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2010] 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18> 우광훈의 '인각사(麟角寺)로 향하는 길'

  • 입력 2021-05-25 15:57  |  수정 2021-05-31 13:48
- 인각사, 한 효성스런 아들이 머물렀던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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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야, 읍내에서 미꾸라지를 사야겠다.”


신녕 읍내에서 민물고기를 사자는 건 전적으로 고모님의 아이디어였다. 대구에서 산 물고기들은 장거리 이동에 따른 후유증으로 매번 물 속에 풀어두면 제자리에서 빙빙 맴돌 뿐이었다. 방생이란 숭고한 목적에 부합되지 않는 그 아이러니한 장면이 고모님은 매번 안타까우셨다고 한다.
 

그렇게 우린 신녕 읍내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다음 다시 화북리로 향했다. 새벽에 한차례 소나기가 퍼부었던 터라 도로는 약간 질퍽했다. 그날은 고모부님의 기일이었고, 나, 고종형님, 그리고 고모님은 인각사 앞 학소대에서 방생을 할 예정이었다.
 

영천시와 군위군의 경계가 되는 고로면을 지나자 화북리로 이어지는 삼거리가 나타났고, 이어 위천(渭川)이 펼쳐졌다. 그 맑은 계곡을 따라 5분 정도 올라가다보면 화산(華山)과 옥녀봉 사이에 위치한, 마치 폐허 같은 절 하나를 만날 수 있는데 이곳이 바로 인각사였다.
 

신라 선덕여왕 때 창건된 인각사는 일연스님이 만년에 이곳에 머물며 <삼국유사>를 집필한 곳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천 삼백 여년이 지난 지금, 학자와 세인들의 무관심 속에 철저히 잊혀지고 훼손된 곳이기도 했다. 그러나 뒤늦은 관심도, 관심은 반가운 법, ‘인각사 복원 불사를 위한 천일관음기도’를 알리는 복원관련 플래카드며, 일연스님의 생애와 삼국유사에 관한 자료들이 전시된 ‘보각국사 일연기념관’ 등 인각사는 복원에 대한 열기로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는 중이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부산에서 온 단체관람객들이 삼삼오오로 짝을 지어 인각사 경내를 자유로이 관람하고 있었다. 우린 관광버스 틈 사이에 주차를 한 다음, 곧장 옥녀봉이 바라다 보이는 학소대 앞으로 갔다. 8월의 햇살은 실눈조차 뜰 수 없을 정도로 강렬했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이 아름다운 풍광은 그 뜨거운 열기를 단숨에 식히기에 충분했다.
 

고모부님은 작년 이맘 때 돌아가셨다. 치매와 그에 따른 휴유증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주소나 전화번호를 잊어버리는 등 가벼운 증상에서 출발하였다. 하지만 외출 시 집을 찾지 못할 정도로 병환이 깊어지자, 고모부님은 고향인 이곳 신녕으로 내려오셨다. 당시 고모님 역시 편찮으셨던 터라 고모부님의 병간호는 전적으로 큰형님 몫이었다. 직장에 1년 간 병가를 내신 형님은 까다롭기 그지없는 고모부님을 바로 옆에서 지극정성으로 모셨다. 그리고 일주일에 한번씩은 꼭 이곳 인각사에 들러 고모부님의 쾌유를 위한 108배를 드리셨다고 한다.
 

위천에서의 방생이 끝나고, 우린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인각사 남쪽에 위치한 화산을 올랐다. 고모부님이 직접 만드신 돌탑을 보기 위해서였다. 3년 전인가 아내와 함께 이곳을 처음 찾았을 때, 난 마치 마이산 돌탑을 재현해 놓은 듯한 신묘한 광경에 감탄사를 연발해야만 했다. 원뿔과 사각뿔의 형태로 산재해 있는 이 돌탑의 무리를 역사라고 하기엔 그 기간이 너무 짧고, 문화라고 하기엔 너무나 사적이었지만, 그 둘을 아울러 표현하더라도 결코 부족함이 없는 광경이었다.
 

칠순을 넘어선 노인이 5미터 가까이 되는 높이와 3미터 이상의 직경을 가진 돌탑을 그것도 가파른 언덕길에 10여 개 이상이나 쌓았으니 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물론 그 탑을 쌓기 위해 주위 나무들을 베고, 땅을 파헤치느라 인근 마을 주민들로부터 여러 차례 경고와 주의를 받기도 했지만 고모부님은 결코 탑에 대한 집착을 꺾지 않으셨다고 한다.
 

