에 나게 되고 결국 80년 언론통폐합 때도 결코 온전할 수가 없었을 겁니다. 당시 가톨릭 계열의 매일신문은 절대 건드릴 수 없었어요. 반면 내외방직 대표인 이순희 사장이 리드하는 영남일보는 상업자본에 의해 움직인다 싶어 더욱더 통폐합하기 쉬웠을 겁니다. 대구MBC의 주식도 KBS 등에 강제매각 당하죠. 1945년 11월22일 창간된 서울신문은 석간에서 조간으로 바뀌죠. 내가 앞서 몸담고 있었던 동양통신과 합동통신은 발전적으로 해체되고 이를 중심으로 연합통신이 신설됩니다. 물론 시사통신, 경제통신, 산업통신도 연합에 흡수됩니다.”

그는 동양통신 시절 청와대를 출입하게 된다. 그가 있을 때 중앙청 출입기자실이 점차 청와대 기자실로 확충된다. 연이어 박정희가 5·16으로 정권을 장악한 뒤 첫 기자회견을 겸해 지방나들이를 부산 해운대로 떠난다. 그때 그는 박정희에게 단도직입적으로 “구속된 언론인을 석방할 의향이 없는가”를 질문했다. 박정희가 대뜸 “그런 언론인이 누구냐”고 되물었다. 일순간 전운이 감돌았다. 그도 그때 속으로는 아차 싶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태연한 목소리로 당시 가장 존경받던 언론인 중 한 명인 송지영(1916∼1989)을 지명했다. 박정희와 생각이 같았다. 당시 송지영은 5·16 직후 ‘민족일보 사건’으로 혁명재판소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상태였다. 덕분인지 송지영은 얼마후 석방되고 후에 그에게 송지영이 감사의 맘을 전한다.

◆도연맹의 ‘귀거래사’ 실천

그의 색다른 2부 인생을 보면서 그가 도연명 같은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는 64세에 고향인 달성군 화원읍 남평문씨 세거지로 돌아오게 된다. 1부 인생에서는 남이 부러워할만큼 출세가도를 달렸다. 경북고를 나와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했고 이어 15년간 동양통신 기자로 있으며 청와대 기자실 간사를 맡았고 동양통신 편집국장에 이어 1973년 전국구격인 유정회 국회의원이 된다. 이어 서울신문사 사장, 한국신문협회 회장, 범민족올림픽추진중앙협의회 본부장, 한국청소년연맹 총재, 그리고 78년에는 경북고동창회 중 엘리트 그룹인 ‘경신회’ 창립을 주도, 초대회장을 맡는다. 마지막 공직인 국민체육진흥공단 이사장을 끝으로 서울에서 맺었던 굵직한 인연을 모두 정리하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그는 원래 학자가 되고 싶었다. 서울대 2학년 때 6·25전쟁이 발발, 그 꿈을 접게 된다. 이후 기자가 되고 정·관계 요직을 두루 돌았지만 자신의 성정과 맞지 않았다. 그래서 귀향의 꿈도 어렵지 않게 실천할 수 있었다. 그는 숱한 연예인 같은 방송인 토커들의 장광설, 요설 등만 난무하고 반면 참언론이 설 자리는 더욱 좁아지고 있는 것 같은 세태가 너무 속상하다고 고백했다.

그는 영남일보의 미래와 지역언론 발전을 위해 몇 가지 당부를 했다.

“자본의 위세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세졌습니다. 자본이 끌고가는 언론이 시대적 부응이라 여길 수도 있어요. 그와 동시에 인간의 가치는 자본의 가치에 비하면 형편없이 추락하고 있어요. 언론은 이 대목을 중시해야 됩니다. 자본은 자본의 가치를 어떤 형식으로 사수하겠지만 황금만능 자본주의세상에서는 자본에 절망하는 인권사각지대가 도처에 깔릴 겁니다. 신문이 이를 고발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진영의 언론은 결국 무너집니다. 탈(脫)진영, 진영 너머의 가치를 선도할 줄 알아야 해요. 그러려면 탁월한 안목의 기자가 절실해요. 그런데 예전에는 그런 재원이 신문사로 왔는데 박봉이라서 그런지 갈수록 다른 직장으로 가는 것 같아요. AI의 권능이 아무리 전지전능 하더라도 정의와 평등, 그리고 자유의 가치까지는 사수할 수 없을 겁니다. 참언론만이 그걸 할 수 있어요. 자본과 인간이 공존하는 세상의 지혜, 그리고 갑과 을이 배려하고 공존하고 선순환할 수 있는 균형감각을 가질 때 언론도 그 존재가치를 확인받게 될 겁니다. 아무튼 매체 형태는 바뀌어도 언론의 기능만은 종멸하지 않을 겁니다. 최고의 지방지를 자부하는 영남일보가 그 가치를 선도하길 간절히 기원하겠습니다.”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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