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식량 시스템 재편 속 한국의 생존 방안은?…곡물 수입원 다변화와 외교협상 통한 한국기업 지원 급선무

  • 구경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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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10-03 15:53  |  수정 2022-10-04 09:43  |  발행일 2022-10-03
창간 77주년 영남일보-한국외대 국제지역연구센터 공동기획
[한국의 경제 안보를 진단한다] (4)유례없는 식량위기 직면한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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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19일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남부지역의 광활한 평야에서 밀이 자라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비옥한 토지를 이용해 밀과 옥수수를 생산하는 세계 5대 곡창이다. 러시아 침공 이후 흑해 연안 수출항 이용이 불가능해지면서 우크라이나에서 지난해 재배된 밀과 옥수수의 재고분과 올해 생산분은 육로를 통해 수출해야 할 상황에 처하기도 했다. 연합뉴스
동북아시아가 경제안보 시대의 격랑에 휘말렸다. 특히, 미중 경제 디커플링의 심화, 코로나 19 팬데믹의 여파와 러시아-우크라이나 사태가 중첩되면서 에너지, 원자재 가격 급등과 반도체 생산에 필요한 핵심원료의 공급 불안정 리스크가 확대되고 있는 실정이다.

영남일보는 한국외대 국제지역연구센터 HK+국가전략사업단과 함께 여섯 차례에 걸쳐 현재의 경제안보 위기를 진단하고, 해결책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은 경제안보를 국가와 국민의 생존을 위태롭게 하는 외부의 유무형 경제적 충격에 대한 선제적 방어라고 정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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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외국어대학교 HK+국가전략사업단 김도훈 연구교수.


◆유례없는 식량안보 불안
2021년 미국, 캐나다 등 주요 농산물 수출국들이 폭염 등 이상 기후로 농작물의 수확에 어려움을 겪으며, 상승하기 시작한 세계 곡물 가격이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및 각국의 식량안보 불안 증대와 맞물려 유례없는 수준으로 급등하고 있다.

그 결과 식량안보는 국제정치의 가장 중요한 화두로 떠올랐다.

인도, 튀르키예, 인도네시아 등 최소 23개 국가가 자국의 식량 공급 안정을 위해 밀, 옥수수 등 곡류부터 해바라기유, 팜유 등 식물성 유지와 육류까지 다양한 품목의 금수조치를 단행했고, 이는 다시 전 세계의 식량위기를 심화시키는 악순환으로 이어졌다.

유엔 식량농업기구(FAO)에서 발표하는 세계 식량가격지수(Food Price Index)는 과거 가격 폭등 여파가 가장 심각했던 2007~2008년과 2011~2012년 글로벌 식량위기의 수준을 넘어섰다.


러시아·중국·브라질·인도 등
세계 식량체계 영향력 넓혀가
美, 최대수출국 지위 이미 내줘

한국 곡물자급률 21.2% 불과해
해외식량기지사업 사실상 실패
농업수출국과 외교협력 불가피
이념 대립 등과 분리 추진돼야


◆브릭스 국가들의 부상
현재 발생하고 있는 식량위기는 지난 두 차례의 세계 식량 위기와는 다른 배경과 구조 하에서 발생하고 있다. 기존의 식량체계는 주요 농산물의 수출이 미국과 서유럽, 케언즈 (14개 주요 농산물 수출국)그룹에 집중돼 있었으며, 소수의 미국과 유럽의 농업기업들이 글로벌 식량 공급 사슬을 독점하고 있었다.

따라서, 식량위기의 직간접적 원인과 해결 방안 모두 소수의 선진국에 달려있는 구조로 형성돼 있었다. 하지만 201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글로벌 식량 생산 및 무역구조는 서서히 재편되기 시작했다.

이 중 가장 두드러진 현상은 러시아, 중국, 브라질 등 브릭스(BRICS) 국가들의 부상이다. 브릭스 국가들은 점차 세계 식량 생산, 무역, 소비 구조에서 그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러시아, 세계 최대 식량 생산국 선언
우선, 상당 부분의 식량을 해외 시장으로부터의 수입에 의존하던 러시아는 2012년 '농업 발전과 농산물 규제를 위한 정책 프로그램 (2013~2020)'을 채택하고, 모든 주요 곡물 생산의 완전독립과 세계 최대의 식량생산국이 될 것을 선언했다.

이어서 발생한 2014년의 크림반도 병합과 대서방 금수조치는 러시아의 농업진흥계획을 추동하는 기폭제로 작용했고, 러시아의 수입원 변화 및 수입량 감소로 이어져 러시아의 식량 생산 증대와 자급 정책 목표에 기여했다.