형님은 잠시 탑의 언저리에 돋아난 잡초를 정성껏 뽑으셨다. 그리고 우린 돗자리를 펴고 앉아 고모님이 손수 준비하신 도시락을 먹었다. 저만치 떨어진 곳에선 옥녀봉의 가파른 지맥이 곤두박질치듯 위천 아래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 앞으로 국사전, 명부전, 산령각 등 인각사의 당우가 듬성듬성 펼쳐져있었다. 넓은 땅덩어리에 비하면 황량하기 그지없는 행색이었다. 지난 가을, 오대산 월정사에 들렀을 때 느꼈던 그 인위적인 비만과는 또 다른 불균형이었다. 난 그 황량함이 비만의 전초가 되지 않길 기원하며 산에서 내려왔다.
 

대구로 향하기 전, 우린 새로 리모델링한 보각국사 일연기념관에 잠시 들러 일연의 생애와 삼국유사의 흔적들을 관람했다. 이곳을 찾을 때마다 매번 느끼는 것은 일연과 삼국유사에 대한 나의 놀라운 무지였다. 그것은 나의 얄팍한 역사의식에 편승해 알 수 없는 죄책감으로 악화되곤 했다. 하지만 그러한 불편한 감정도 잠시, 고속도로를 내달려 대구로 접어들 때면 난 어김없이 그리이스 로마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이었다.
 

서재에 꽂혀있는 ‘한권으로 읽는 삼국유사’나 ‘사진으로 읽는 삼국유사’와 같은 책들도 나의 이러한 증상을 완화하는 데는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무지와 편견 속에서도 나를 감동으로 몰아넣는 것이 하나 있었으니 다음과 같은 사실이었다.

일연스님은 당시 승려로서 최고의 위치인 국사에 책봉되었지만 항상 연로하신 어머니가 계시는 인각사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그 뜻이 매우 간절했기에 거듭 청하자 충렬왕이 어쩔 수 없이 허락하였다. 스님이 내려온 이듬해 어머니는 96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한다.

이윤기 선생은 자신의 저서 <꽃아 꽃아 문 열어라/열림원> 서문에서 ‘일연 스님에게 고려의 신화 설화 시가 등의 유사(遺事)는 사기(史記)로써는 도달할 수 없는, 마침내 돌아가야 할 어머니의 품안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라고 말하고 있다. 선생은 삼국유사의 역사적 가치를 강조하고자 우리 신화를 ‘어머니’에 비유했을 터이지만 나에겐 왠지 어머니란 그 본래 의미에 더 애착이 갔다. 아니, 솔직히 고백컨데 나에게 인각사는 삼국유사의 산실이었다는 역사적인 의미보다는, 김견명(일연의 속명)이란 한 효성스런 아들이 자신의 만년을 노모와 함께 했다는 그 감동적인 사실이 더 눈물겨웠다. 그것은 아마 ‘당시 승려로서는 최고의 위치인 국사에 책봉되었지만 항상 연로하신 어머니가 계시는 인각사로 돌아가기를 원했다’는 일연의 전기와 자신의 직장까지 쉬어가며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병간호했던 큰형님의 지극한 효성이 중첩되어 빚어낸 결과이리라.
 

사실, 치매란 가까운 사물과 사람으로부터 시작해 결국 자신의 모든 것까지 깡그리 잊어버리는 무서운 병이다. 고모부님 또한 그러셨다. 화투를 치실 때 상대방의 패까지 고려하시던 분이, 어느 날부터인가 눈에 보이는 패에만 집착하더니 결국 같은 패도 맞추지 못하는 비극. 그 비극의 종점은 결국 자신의 아내와 작은 아들마저도 자신의 기억 속에서 완전히 지워버린 것이었다.
 

하지만 그 충격적인 상황 속에서도 가슴 뭉클한 감동이 하나 있었으니, 다름 아니라 큰 형님에 대한 잊지 않은 사랑이셨다. 그렇다. 고모부님은 자신의 큰 아들인 형님만은 이름과 얼굴, 그리고 그 단편적 기억까지도 끝까지 간직하고 계셨던 것이다. 고모부님은 임종 전까지 “정우야, 나의 아들아……”하시며 눈물 흘리셨다고 한다.
 

나는 인각사에만 오면 고모부님과의 추억과 더불어 수백 년 전 이곳에 살았다는 한 효성 깊은 아들이 떠오른다. 그렇다. 나에게 인각사는 위대한 역사가이자 저술가의 숨결이 깃든 곳도, 당대 최고의 고승이자 불교학자의 엄정함을 기리는 곳도 아니었다. 그곳은 78세의 아들이 77년을 홀로 산 95세의 노모를 모시며 1년 남짓 자신의 말년을 보낸 곳, 그리하여 이듬 해 자신의 노모를 하늘로 떠나보내고 그 불효를 통곡하며 남은 생을 그리워한 한 효성 깊은 아들이 살다간 곳이었다.
 

세상 그 어떤 풍경보다, 아니 그 어떤 예술보다 아름답고 감동적인 것은 역시 인간이란 사실을, 인간으로서 마땅히 지켜야할 삶의 기본을 이곳에서 다시 한번 돋을새김 한다. 

우광훈<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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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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