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진범의 피플] 노장 철학 대가 최진석 명예교수 "생각하는 능력이 없으면 시민이 아닌 백성의 역할밖에 못한다."

  • 조진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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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04-12 10:11  |  수정 2022-04-13 07:19  |  발행일 2022-04-13 제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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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명예교수가 인터뷰를 마치고 호접몽가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조진범 논설위원)


노장 철학의 대가 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명예교수가 대한민국의 선도 국가 도약을 역설했다. 지난 대선에서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와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의 단일화를 주장했던 최 교수는 "586 주사파들이 주도하는 특정 이념으로 국가를 관리하려는 태도로는 대한민국을 민주화 다음으로 건너가게 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정권교체는 대한민국이 도약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전에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라고 밝혔다. 국민통합에 대해선 "공화(共和) 정신을 회복해야 가능하다"며 "자기하고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을 수용할 태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통합 주장은 허구다. 미성숙한 진영 정치 단계로는 불가능하다"고 진단했다.
 

지난 8일 전남 함평을 찾았다. 노장 철학의 대가 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명예교수를 만나기 위해서다. 막 피어오르는 봄의 색깔들이 눈부셨다. 광주를 지나 도착한 함평은 작은 시골마을이었다. 그 한켠에 '호접몽가(蝴蝶夢家)'가 있다. 나비 꿈의 집이다. 최 교수가 세운 '새말 새몸짓 기본학교' 강의동이다. 호접몽은 중국 장자(莊子)의 제물론(齊物論)에 나오는 우화다. "내가 꿈에 나비가 된 것인지, 나비가 꿈에 내가 된 것인지 알 수 없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묘하다. 중국 베이징대에서 도가 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최 교수의 고향이 나비 축제로 유명한 함평이라니. 호접몽가는 윤경식 건축가의 작품이다. 지난 2020년 세계건축상 대상에 선정되기도 했다. 호접몽가 바로 뒤편에는 최 교수가 기거하는 '만허당(滿虛堂)'이 있다. 손님으로 가득 차거나, 손님이 없어 비어있는 집이라는 의미다. 가득함과 비어있음이 분리되지 않는다. 호접몽가에 도착할 즈음 최 교수도 서울에서 막 내려왔다. 최 교수는 서울과 함평을 오가며 인재를 양성하고 있다. 서울에서 한국능률협회와 공동으로 혜명원(慧明苑)이라는 강의토론프로그램을 진행하고, 호접몽가에서 수강생들을 대상으로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을 갖게 하려고 애를 쓴다. '최진석의 새말 새몸짓'이라는 유튜브 채널도 운영하고 있다.


최 교수는 철학자이자 교육자이지만, 정치가이기도 하다. 지난 대선 당시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의 상임 선대위원장을 맡아 활동했다. 정권교체를 위해 안 후보와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의 단일화를 주장해 화제를 모았다. 호남 출신으로서 쉽지 않은 일이었다. 최 교수는 "다급했고 또 옳은 길이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대한민국이 이제는 건너가야 된다는 생각이 매우 강하고, 대한민국을 한 단계 도약시키는 일을 하다가 가고 싶다"며 "정권교체는 대한민국이 도약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전에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라고 했다. 최 교수의 카카오톡 프로필에는 '이제는 건너가자'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이제는 건너가자'는 무슨 의미인가요.
"제가 생각할 때 우리나라는 지식수입국, 전술 국가 레벨로는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단계에 도달한 것 같아요. 다음 단계로 상승하지 못하면 극심한 정체와 혼란, 혹은 하강을 하거든요. '전술 국가 레벨을 넘어서서 전략 국가로 상승해야 한다, 추격 국가로의 삶을 선도 국가의 삶으로 도약시켜야 한다'는 상황 인식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도약하자, 전략 국가로 올라가자, 선도 국가로 올라서자라는 의미에서 이제는 건너가자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최 교수는 우리나라 기업인이 가장 깨어있다고 했다. "기업인이 공부도 제일 열심히 하고, 건너가려는 도전도 기업인들이 제일 활발하게 합니다. 우리나라를 이렇게 진화시키는데 기업이 많이 공헌을 했습니다." 최 교수는 기업인을 존중하지 않는 분위기에 대해선 "특정한 정치적 이념이 기업에 대한 편향된 시각을 조장하고 있다"고 정치권을 향해 직격탄을 날렸다.


▶국민의당 상임 선대위원장을 맡아 현실정치에 참여하셨는데요. 철학자가 바라본 정치판은 어떠했나요.
"사실 그 나라의 맨 얼굴은 정치입니다. 기업이나 BTS, 오징어게임이 아닙니다. 정치에 들어가기 전에는 '왜 이렇게 정치를 못하나' 여겼는데, 실제 보니까 이 정도 하는 것도 가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아직 생각하는 능력이 배양되지 않았기 때문에 진영에 갇혀 있습니다. 식민지를 겪으면서 근대를 맞이하는 바람에 시민으로 형성돼 있지 않고 아직도 백성의 단계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 많아요. 어떤 정치적 위치를 갖고 있는 시민이라도 생각하는 능력이 없으면 백성의 역할밖에 못합니다. 백성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대개 홍위병을 닮은 정치를 하게 되는데, 그렇게 이루어지는 판을 진영 정치라고 합니다."


