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2010] 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8> 이상국의 '삼족견(三足犬) 보리, 성주 태실에서 500년 사랑을 품다'

  • 입력 2021-05-25 13:16  |  수정 2021-05-31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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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보리(菩提)'라고 하는 여인네요. 세종대왕 시절에 꽃 피었다가 단종대왕 유폐(幽閉)와 함께 쓸쓸히 진 해어화(解語花, 기생)라오. 나는 한 남자를 사랑했소. 그 사람, 안평대군 이용은 나를 참 어여삐 여겼소. 안평이 몽유도원(夢遊桃園)하던 밤의 꿈에도 내가 동행하고 있었던 것을 모르지요? 그는 내게 꿈이야기를 해주었소. 함께 말을 타고 들어갔는데 무릉의 절벽 앞에서 그만 내가 말 아래로 추락하더라는 거요. 깜짝 놀랐지만 그는 어쩔 수 없이 나를 둔 채로 계속 말을 달렸다고 하오. 안평대군은 등 뒤에서 내가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며 마음이 아팠다고 말했소. 하지만 세상사람들의 입방아를 꺼렸기에 이원(梨園, 화류계)의 나를 굳이 언급하지 않았소. 안평대군의 꿈을 그린, 안견의 <몽유도원도>(1447년작, 일본 덴리[天理]대학 소장) 속에는 보리가 숨어있는 셈입니다. 이제 와서 곰곰이 생각해봅니다. 그때 나의 낙마(落馬)는 무슨 의미였을까.

세종대왕은 셋째 아들인 그에게 비해당이란 호를 내렸지요. 안평(安平)의 뜻이 너무 느긋하여 맺고 끊는 일이 분명치 않을까 염려하여, 게을리 하지 말라는 뜻으로 '비해(匪懈)' 두 글자를 준 것이었소.(시경의 '대아'편에 나오는 구절에서 딴 것) 아아, 대왕은 뒷날의 일을 예견한 것일까요? 안평은 상황을 낙관하다가 결국 형제의 욕망과 계략을 읽지 못하고 처연한 최후를 맞았지요. 참으로 아까운 사람이었지요. 대왕의 아들 중에서 풍채가 비할 바 없이 훤했고, 빼어난 소객(騷客,시인)이자 붓끝에서 신운생동하는 명필이었습니다. 중국의 황제까지 그 글씨를 받아보고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고, 인쇄하여 후세에 전하라는 조칙을 내렸다 하오.

내게 지혜와 깨달음(智.覺)을 뜻하는 '보리'라는 이름을 준 이도 안평이었소. 유교국의 왕자였지만 불심이 유난히 두터웠던 그는 여러 차례 빼어난 필체로 경전을 베껴쓰는(寫經) 공덕을 짓기도 하였지요. 또 그의 핏줄 중에 '무심(無心)'이라는 불교명을 지닌 소녀도 있었을 만큼 친불(親佛)의 가풍을 지닌 그였으니, 내게 보리라고 작명한 일이 어색하지 않았어요. 1453년 10월 계유정란 때 좌의정 김종서를 죽인 수양대군은 안평에게 모반 혐의를 씌워 강화도와 교동으로 귀양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사약을 내려 죽였지요. 그가 돌아갔다는 소식을 들은 뒤 나 또한 가만히 목숨을 끊어 평생 그리웠던 그와 저승동행을 하였지요. 뒤틀린 삶과 죽음의 황망한 매듭이었습니다.