이후, 러시아의 궁극적인 목표는 글로벌 식량 체계에서 일정 수준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수출국의 지위 확보로 발전했다.

2018년 5월 4기 취임에 성공한 푸틴 대통령은 향후 6년간의 국정과제와 세부 목표를 담은 새 '5월 대통령령(May Decrees)'에서 2017년 210억 달러를 기록한 농산물 수출액을 2024년까지 두 배 수준인 450억 달러로 증대시키겠다고 천명했다.

정부의 진흥 계획에 힘입어 러시아의 밀, 보리, 옥수수, 해바라기유 등의 생산 및 수출량이 크게 증대됐다. 2016년에는 미국을 제치고 세계 최대의 밀 수출국이 되었으며, 2020년 기준 전 세계 밀 수출량의 18.8%를 차지하고 있다.

◆중국, 해외투자로 글로벌 가치사슬 장악
러시아가 자국의 생산량 증대를 통해 영향력을 확대했다면, 중국은 공격적인 해외 투자를 통해 가치사슬을 장악하는 방식으로 글로벌 식량 시스템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중국 정부는 2007년 '중앙 1호 문건'에서 농업 분야의 '저우추취(走出去·해외 진출)' 전략 강화를 명시한 이래로 중국 기업들의 해외 인수·합병(M&A)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중국의 국영기업과 민영기업들은 스미스필드(Smithfield, 미국), 니데라(Nidera, 네덜란드), 콤포(Compo, 독일) 등 세계 각국의 농업, 식품 가공 기업들을 차례로 인수했으며, 2016년에는 세계 최대 농화학 기업이자 3위 종자 기업인 신젠타(Syngenta, 스위스)를 인수했다.

중량그룹(COFCO), 신젠타그룹, 베이다황그룹, 뉴호프그룹 등 중국의 농업 기업들은 농약, 종자, 비료, 농산물 무역, 가공 등 가치사슬 전반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미국의 시장 지배력 약화
2022년 현재, 세계 종자 및 농화학 산업은 대대적인 인수·합병과 재분할 과정을 거쳐 미국, 유럽, 중국의 3강 체재로 재편됐다.

인도는 2012년 세계 최대의 쌀 수출국 자리를 탈환한 이후 압도적인 점유율을 보이며 영향력을 공고히 하는 동시에, 세계 2위 밀 생산국으로서도 세계 식량 무역 체계에 재편입하려는 노력을 보이고 있다.

일본의 해외직접투자와 개발 원조 등을 기반으로 꾸준히 대두 생산을 늘려온 브라질 역시 2017년 미국을 제치고 세계 최대의 대두 수출국으로 자리 잡았으며, 2020년에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옥수수를 수출하는 국가가 됐다.

그 결과 오랜 기간 밀, 옥수수, 대두 등 주요 품목의 최대 수출국으로서 막강한 시장지배력을 발휘했던 미국은 그 지위를 러시아, 브라질 등 국가에 양보해야만 했다. 그리고 이러한 추세는 중국의 일대일로 추진, 미중 무역전쟁과 같은 국제정치적 요인들을 계기로 한층 더 심화되고 있다.

브릭스 국가들은 2018년 이후 상호 간의 농업협력을 강화하고 있으며, 2022년 6월 개최된 제12차 브릭스 농업장관회의에서는 '제12차 브릭스 농업장관 공동선언'과 '브릭스 식량안보 협력 전략'을 채택하고 회원국과 세계의 식량안보를 위한 긴밀한 협력을 약속했다.

 


◆한국 곡물자급률 사상 최저
격변하는 글로벌 식량 시스템 속에서 한국의 식량안보는 전례없는 위기를 맞고 있다. 2020년 농촌경제연구원이 발표한 '식품수급표'에 따르면 2019년 한국의 곡물자급률은 21.2%로 사상 최저치를 기록했다.

90% 이상을 유지하던 쌀의 자급률은 82.3%로 하락했고, 밀과 옥수수의 자급률은 각각 0.5%, 0.7%로 사실상 국내 소비량 전부를 해외 시장에 의존하고 있는 셈이다.

◆한국 해외식량기지 건설 사업 실패 원인은?
게다가 2007년 글로벌 식량위기 이후 '해외농업개발 10개년 계획' 수립과 함께 추진한 해외식량기지 건설 사업은 사실상 실패했다. 이는 크게 두 측면에서 나타난다.

첫째, 상당 규모의 정부 자금이 투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국내 반입량이 미미해 실질적으로 한국의 식량안보 강화에 큰 도움을 주지 못했다.

