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2010] 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7> 이하석의 ‘문경 탄광 이야기’

  • 입력 2021-05-25 13:10  |  수정 2021-05-31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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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돌숯이 약이 되더니 큰 불이 됐네)
 

도탄(都炭)이라 했다. 마을 이름이 그랬다. 그 마을 김 동석의 집 뒤안과 산은 옛날부터 온통 불에 탄 것처럼 그슬려 있었다.

 

“얘, 불 놓으며 놀까?”하고 김 동석의 아들 정균은 이웃 친구에게 말했다. 두 아이는 집 뒤안을 파고 시커먼 돌들을 몇 개 골라냈다. 그걸 집 밖 공터에 쌓아놓고 마른 푸나무로 밑불을 붙이면 잠시 뒤에 그 돌들에 불이 옮겨 붙어 꽃처럼 발갛게 달아오르는 것이었다.
 

“와 신기하다. 돌에 불이 붙다니.” 친구는 손뼉 치며 소리를 질렀다.
 

“돌숯이야. 이걸 약으로 쓰기도 한단다.” 정균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우리 집 주변은 돌숯 천지야.”
 

‘탄(炭)’은 숯이란 뜻인데, 여기서는 돌숯이라 했다. 바로 석탄이었다. 도탄이란 마을이름은 돌숯 때문에 생긴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런 돌숯을 찾아다니는 이들이 나타났다. 일본인들이었다. 1934년 무렵, 이 지역의 광업권을 따낸 일산화학공업주식회사 직원들이었다. 조선인 인부 몇 명을 데리고 나타난 그들은 도탄마을 뒷산을 파고 지질과 탄맥을 조사했다. 마을 사람들은 일인들의 지표조사를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희한해. 돌숯이 그냥 땅 속에 묻혀있는 게 아니고 맥이 있어서 그 시커먼 줄을 따라 분포한다는 거야. 왜놈들은 그 맥이 확인되면 파는 걸 중지하고 다시 몇 십 미터 가서 말목을 박아놓아. 그런 식으로 해서 산엔 온통 말목 천지야. 참 왜놈들 용해.”
 

그러나 신기하다고 여긴 건 잠시였다. 그들 앞에 청천 벽력같은 통고가 떨어졌다. 탄광개발을 위해 마을주민들이 강제 이주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산주인 김 동석은 절대로 산을 내놓을 수 없다고 버텼다. 그러자 일인들은 임대형식으로 사용하겠다고 김 동석을 회유했다. 그 후 조용했던 농촌마을이 탄광촌으로 바뀌면서 이 산은 결국 일인에게 팔려 넘어가고 말았다. 탄광촌 이름도 은성으로 바뀌었다. 가은의 은(恩)자와 마성의 성(城)자를 따서 지은 것이다. 1938년 시작된 은성무역탄광의 개발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은성탄광은 일인들이 경영하고 관리했지만, 막장에서 일하는 갱부들은 조선인들이 많았다. 본토백이 가은 사람들은 물론이고,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팔도공화국’이라 불렸다. 김정균의 친구 남 씨도 그랬다. 농사보다 수입이 많았기에 열심히 하면 부자가 되겠다싶어 광부를 지원했다. 그리하여 어릴 때 장난삼아 불을 붙이고 놀았던 그 돌숯을 캐러 지열 뜨거운 막장의 캄캄한 속으로 들어갔다.
 

해방 후 은성탄광은 숱한 우여곡절을 거쳐 한국석탄공사가 운영하는 국광이 됐다. 국가산업의 근간을 이루는 에너지원의 주요공급처가 된 것이다. 그 후 연탄파동도 겪고, 석유파동으로 다시 호황을 맞는 등 부침하다가 연탄이 유류로 대체되면서 석탄 산업이 사양길로 접어들어 90년대에 폐광이 속출했다. 문경탄광 최고의 요지였던 은성탄광도 1994년 봄에 문을 닫았다.
 

남 씨의 광부 일도 그 때 접을 수밖에 없었다. 이후 그는 자신이 이 곳 도탄리 원주민이었다는 것도,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 후까지 호구를 위해 막장 생활을 했던 것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는다. 그저 시커먼 석탄처럼 자신의 이력을 가슴에 꼭꼭 묻어놓을 뿐이다. 너무 아프고 캄캄한 기억 때문일까?

2(쥐, 같이, 살다)
 

갱부 남 씨(또는 김 씨일 수도 이 씨일 수도 있다)의 일상은 이러했을까?
 

