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보는 대구문화 아카이브<4>] 이쾌대...인물 표정묘사·탁월한 조형감각 통해 고난받는 민족현실 적나라하게 표출

  • 박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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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02-15 08:17  |  수정 2021-04-22 16:19  |  발행일 2021-02-15 제20면
광복 후 남·북 이념 희생양되며
쓸쓸히 잊혀간 '비운의 천재'

군상(조난)
이쾌대 '군상(조난)'

대구미술관이 지난 9일부터 오는 5월30일까지 '때와 땅' 기획전의 하나로 '이인성과 이쾌대' 코너를 선보이고 있다. 2011년 12월에도 대구미술관은 4개월간 '이쾌대 원화'전을 열었다. 월북화가인 그는 1988년 정부로부터 해금된 뒤 90년 해금작가유화전(서울 신세계미술관)에서 김용준, 김주경, 김만형, 길진섭, 최재덕, 배운성 등과 함께 처음으로 남한에 소개됐다. 이쾌대는 91년(서울 신세계미술관, 부산 눌원갤러리), 92년(대구 동아미술관), 93년(수원 문화예술회관), 95년(대구 대백갤러리)에 각각 개인전으로 재조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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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쾌대 '2인 초상'

월북화가 해금조치로
90년 남한에 첫 소개
개인전으로 '재조명'

◆남북이 외면한 천재화가

이쾌대(1913~65)는 20세기 한국이 낳은 대표적 서양화가이지만, 월북으로 빛을 보지 못했다. 북한에서도 예술·사상적 주류인 '주체미술'에서 밀려나 '민족허무주의'란 비판 속에 금기시됐으나 99년에서야 겨우 '조선력대미술가편람'에 이름을 올렸다. 그는 이념에 의해 남과 북에서 희생양이 된 작가이지만 1930~40년 대 그처럼 많은 유화작품을 남긴 작가는 드물다. 이는 1980년 작고한 부인 유갑봉씨와 아들 한우씨의 노력 덕분이다. 현재 이쾌대의 유화작품은 60점 정도로 드로잉 등을 포함해 300점이 남아있다고 알려진다.

이쾌대는 1913년 경북 칠곡군 지천면 신리39 웃갓마을에서 태어났다. 1921년 신동소학교에 입학한 그는 10세 때 대구로 와 한 살 위 같은 학년인 한국 근대 화단의 개척자 이인성과 함께 수창학교를 다녔다. 대구에서의 생활은 5년, 그는 1928년 서울 휘문고보로 진학한 뒤 34년 일본으로 유학, 도쿄제국미술학교에서 수학했다. 이쾌대는 48년 서울 성북구 보문동에 성북회화연구소를 설립했다. 6·25전쟁 때 인민의용군으로 참전해 서울에서 북으로 가던 도중 체포돼 거제포로수용소에 수용됐으나, 53년 휴전 후 남북포로교환 당시 스스로 북을 선택했다. 그는 자강도 강계시에서 재혼해 살다가 1965년 위벽에 구멍이 생기는 위천공으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다.

이쾌대는 창원현감을 지낸 대지주 이경옥의 2남4녀 중 막내다.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 언론인, 학자, 화가인 여성(如星) 이명건이 그의 형이다. 그림을 잘 그린 12살 터울인 형은 이쾌대의 정신적 스승이자 멘토였다. 휘문고보에 진학해 야구에 몰입했던 이쾌대는 1학년 담임교사이자 미술교사 장발(장면 전 총리 동생)을 만나 그림지도를 받는다. 고교 시절 정물화로 '전조선남녀학생전람회' 입선(1930) 및 입상(1932), 1932년 '제11회 조선미술전람회' 입선 등 화가로서의 뛰어난 자질을 드러낸 그는 33년 유갑봉과 결혼 후 함께 일본 도쿄로 건너가 유학 생활을 시작했다. 유갑봉은 남편의 드로잉과 회화에 숱하게 등장하는 인물이다. '빨간 외투 입은 여인' '쪽 진 머리 부인' 등 근대미술가 중 부인을 이쾌대만큼 자주 작품 속에 등장시킨 화가가 없을 정도다.

◆일제강점기와 해방공간에서의 활동

도쿄제국미술학교(현 도쿄 무사시노 미술대) 서양화과 재학 중에는 주로 인물을 주제로 많은 작품을 그렸다. 제국미술학교 학생들이 중심이 된 '하라츠바회'의 양화전람회에 연속 출품하고, 37년 로쿠호샤(綠包社)전으로 이름이 바뀐 제4회전에 '부인상'(1937)을, 제5회전에 '무희의 휴식(1937)'을 출품해 입선했다. 또 일본 재야의 진보적인 미술가들이 참여한 이과전(二科展)에 출품, 연 3회에 걸쳐 입선(운명·1938, 석양소풍·1939, 그네·1940)했다. 한국인으로서 이과전에 참여한 작가는 김환기, 구본웅, 김종태, 박상욱 등이 있다. 이쾌대는 일본 유학시절 심형구, 김인승, 김학준, 서진달, 장욱진, 박고석 등 한국 유학생과 교류하며 민족적 색채를 띤 백우회(白牛會)에 가입해 활동했다.