둘째, 한국 정부와 기업이 추진한 토지 매매·임대를 통한 곡물생산계획은 현지 생태계와 농업 생산구조를 파괴하는 '토지수탈(Land grab)'로 인식되며 한국의 국제적 위상을 훼손하는 것은 물론, 한국 정부와 기업들의 해외직접투자 활동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식량안보, 경제적 관점에서 벗어나야
이러한 측면에서 보았을 때 식량안보를 위한 해외농업투자 및 개발 사업은 투자 유치국의 정책, 기업 활동, 농업 생산자와 조화를 이뤄 현지의 생태계와 생산구조를 파괴하지 않는다는 것이 전제돼야 한다.

다시 말해, 식량안보 목적의 해외직접투자 및 개발은 단순히 경제적 관점에서 바라볼 것이 아니라, 외교적 정책의 일환으로 추진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식량안보 정책의 궁극적 목표는 국가 차원의 안정적 식량수급이지만, 동시에 해당 정책이 다른 국가와 글로벌 식량 시스템에 미칠 영향을 고려해야 한다. 이를 위해 한국의 식량안보 정책은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단순히 기업 투자를 중심으로 '해외식량기지'를 건설해 생산한 식량을 반입하는 일차원적 정책에서 벗어나, 여러 농업수출국과의 외교적 차원의 협력관계를 강화하고 수입선을 다변화해야 한다.  


여느 외교정책과 마찬가지로 특정 국가에 대한 과도한 의존이나 정치, 군사적 동맹 관계를 통해서만 해결하고자 할 것이 아니라 보다 유연한 접근법이 요구되는 것이다.

◆식량안보, 정치·이념 대립과 분리해야
앞서 언급한 것처럼 중국, 브라질, 러시아 등 국가들이 글로벌 식량 시스템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영향력 강화는 거스를 수 없는 추세가 됐으며, 이들 국가와의 협력은 불가피하다.

일례로 유럽연합은 2019년 이래로 중국의 대만, 신장(新疆), 인권문제, 대러시아 제재 등의 이슈로 정치적 대립을 지속했지만, 식량안보와 관련해서는 지난 7월 19일 EU-중국 고위급회담에서 비료 수출 확대를 골자로 하는 공동대응에 합의하는 등 글로벌 거버넌스 측면의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와 전쟁 중인 러시아 역시 2022년 7월 우크라이나, 튀르키예, 유엔과의 4자협상으로 흑해를 통한 우크라이나 곡물 수출 재개를 위한 곡물 운송 조정센터 설립에 합의했다.

이처럼 식량안보는 한 국가와 국민들의 기본권과 직결되는 만큼 국제정치적 갈등이나 이념적 대립과 분리하여 추진돼야 하며, 한국의 식량안보 전략 역시 같은 방향성을 가져야 한다.

◆외교 협상 통한 한국 기업 지원 급선무
따라서 한국 정부는 먼저, 해외농업투자 대상국과의 외교적 협력을 통해 기 추진된 해외개발 및 국가조달의 단점을 보완해야 한다. 러시아, 브라질, 우크라이나, 중국 등은 '해외식량기지' 대상국으로 한국 기업이 가장 많이 진출해있는 국가들이다.

롯데상사, 포스코 인터내셔널 등 여러 기업이 현지에서 곡물의 생산, 저장, 유통 등 사업을 전개하고 있지만, 해당 국가들의 수출제한 정책은 현지에서 생산된 농산물의 국내 반입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 중 하나이다.

하지만 이는 정부 간의 외교적 협상을 통해 해결 방안을 모색할 수 있다. 수출제한의 예외 적용, 위기 시 우선수출국 지정, 곡물 스와핑 협정 체결 등 다양한 방식을 통해 식량 수급의 안정성을 확보해야한다.

둘째, 밀, 옥수수, 대두 등 주요 식량 수입원의 다변화가 필요하다. 다변화에는 식량 자원을 수입하는 국가의 다변화 뿐만 아니라, 농산물들을 저장, 유통, 무역하는 다국적 기업들의 다변화도 포함된다.

◆한국 식량 수입, 소수 국가에 집중
아울러 현재 한국의 식량 수입은 미국, 캐나다, 호주 등 소수의 국가에 집중돼 있는 기형적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수입 곡물의 조달 역시 80% 가량을 ADM, 카길 등 소수의 미국 및 유럽 기업에 의존하고 있다.

따라서 기존의 글로벌 식량 시스템보다 한층 더 통합된 가치 사슬 침투를 통해 신젠타, COFCO와 같은 농업기업들과의 협력을 강화하는 동시에 곡물 수입원을 다양화하고, 외교적인 협력을 모색하는 유연한 식량안보 전략 추진이 필요하다.

구경모기자 chosim34@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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