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市 승격 70년, 포항의 정체성을 이야기하다 .6] 개척정신의 고장<上> 새마을운동과 문성리

  • 박종진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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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12-02   |  발행일 2019-12-02 제12면   |  수정 2019-12-10
‘잘살아 보세’ ‘하면 된다’ 문성리의 작은 기적, 세계로 메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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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마을운동 초기 모범지역으로 손꼽혔던 포항 북구 기계면 문성마을의 모습. 당시 문성리는 ‘자조의 마을 문성리’라는 홍보영화가 제작될 정도로 전국에서 명성이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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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문성리에서 전국 시장·군수 비교행정회의를 주재하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모습을 재현한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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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성마을 입구에는 지상 2층 규모(연면적 1천139㎡)의 새마을운동발상지기념관이 자리잡고 있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 당시 관련 자료들이 전시돼 있으며, 세미나실과 영상홍보실 등도 갖췄다.

새마을운동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확고한 정신적 기반이 있어서다.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의지와 신념, ‘다함께 잘살아 보자’는 근면·협동 정신이 성공의 열쇠였다. 이 같은 새마을운동 정신은 포항의 정체성과 맞닿아 있다. 풍요와 화합을 추구해 온 연오랑 세오녀의 일월정신, 거친 땅을 일구고 새로운 길을 열고자 하는 개척정신과 상통한다. 새마을운동이 포항에서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뻗어나갈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셈이다. ‘포항의 정체성을 이야기하다’ 6편에서는 근대화의 밑거름이 된 새마을운동과 문성리에 대해 다룬다.

1970년 4월22일 朴 전대통령 지시로
새마을가꾸기사업 본격적으로 불붙어
68가구 문성리 전국서 독보적인 성과
1971년 朴 전 대통령 직접 마을 방문
올해만 7개국서 ‘새마을메카’ 다녀가
시범마을·봉사단 파견 등 세계화사업도

#1. “너도나도 잘살아 보세”

새마을운동은 한마디로 ‘잘살기 운동’이다. 최소한 사람답게 먹고, 입고, 좀더 편안한 곳에서 살아보자는 바람에서 출발했다. 인간 생활의 기본요소인 ‘의식주’가 보장된 삶을 영위하는 권리를 스스로 찾자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특히 새마을 운동은 혼자가 아닌 공동체의 번영을 목표로 한다. 화합과 협동정신으로 구성원 모두가 행복한 공동체를 만든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새마을 정신은 포항의 고유한 정체성인 일월·호국·개척정신과 맥을 같이한다. 역사적 배경이나 실천 방식은 조금씩 다르지만 결국 공동체의 번영과 화합으로 귀결된다.

새마을운동이 태동하기 전 1960년대 한국 농촌의 상황은 그야말로 열악했다. 농가 호당 평균 경작면적은 1㏊에 불과했고, 제대로 된 수리(水利)시설도 갖추지 못했다. 도로 상황도 여의치 않아 차량 통행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농민 대부분은 소규모로 벼농사를 지어 큰 이익을 남기기 어려웠고, 농한기(農閑期)에는 마땅한 소일거리조차 없었다. 오히려 매년 춘궁기(春窮期)가 찾아오면 빚을 내 살림을 꾸려가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농사를 지어 빚을 갚고, 또 빚을 지는 악순환의 반복이었다.

도시와 농촌간 소득 불균형 문제도 심화됐다. 당시 정부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단계별로 추진하고 있었다. 초기에는 투자재원을 확보하지 못해 난관에 봉착했지만 외국자본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하면서 고도성장의 궤도에 올라섰다. 1962~1966년 1차계획 당시 연평균 8.5%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했으며, 1인당 국민총생산(GNP)은 83달러에서 123달러로 높아졌다.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선 농촌의 안정이 절실한 상황이었다. 이에 박정희 전 대통령은 농촌개발에 대한 강한 집념을 드러내며 새로운 방안을 제시했다.