▶진영 정치의 문제점이라면.
"진영에 빠지면 생각할 필요가 없어져요. 진영이 결정해 놓은 어떤 이념을 확대 재생산만 하면 되거든요. 진영에 빠지면 생각하는 능력이 급격히 퇴화되고, 이념이나 감정에 쉽게 빠지죠. 그래서 정치 행위가 종교 행위와 거의 구분이 안 돼요. 사유의 정치는 사유의 문제가 돼야 되는데 믿음의 문제로 제한돼 버리고 말죠. 실제 정치 안으로 들어가 보니까 우리가 시민으로 성장하지 못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진영 정치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배경은 무엇일까요.
"우리나라는 건국, 산업화, 민주화 단계로 오면서 생각하는 능력을 계속 성장시켜 왔습니다. 그런데 민주화 주도 세력이 특정 이념에 갇히는 바람에 생각하는 능력이 퇴화돼 버렸습니다. 생각한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반성한다는 뜻이거든요. 반성하는 능력이 없으면 믿음을 계속 강화하는 일밖에 할 수가 없어요. 믿음을 강화하니까 진영이 더 공고해지고, 진영이 공고해지니까 분열이나 갈등이 더 심화되는 것이죠. 생각하는 능력이 퇴화된 민주화 주도 세력이 국가 이익이나 국가의 진화보다 특정한 이념을 집행하는 것에 더 관심을 가져 버렸습니다."


▶건국, 산업화, 민주화 다음 단계는 어떤 것입니까.
"사실 민주화의 완성은 민주화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건너가면서 이뤄집니다. 민주화를 통해 어떤 사회, 어떤 나라를 만들었느냐가 민주화의 성공 여부를 결정합니다. 자칭 민주화 주도 세력은 오히려 민주나 자유에 대한 민감성을 후퇴시켰습니다. 저는 민주화 다음을 선진화라고 봅니다. 민주화 주도 세력들이 특정 이념에 갇히는 바람에 생각하는 능력이 떨어졌고, 민주화 다음의 비전을 만들지 못했습니다."


▶그럼 선진화를 주도할 세력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어떻게 선진화를 이룰 것이냐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모든 세력이 선진화의 단계로 건너가야 된다는 비전에 합의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합의를 이뤄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선진화 단계부터는 전략 국가, 선도 국가 레벨입니다. 우리는 아직 가본 적이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되는지도 잘 모릅니다. 1820년대를 대분기라고 하는데, 대분기 이후로 후진국이 중진국에 도달했다가 선도 국가로 올라선 사례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만큼 어려운데, 우리나라한테 축복이 왔습니다."


▶축복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기존의 패러다임이 일정하게 유지된다면 우리나라도 선도 국가로 올라가지 못하는 경로를 따를 수밖에 없을 텐데, 패러다임이 깨지면서 세상에 균열이 오고 있습니다. 우리한테는 위기처럼 보이기도 하고 찬스이기도 합니다. 기존의 패러다임이 4차 산업혁명이라는 간판을 달고 깨지고 있는 이때가 찬스입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중진국으로는 가장 강한 국력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선도 국가를 꿈꿔 본다면 지금이 절호의 찬스입니다."


▶선도 국가로 가기 위해 왜 정권교체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셨습니까.
"586 주사파들이 주도하고 있는 특정 이념으로 국가를 관리하려는 태도로는 대한민국을 민주화 다음으로 건너가게 할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586 주사파들에게 각성을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선도 국가는 자유스럽고 창의적이고 도전적인 생각으로만 가능한데, 특정 이념으로 지배되고 있는 상황에서는 그런 일들이 불가능하거든요."


▶막상 정권교체가 결정되고 어떤 생각이 들었습니까.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이 고향 친구들이었어요. 정치적 믿음이라는 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굉장히 감정적인 것이거든요."