그 뒤로 어느 시간에 나는 소로 태어났었지요. 흩어져버린 안평의 흔적을 찾아 다니다가, 성주 고을에 그의 태실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냈습니다. 달 밝은 밤 나는 어느 외양간의 고삐를 풀고 선석산 태봉(胎峰)으로 달려갔습니다. 그곳에서 나의 님 안평과, 형제의 살인자 수양대군의 자취를 함께 만났습니다. 왕위에 올랐다가 숙부의 손에 죽임을 당한 단종의 태봉(胎封, 왕의 태실),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돌아간 금성대군의 태실도 있었습니다. 수양대군 세조는 못마땅한 이들의 태실을 모두 파헤쳐버렸지만 나는 그것들이 어디에 흩어져 있는지 한 눈에 알 수 있었습니다. 소가 된 이 몸은 서러움이 밀려와 그 자리에 주저앉아서 엉엉 울었습니다. 이 광경을 누군가가 보았는지, 관청에 신고를 했습니다. 왕가 태실의 금표(禁標)를 어긴 책임을 물어 나는 그 자리에서 도살되었고, 이곳 관리마저 파직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9년전인 2001년 동짓달에 다시 태어나보니 나는 진도견이었습니다. 세 살이 되던 2003년에 고향인 대구를 떠나 다시 선석산으로 달려왔습니다. 세상에 남아있는 님의 자취라도 느끼려면 아무래도 성주의 태실만큼 좋은 곳이 없기 때문이죠. 너무 급히 달려오다가 태실 부근에 사냥꾼의 덫이 놓여있는 것을 보지 못했지요. 나는 철사줄 올가미에 오지게 걸려들어 낑낑거리고 있었습니다. 며칠째 기진맥진 사투를 벌이고 있을 때 지나가던 한 스님이 다가와 구해주었습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선석사에 있는 법견스님이었습니다. 그는 나를 데려가 정성껏 치료를 해주었지요. 그래도 다리 하나는 잃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건 신경도 쓰지 않았습니다. 나의 님 안평이 보고싶어 견딜 수 없었거든요. 다리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다시 태실로 뛰어갔습니다. 다시 비슷한 자리에서 덫에 걸렸습니다. 이러기를 네 번. 그때마다 스님이 구해주었으니, 목숨도 참 질기다 할 만합니다. 그러는 동안 왼쪽 눈도 각막이 손상되어 실명하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말못하는 짐승이 줄기차게 태실에 올라가고 그곳에서 밤을 새니 기이해 보였나 봅니다. 모두가 나를 보살처럼 대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선석사에서 예불(禮佛)도 함께 하고, 공양도 함께 합니다. 스님은 내 전생의 전생을 어떻게 알았는지, 원래 이름인 '보리'를 찾아내 불러주었습니다.

이제 보리는 세 개의 발로 절뚝거리며 밤마다 안평대군을 뵈러 갑니다. 외로운 원혼을 지켜주는 것이 내 삶에서 가장 행복한 일이오. 태실을 굳이 지키는 까닭은, 계유년의 피비린내를 잊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세종대왕은 핏줄의 화합을 위하여 이 나라에서 가장 좋은 양택(陽宅, 산 사람들의 풍수명당)을 고르고 골라, 18인 아들 손자의 태실을 만들었지요. 태(胎)는 생명이 이어지는 바로 그 오묘한 정수(精粹)로서, 이를 귀하게 다루고 모시는 일은, 왕자의 길운과 왕실의 번영을 기약하고자 하는 의식인 것이지요. 지혜로우신 세종대왕이 많은 왕자들의 태실을 굳이 한곳에 모은 까닭은 많은 형제들 사이의 알력과 욕망이 서로 충돌할 것을 경계했기 때문이 아닐까 하오. 아니나 다를까 왕국 초기의 불안한 정국은 수양의 야망으로 결국 폭발하고 말았더이다.