구체적인 개발 방향이 나온 건 1970년 들어서다. 같은해 4월22일 박 전 대통령은 지방장관회의에서 “새마을가꾸기운동이라 해도 좋고, 알뜰한 마을만들기라고 해도 좋다”며 공직자들에게 새마을사업을 지시했다. 새마을운동의 원형이 된 ‘새마을 가꾸기 사업’이 비로소 시작된 것이다.

우선 정부는 전국 3만5천여개 마을에 시멘트 335포대씩을 지원했다. 또 마을별로 남녀 지도자 각 1명씩을 선출해 사업을 계획하고 추진하도록 했다.

국가의 재원과 지원 한계가 있는 만큼 농촌 공동체 스스로의 힘으로 숙원사업을 해결하도록 유도한 것이다. 농민들이 얼마나 호응하는지를 살펴보는 일종의 테스트였던 셈이다. 정부는 이후 새마을운동중앙협의회를 설치하고, 새마을 가꾸기사업을 지속적으로 지원했다.

새마을운동은 짧은 기간 성과를 냈다. 전국 농촌마을 곳곳에서 대대적인 농업·주거환경 개선이 이뤄졌으며 농가소득 상승으로 이어졌다. 사업 초기에는 마을길 확장, 지붕, 담장, 부엌, 화장실 개량 등 환경개선에 집중했고, 이후 농로확장, 농지개량, 종자개량 등 소득증대와 관련한 사업에 치중했다. 복합영농, 공동작업장 운영, 농외소득원 발굴 등의 노력으로 1976년 한때 농가소득이 도시근로자 소득을 넘어서기도 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맞물려 새마을운동은 한국의 근대화를 촉진시키는 밑거름이 됐다.

#2. ‘새마을의 모범’ 문성리

전국 3만5천여 마을 가운데 포항 문성리의 성과는 독보적이었다. 정부로부터 지원받은 시멘트를 활용해 다양한 시설 개선을 이뤄냈다. 당초 기대치의 수십 배에 달하는 효과를 거둬 정부를 놀라게 했다.

문성리의 이같은 성과는 오롯이 주민들의 노력에서 비롯됐다. 당시 문성리의 여건은 여느 농촌마을과 별반 다르지 않았고, 오히려 경북에서도 낙후된 곳에 속했다. 구릉지대 경사지에 마을이 있던 터라 항상 물이 부족했다. 비가 와도 물이 금방 흘러내려 농사짓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던 것. 때문에 논과 밭은 항상 가뭄에 시달렸고 400여명(68가구)의 주민들은 늘 생활고를 겪었다.

그러던 차에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기계천 지하수를 개발해 한해(旱害)를 극복해 보자는 목소리가 나왔다. 그 중심에는 기계면 자원지도자 이석걸씨와 동장 홍선표씨가 있었다. 두 사람이 중심이 돼 주민들은 천수답(天水畓)을 수리안전답(水利安全畓)으로 바꾸는데 성공했다. 고무된 주민들은 양수장 확대, 길 고치기 등 마을공동사업을 자체적으로 추진했다. 1970년 ‘새마을 가꾸기 사업’이 시작되자 문성리 주민들은 또 한번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초가지붕을 슬레이트로 개량하고, 담장을 블록으로 고쳤다. 마을회관 구판장도 세웠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마을 진입로를 개설하고, 지게를 대신할 리어카를 만들어 보급했다. 농업환경이 개선되면서 농가소득도 덩달아 올랐다.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 희망의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실제 1967년 연간 10만원 안팎이던 주민 소득은 사업 이후 연간 23만원으로 뛰어올랐다. 이같은 문성리의 성과는 주민들의 ‘자주·개척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듬해 6월까지 진행된 새마을 가꾸기사업 결과, 문성리는 전국에서 최초로 대통령상을 받았다. 그만큼 문성리의 사례는 다른 마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난 성과였다.