▶더이상 정치에는 관여하지 않으실 건가요.
"떠난 것도 아니고, 안 떠난 것도 아닙니다. 사실 철학하고 정치는 생년월일이 같아요. 한날 한시에 태어났습니다. BC 6~7세기 경에 정치가 시작되고 철학이 시작됐거든요. 우리가 배우고 사유의 대상으로 삼는 철학 이론은 정치나 전쟁 속에서 태어났어요. 공자, 노자, 소크라테스, 플라톤 모두 정치인이자 철학자들이에요. 철학자가 갑자기 정치를 하나 이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철학자 입장에서 봤을 때는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지행합일(知行合日)의 한 형태입니다."
최 교수는 새 정부의 행보에 대해선 말을 아꼈다. 아직 인수위 과정이라 잘잘못을 평가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정권교체와 함께 국민통합이 시급한 과제로 떠올랐는데요. 어떻게 보시는지요.
"우리는 민주공화국인데, 민주라는 관념은 적극적으로 제기되는 반면 공화는 너무 오랫동안 잊혀져 있었어요. 시민이 주인이 된 정치 형태가 민주주의라면, 생각이 다른 사람들끼리 함께 사는 게 공화주의입니다. 공화 정신을 회복해야 통합이 됩니다. 자기하고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을 수용할 태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통합 주장은 허구예요. 지금의 미성숙한 진영 정치 단계로는 통합이 불가능합니다. 다만, 한 가지 유심히 봐야 될 것이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좌도 우도 없고, 전라도 경상도도 없고, 남자 여자도 없고 하나로 뭉칠 때가 있었어요. 바로 2002년 월드컵축구대회였습니다. 월드컵 4강이라는 꿈처럼, 한 단계 높은 아젠다를 합의하면 가능합니다. 저는 그것을 선진화나 선도 국가로 도약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죠. 현재의 좌우 대립으로 형성된 정치판에서 어느 한쪽에 더 무게 중심을 두고 통합을 하려고 하면 거의 불가능합니다."


▶지금이 기회가 될 수 있을까요.
"예측이나 판단보다 의지가 중요해요. 대한민국이 선도 국가로 될 수 있느냐, 없느냐를 예측하는 일보다는 선도 국가를 이루는 도전을 한번 해볼 것이냐, 안해 볼 것이냐와 같은 의지를 따지는 일이 더 의미가 있죠. 우리는 이제 우리에게 익숙한 레벨의 주제를 한 단계 넘어서야 해요. 통합이나 협치도 그것들을 통해 지금보다 한 단계 더 높은 선도 국가로 도약할 수 있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지, 통합이나 협치 자체의 중요성 때문에 강조되는 것은 아니죠."


▶우리나라 외교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국제 무대에서 외교 관계를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대한민국의 이익이에요. 절대 특정 이념에 치우쳐서 국익을 왜곡시키면 안됩니다. 외교 관계에서 가장 기본적으로 검토돼야 될 것이 있는데 상대국이 대한민국의 영토와 문화, 역사를 존중하는지의 여부와 욕심내는지의 여부입니다. 이 원칙이 지켜지지 않는 외교 관계는 건강하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영토와 역사, 문화를 경제적 이익과 바꾸기 시작하면 끝내 종속됩니다."


▶새말 새몸짓 기본학교에서는 어떤 주제로 강의를 하시는지요.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을 갖게 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교육 목표로 여깁니다. 생각하는 사람이 되려면 일단 자기 자신을 궁금해 해야 됩니다. 자신을 궁금해하는 몇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나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나는 도대체 어떻게 살다 가고 싶은가, 내가 죽기 전까지 완수해야 될 소명은 무엇인가'입니다. 이 다섯 가지 질문을 계속 해야 합니다. 인간이 인격적으로나 지적으로 성장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게 호기심이에요. 야생의 호기심을 어떻게 다시 회복시키느냐, 어떻게 다시 키워주느냐 하는 것이 교육의 중요한 주제가 돼야 합니다."


▶시민의 역할을 하기 위해,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을 키우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합니까.
"먼저 인생이 짧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또 특정한 이념의 수행자가 아니라 자기만의 삶의 고유한 신화를 완성하려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노예적 삶이 무엇인지 자유로운 삶이 무엇인지 계속 자기 자신한테 질문도 해야 합니다. 마음의 크기도 키워야 합니다. 진영에 빠지면 자잘해집니다."
<논설위원 jjcho@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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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함평군 대동명 향교리에 위치한 호접몽가.

■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명예교수는 1959년생으로 광주 대동고를 졸업했다. 서강대 철학과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 중국 베이징대 대학원에서 장자 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8년부터 서강대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다 2017년 서강대를 떠났다. 정년이 7년이나 남은 상태였다. 대학에서 최 교수를 붙잡기 위해 무급휴직을 주며 다시 생각해 보라고 했으나, 홀연히 야생으로 나섰다. 당시 최 교수는 한 언론 인터뷰에서 "학생들에게 '편안한 데 머물지 말고 경계에 서서 불안을 감당하는 자가 돼라'고 했는데, 학교를 떠남으로써 비로소 언행일치를 할 수 있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최 교수는 '스타 철학자'다. 2015년 창의적 인재 양성 교육기관인 건명원의 초대 원장을 맡아 대중들에게 인문학을 강의했다. 또 '현대철학자, 노자'라는 주제로 EBS인문학 특강을 진행했다. 2020년 사단법인 새말 새몸짓을 설립해 교육 활동을 하고 있다. 호남 출신으로 문재인 정부를 비판해 화제를 모았다. '5·18 왜곡처벌법'에 항의하는 '나는 5·18을 왜곡한다'는 시(詩)를 발표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최진석의 대한민국 읽기' '탁월한 사유의 시선' '나 홀로 읽는 도덕경' '경계에 흐르다' '생각하는 힘, 노자 인문학' '나는 누구인가' '인간이 그리는 무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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