그는 ‘게다짝’(나막신)을 신으려다 짜증스런 얼굴로 다시 장화로 바꿔 신는다. 출근하려니, 아내가 마음에 걸린다. 밤에 다퉜던 게다. ‘탄광 돈은 햇빛만 봐도 녹는다’고 하지만, 월급날 술을 하고는 작부와 “배꼽 맞추자”며 호기를 부린 바람에 집에 와서 보니 월급봉투가 너무 앏아져 있었던 게다.
 

아침에 밥을 지으면서 그녀는 아무 말이 없다. 식사 후 갱부들이 모여 사는 사택을 나서면서 더 이상 잔소리를 않는 아내에게 더욱 미안해진다. 기실 탄광촌에서는 아침 출근길에 아내가 잔소리하는 걸 금기시한다. 그런 금기사항이 참 많다. 출근할 때 여자가 앞을 가로 질러가면 출근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 버린다. 부부싸움 후에는 가급적 갱에 들어가지 않는다. 남편이 출근한 후 신발을 방 안쪽으로 향하게 놓는다. 출근길에 짐승이라도 치면 그날은 출근 포기다. 갱내에서는 휘파람을 불거나 뛰지 않는다〮……. 안전을 최우선으로 삼는 갱부들로서는 어쩔 수 없이 지켜야 할 정도로 절박한 징크스들이다. 금기를 지키지 않았다가 사고라도 나면 그건 바로 갱 속에 파묻혀 죽는 것이다. 아내도 그런 징크스를 알기에 속이 끓어도 출근길에는 내심을 하지 않은 게다. ‘3000만원 짜리 돼지’의 안전을 위해서다. ‘3000만원 짜리 돼지’는 광부인 남편을 가리킨다. 사고로 죽으면 재해보상금 3000만원을 받는다는 뜻이다.
 

인차를 타고 한참 갱 속을 내려가선, 다시 걸어서 작업장으로 향한다. 갱 속은 후끈후끈하다. 오죽하면 월남막장이라 했겠는가? 동료들 중에는 팬티 바람으로 작업에 임하는 이도 있다. 그와 동료들은 갱 속에 들자마자 구석부터 유심히 살핀다.
 

“있어?”라고 그는 동료에게 묻는다.
 

“응 저기 한 마리, 저 구석에도 있는 듯해”라고 동료는 구석을 가리킨다. 자세히 보니 검은 게 작업도구들 아래서 고물거린다. 쥐다. 반갑다. 쥐가 산다면 이곳도 안심할만하다고 그는 여긴다. 그는 도시락 속의 밥을 조금 떼 내어 쥐에게 던져준다.
 

광부는 쥐를 아주 친하게 여긴다. 예지력이 뛰어나 쥐는 광부들에게 생명을 지켜주는 나침반이라고 여겨지기도 한다. 갱내에서 자주 발생하는 가스 유출을 쥐는 아주 민감하게 감지하고는 피한다. 갱내 출수사고나 붕괴 사고도 미리 예감한다. 광부는 그런 쥐의 움직임을 보고 위험을 미리 인지하여 피할 수 있다.
 

낙반붕락, 운반사고, 전석, 추락 및 전도, 가스사고, 출수, 화약 발파 사고, 화재 등 탄광재해는 종류도 다양하다. 그러니 갱내 안전에 대한 주의는 아무리 해도 과하지 않다고 할 정도다. 그 역시 갱에 들자마자 각종 안전 조치를 취하고, 상황을 점검하는 것부터 일을 시작한다.
 

“지난 번 사고는 너무 끔찍했어. 이젠 갱에 들어오기가 더 겁난다니까”라고 동료 중 한 명이 말한다. “생존자가 80여명이나 됐지만, 갱내에 사흘 동안 갇혀 있다 구출됐지. 죽은 사람은 44명이나 되었고.”
 

“그래요? 그런데도 매스컴이 조용했잖아요?” 오늘 처음 갱에 들어온 신참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가난을 벗어나보자고 떼를 써서 막장으로 내려왔지만, 그는 일이 생각보다 훨씬 힘들고 불안해서 포기해버릴까 하며 잔뜩 겁을 먹고 있는 터다.
 

“그건 박대통령 시해사건 때문에 우리 사건이 가려져서 그랬지.”
 

“가뜩이나 사회로부터 왕따 당한 우리 신센데, 이렇게 큰 사고가 나도 한 사람 때문에 다시 우리 몽땅 왕따를 당하는군.” 누가 자소하듯 내벹는다.
 

“어쨌든 매사 조심하자.” 그는 안전을 다시 강조한다. “두 하늘을 덮어쓰고 사는 우리 아닌가?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매일 고마운 일이지.”
 