문성리의 모범사례는 전국으로 알려졌다. 1971년 9월17일에는 박 전 대통령이 직접 마을을 방문했다. 장관을 비롯해 도지사와 시장, 군수 등 고위 관료들이 문성리에 집결했다. 이날 박 전 대통령은 전국 시장·군수를 불러놓고 ‘비교행정회의’를 주재했다. 문성리의 성과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전국으로 전파하기 위해서였다.

박 전 대통령은 “한 부락에 10만원어치 시멘트를 줬는데 480만원어치 일을 해냈다. 그것도 몇달 만에 이뤄낸 성과”라며 “다시 강조하지만 농촌이 잘 살려면 농민 스스로가 하면 된다는 의식을 가져야 한다. 문성리의 사례는 우리가 꿈꾸는 새마을의 모범”이라고 강조했다고 한다.

이후 문성리는 전국적인 새마을운동 모범마을로 떠올랐다. ‘자조의 마을 문성리’라는 홍보영화가 문화공보부에 의해 제작돼 전국에 방영됐다. 당시 문성리는 성공사례를 배우려는 이들의 발길로 문전성시를 이뤘다고 한다.

#3. 세계로 뻗어가는 ‘21세기 새마을운동’

새마을운동은 1980년 ‘새마을운동 중앙본부’가 창립된 이래로 민간 주도로 변모했다. 정부 주도의 획일적인 개발·계몽운동에서 벗어나 다양한 활동이 전개됐다. 1980~1990년대를 지나 새마을운동은 21세기에 들어서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현재는 농어촌의 경쟁력 강화, 사회적 비용 절감을 위한 환경개선, 문화시민의식 함양 등에 집중하고 있다. 최근에는 ‘새마을운동조직육성법’ 개정안이 통과되면서 지자체가 추진하는 새마을 사업이 더욱 탄력을 받을 것으로 기대된다.

새마을운동은 해외에서도 각광 받고 있다. 저개발국가를 대상으로 한 새마을운동 보급과 해외연수단 유치 사업이 조금씩 성과를 내면서다. 선진국의 일방적인 원조에 익숙하던 저개발국가들은 의식 변화를 이끌어내는 새마을운동에 깊은 감명을 받고 있다고 한다. 수많은 국가의 지도자들이 끊임없이 새마을운동 전수를 요청하고 있는 이유다. 특히 아프리카 국가들이 적극적이다. 세네갈, 코트디부아르, 토고, 가나, 콩고, 나이지리아 등이 새마을운동을 배우고 싶어한다. 콩고 민주공화국 농업개발부 장관, 토고 농축수산부 차관, 주한 에티오피아 대리대사, 주한 가나 대사 일행이 연이어 경북도청을 방문해 새마을운동 보급을 요청했다.

경북도의 경우 아프리카 6개국(에티오피아·르완다·탄자니아·세네갈·카메룬·코트디부아르)과 아시아 9개국(필리핀·우즈베키스탄·베트남·스리랑카·인도네시아·인도·키르기스스탄·라오스·캄보디아) 50개 마을을 대상으로 새마을 시범마을 조성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포항시도 2014년부터 2018년까지 5개년 사업으로 경북도새마을세계화재단과 협력해 새마을운동 세계화사업을 진행 중에 있다. 앞서 스리랑카 피티예가마 현지에 해외 봉사단을 파견해 새마을조직을 구성하고, 소득작물 재배방법 제공 등 현지 주민에게 새마을운동을 전파한 바 있다.

문성리는 새마을운동의 메카와도 같다. 올해만 동남아, 중앙아시아, 아프리카 등 7개국 230여명이 새마을 연수, 벤치마킹 등의 목적으로 문성리를 다녀갔다. 새마을운동을 배우려는 이들의 방문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박종진기자 pjj@yeongnam.com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 포항시 새마을운동 발자취. 이야기로 풀어낸 경북의 혼, 뿌리. 새마을운동 발상지. 한국근현대사사전.

공동기획지원 : 포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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