그런데 이곳은 참 기이한 곳이랍니다. 아픈 기억과 뒤틀린 역사조차도 품어버릴 만큼, 선석산과 태봉(胎峰)은 생명의 정기로 가득 차 있거든요. 핏덩이를 품어 한 존재를 이룩해내는 모체(母體)의 에너지가 그대로 느껴지는 곳이지요. 들 가운데 우뚝 솟았으며 위는 평평해 하늘과 맞닿는 듯한 느낌이 있습니다. 사방에 산들이 병풍처럼 가려주고 있어서 아늑한 자리입니다. 속인(俗人)들은 산 아래 만산교 다리 옆에 있는 계곡 벽에 겹쳐진 바위를 득남혈(得男穴, 음부바위)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곳에 돌을 던져 구멍 안에 넣으면 아이를 갖게 된다는 믿음을 갖고 있기도 하죠. 그러니까 이 산은 거대한 어머니의 자궁인 셈이지요. 성주(星州)는 예로부터 별의 도시로 일컬어져 왔습니다. 태봉 산정에 앉아서 이마 위에 반짝이는 별빛을 보는 일이 한없이 아름답지요. 그 별빛은 생명을 잉태하기 전에 여인들이 갖는 오르가즘과도 닮은 것입니다. 옛사람들은 별빛이 새벽에 영롱한 이슬로 지상에 내려와 인간과 교합한다고 믿었습니다. 이슬은 바로 생명이 맺어지는 절묘한 순간의 이미지입니다. 모든 상처를 품어 삶을 평화롭게 하고 운명을 길하게 하는 어머니의 힘이 이 산에는 있습니다. 태종과 세조(두 사람이 모두 성주에 태를 묻었다. 성주가 큰 도시인 목(牧)이 된 것은 태종이 자신의 태가 묻힌 이곳을 승격시켰기 때문이다)가 칼에 핏줄의 피를 묻히며 정권을 잡았지만, 이후 포악한 정치를 그치고 어진 정치에 힘쓴 것은 이 양택의 힘이 아니었을까 생각을 해봅니다.

내가 삼족견(三足犬)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닐 겁니다. 오래 전 나의 왼쪽 다리와도 같은 안평대군을 비명(非命)에 보냈으니 그때 이미 실족(失足)과 다름없었지요. 다시 님을 찾으려고 달려가다가 다리를 잃고 한쪽 눈마저 잃었으니, 이는 애인과 나를 같은 지경으로 만들어 서로 더욱 간절히 사랑하라는 뜻이 아니겠소? 그까짓 세월이 무슨 대수이겠소. 생을 거듭할 수록 애틋한 마음은 더욱 짙어지고 뜻은 더욱 단단해지더이다. 이 생명의 산에서 밤마다 영명한 대군을 기억하며 정녕 거룩한 사랑의 회임(懷姙)이라도 한번 이루고 싶소. 내 나이 이미 견세(犬歲)로는 할머니인지라 쑥스러운 생각이지만 마음은 늘 그러하단 얘기요. 1928년 일제가 나라의 정기를 흔들고 조롱하려 전국의 태봉과 태실을 서삼릉으로 이봉(移封)할 때, 이곳의 태 항아리는 모두 옮겨갔으나 석물(石物)들은 당시 월항면장이었던 도문희가 인수하여 오늘날까지 여기에 보존할 수 있었지요. 왕과 왕자들의 태(胎)는 사라졌지만, 그 기운은 석물과 함께 이 산정에 가득 남아 있습니다. 보리가 이토록 치열하게 밤마다 태실에서 한쪽 눈에 불을 켜고 경비를 서는 까닭은 이곳을 침탈하던 부정한 것들을 선험적으로 모두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외다.

보리는 밤마다 늘 운우(雲雨)의 산정을 거닙니다. 복사꽃 활짝 핀 지난 봄에는 꿈에 그이가 찾아왔더이다. 보리가 보고 싶어 왔다고, 가만히 나를 바라보며 울더이다. 이제 그도 나도 사람이 아니고, 떠도는 옛기억의 조각일 뿐이지만 나도 한없이 기쁘고 서러워 말없이 내 님 곁에 앉았지요. 어깨를 어루만지는 손길이 느껴졌고, 나는 500년 전보다 더 수줍어져서 하늘의 별을 올려다 보았지요. 이 순간을 위하여 나는 절뚝거리며 생을 건너온 것이 아닌지요. 선석사 앞마당의 선바위보다도 더 굳은 우리 사랑. 안평의 뺨이 닿은 내 뺨에 함께 흘러내린 눈물 만으로도 태봉은 왕자 하나 품어낼 듯 깊이 허리를 뒤트는 듯 하였습니다. 상사화(相思花) 피는 유월, 숨바꼭질같이 날마다 밤마다 이토록 그리운 생각으로 몽유할 수 있게 하여준 안평이여, 고맙습니다.

이상국<스토리텔링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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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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