‘두 하늘을 덮어쓰고 산다’ 또는 ‘두 하늘을 모시고 산다’는 말을 그들은 자주 한다. 지하에서는 갱도의 천정이 광부들의 또 다른 하늘이다. 밖의 하늘과 갱도 속의 하늘을 늘 의식할 정도로 그들은 언제나 사고 위험에 대한 공포심을 떨치지 못한다.
 

고참인 그가 훗노미(쇠막대, 일명 꼬질대)로 탄층에 능숙하게 발파구멍을 뚫고 그 속에 다이너마이트를 장전한다. 도화선에 불을 붙이자 이내 꽝하는 소리와 함께 탄가루가 갱내를 자욱하게 메운다. 신참들과 다른 갱부들은 탄을 객차에 담아 갱 밖으로 실어낸다. 어느 것 하나 마음을 놓을 수 없을 정도로 위험한 일이다. 그는 불안한 마음을 갱 속의 검의 하늘에 기도하는 것으로 가라앉힌다. 그리하여 작업을 끝내고 나와 푸른 하늘을 보고는 “오늘도 마지막은 아니었구먼”하고 비로소 안심하는 것이다.


3(닫힌 하늘, 새로 열리는 하늘)
 

그는 이제 농사를 짓는다.
 

가은에는 2만5000명의 광부들이 거주했으나 폐광 후 거의 다 떠났다. 은성탄광 자리에 세운 석탄박물관을 강 건너에서 늘 보지만, 마음이 개운치 않다. 석탄박물관의 여운황 학예연구사는 문경지역 박물관 자료를 모으느라 김 씨 같은 광부 출신들을 자주 찾아온다. 그 때마다 말한다.
 

“광산 경기가 좋을 때에는 은성 광업소에만 1천500명이 일했지. 하루 3교대 근무였는데, 교대시간만 되면 광부들 소리로 이 골짝이 떠들썩했어. 지금은 다 떠나고 가은에 40명 정도가 남아있을 정도지.”
 

“박물관을 구경하는 마음이 어떻습니까?”
 

“은성광업소 폐광 후 그 자리에 이 지역의 석탄 산업을 관광자원화한다고 세운게지. 박물관이 생길 때 이곳에 근무하던 이들은 마음 아파하기도 했고, 큰 기대를 갖기도 했어. 특히 진폐증 환자들의 기대가 컸지. 이 박물관을 통해 진폐증 광부들에 대한 국가적 관심이 커질 것이란 기대를 많이 가졌지.”
 

그는 이곳에 지금도 꽤 많이 남아있는 진폐증 환자들을 안타까워한다. 문경제일병원에 있는 산재병동은 진폐병원이라 불린다. 지금도 3~400명의 환자들이 진료중이다. 박물관의 야외전시장에는 진폐증으로 순직한 이들을 추모하기 위한 위령비와 사당이 세워져 있다. 매년 10월초면 문경지역 진폐 순직자 위령제가 열리는데, 그는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석해왔다.
 

그는 아들내외와 손자, 손녀들이 오면 박물관을 구경시켜준다. 전에 석탄을 실어 나르던 철로 위로 새롭게 오가는 레일바이크(철로 자전거)를 태워주기도 한다. 석탄박물관과 레일바이크 이용자는 휴일이면 아주 많다. 하루 세 번 씩 치러지는 교대시간마다 검은 물결을 이루던 광부들의 떠들썩함이 사라진 대신, 다양한 색깔의 여행복 차림 관광객들의 호기심 어린 눈길들이 밀려들고 있다. 석탄 박물관 뒤편 산비탈에는 ‘연개소문’, ‘대왕세종’, ‘천추태후’ 등을 촬영하기 위해 평양성과 고구려마을, 신라마을 등으로 구성된 영화촬영 세트장이 있어서 관광객들을 부른다. 문경시는 석탄박물관과 오픈세트장을 통합 운영함으로써 관광객들을 끌어 모으는데 효과를 보기도 한다. 석탄박물관 뒤 산에는 은성광업소가 운영되던 시절 사용했던 갱도를 활용한 갱도전시장이 있다. 이곳에서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실제갱도체험을 할 수 있다. 레일바이크는 과거 이곳의 석탄을 점촌역까지 운송하던 철로를 새롭게 이용해서 운행하는 것이다. 그 중간 역으로 석탄의 역사를 잘 떠올려주는 가은역과 불정역은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이런 변화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는 그는 80노구를 겨우 버티면서 이렇게 말할 뿐이다.
 

“두 개의 하늘 중 한 하늘은 이제 깊은 어둠 속에 묻혀버렸네. 그 대신 이 곳에는 과거의 어둠을 새롭게 닦아 보이는 새 하늘이 열리고 있는 셈이야. 그 청천 하늘 속에서도 언제나 잊지 말아야 할 게 바로 땅 속의 하늘이야.”
이하석<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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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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