김영동 미술평론가는 "이인성이 대체로 풍경을 주제로 대상의 감각적 인상 포착에 뛰어난 그림을 그렸다면 이쾌대는 정물이나 인물을 주제로 대상의 메스를 화면구축에 맞춰 충실히 재현하고 구성하는 방법을 발전시켜 나갔다. 이쾌대는 인물의 표정 묘사와 균형 잡힌 인체의 비례를 구축하는 데 더 뛰어난 조형감각을 드러냈다"고 밝혔다. 이어 "이쾌대는 일제 말까지 관전이나 보수적인 화단과는 분명한 거리를 두었다"고 했다.

39년 귀국한 그는 왕성하게 활동했다. 41년엔 이중섭, 최재덕, 문학수, 김종찬, 김학준, 진환 등과 '조선신미술가협회' 결성을 이끌었고 43년 첫 개인전(서울 화신화랑), 44년 10인전(서울 종로화랑)을 여는 등 암울했던 민족의 한과 울분을 향토색 짙은 회화로 표출하고자 했다.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군상시리즈'는 해방공간 1947~48년작으로 추정된다. 49년엔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추천작가로 선정돼 작품 '추과'를 출품했다.

이중희 미술평론가는 이쾌대를 대구에서 '향토회' 창립을 주도한 김용준과 형 이여성과 함께 '지역(대구경북)' '그림' '민족주의' '월북'이라는 공통분모 속에 넣고 있다. 그는 고난에 처한 민족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그렸다는 점에서 한국 근대회화사에서 이쾌대를 '독보적인 존재'라고 평가하고 있다.

광복 후 이쾌대는 '조선미술동맹'에 가입해 서양화부 위원장을 맡는다. 오광수 미술평론가에 따르면 47년 2월호 '신천지'에 '북조선미술계보고'를 쓴 점으로 미뤄 이즈음 전 그가 북한을 방문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쾌대는 북한에서 미술이 이데올로기의 전위가 돼 선전·선동 도구로 전락했음에 실망하고, 47년 순수 창작활동을 지향하는 '미술문화협회'를 창립한다. 이쾌대를 중심으로 이규상, 김인승, 홍일표, 박영선, 이봉상, 남관, 이인성 등 비교적 온건한 작가들이 참여했다.

이 무렵 이쾌대는 서울 성북구 보문동에 '성북회화연구소'를 설립하고 미술 지망생들을 지도했다. 물방울화가로 유명한 김창렬(2020년 타계)을 비롯해 김서봉, 김숙진, 이용환, 심죽자, 전뢰진 등이 제자들이다. 김창렬은 2011년 대구미술관의 '이쾌대 원화'전에도 들렀다. 이쾌대는 서울 남산에도 본격적인 미술연구소를 설립하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월북 이후 작품과 사후 평가

월북 이후 이쾌대는 조선미술가동맹 소속 화가로 활동했다. 57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6회 세계청년축전에 '삼일운동'을 발표하고, 전국미술전람회에 '농악'을 출품했다. 58년 월북화가 김진항과 함께 중국 인민지원군 우의탑에 벽화를 제작했으며, 61년에는 국가미술전람회에 '송아지'를 출품해 2등상을 받았다고 알려진다. 남한에 남은 이쾌대의 유작은 '군상Ⅰ(해방고지)Ⅱ Ⅲ, 군상Ⅳ(조난)' '푸른 두루마기 입은 자화상' '부인도' '봄처녀' '무희의 휴식' '걸인' '부녀도' '상황' '2인 초상' '이여성 초상' 등 회화와 수백여점의 드로잉이 있다. 오광수 미술평론가는 "이쾌대의 작품은 사실을 바탕으로 하면서 민족적 정서를 강하게 드러낸 경향으로 일관했다. 특히 해방공간에선 사회의식이 반영된 현실적 주제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고 했다. 이어 "군중을 주제로 한 인물작품과는 달리 한국인 특히 여인의 이상적 모델을 추구했다. 정물이나 풍경도 간간이 있지만 모티브의 중심은 인물"이라고 했다. 또한 "여러 점의 자화상을 남긴 점에서 한국화가라는 자부심과 자의식이 강한 예술가"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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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범모 미술평론가는 "해방공간 이쾌대는 민주주의 원칙을 강조하면서 신시대 회화운동을 강조한 바 활동상은 독보적이었다. 20세기 한반도의 시대 상황과 직결되면서 민족의식과 시대정신을 예술적 토대로 구축했다. 구체적 도달점은 낭만주의와 진보적 리얼리즘이며, 그 정점에서 독자적 예술세계를 이끈 대가형 화가"라고 평가했다. 한편, 대구 북구와 경북 칠곡군이 '이쾌대미술관' 건립에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통일 후 남북통합과 화합의 예술적 상징 인물로 그만한 화가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공동기획  대구광역시


■ 참고문헌=대구미술 100년사 <대구미술협회>, LEEQUEDE <DAEGU ART MUSEUM>, 대구미술이 한국미술이다 <이중희·동아문화>, 대구독립운동사 <광복회 대구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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