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계산된 삶…자아를 갖게 된 시뮬런트, 인간일까 비인간일까

  • 백승운
  • |
  • 입력 2022-10-28  |  수정 2022-10-28 07:37  |  발행일 2022-10-28 제14면
"명령 거역하면 기억은 리셋된다"

가까운 미래 복제인간 영혼 통해

비정한 사회의 모순과 저항 그려

2022102701000835700034701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는 어디까지일까? 만약 자유의지를 가진 복제인간이 있다면 어떨까?

이 질문은 필립 K. 딕의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에서부터 가즈오 이시구로의 '나를 보내지마'에 이르기까지 SF 작가와 팬들이 가장 몰두하고 열광하는 주제 중 하나다. 이 책 역시 기억마저 통제된 디스토피아에서 자신의 '계산된 삶'과 맞서는 복제인간의 이야기를 다룬 SF다. 가디언 선정 최고의 SF 작가로 선정된 저자는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에 대한 질문과 해답을 '근미래의 사무실'에서 찾는다.

주인공 제이나는 시뮬런트다. 시뮬런트들은 효율적인 업무 처리를 위해 설계된 복제인간이다. 인간의 추한 부분만을 조합해 창조한 프랑켄슈타인과 달리 인간의 아름다운 유전자를 조합해 창조한 새로운 생명체다. 하지만 기업의 화이트칼라 직군에 임대하기 위해 설계됐을 뿐 감정은 철저히 통제된다. 자신과 같은 계급의 시뮬런트가 아닌 인간과의 친교도 철저하게 금지되어 있다.

2022102701000835700034702
앤 차녹 지음/김창규 옮김 허블/384쪽/1만7천원

회사는 동선을 비롯한 모든 자유를 침해하고 있지만, 제이나는 회사가 허가한 경계 안팎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들며 자신만의 비밀 정원을 가꾸어 나간다. 회사가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은밀하게 출퇴근 동선을 조정한다. 고양이를 기르는 동료를 따라 숙소에서 몰래 곤충을 기른다. 복제인간 직원은 갈 수 없는 인간들만의 레스토랑 메뉴를 궁금해하기도 한다.

그러던 중 한 남자가 제이나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아카이브실의 인간 직원 데이브다. 그는 옛 문명의 유산 중 하나인 종이책과 내려 마시는 커피를 즐기는 법을 제이나가 스스로 배울 수 있게 해준다. 제이나는 보통 인간들처럼 자신만의 취향을 형성해 가는 동시에 데이브와 깊은 사랑에 빠진다. 그러면서 인간의 기호와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이 '기억'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체외에서 배양되어 태어날 때부터 성인의 모습이었지만 데이터로 조작된 유년의 기억을 가진 제이나. 그녀는 20~30여 년의 시간을 경유해 성인이 되는 자연스러운 인간의 생애 주기를 동경한다. 결국 그것은 그녀의 처지를 위태롭게 만든다. 인간과 다름없는 삶을 원한다는 것을 회사가 눈치채면 그녀의 기억은 모두 삭제된다.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기억이 리셋되어야 할 운명이다.

소설은 인간과 다름없는 능력을 지녔지만 관리되고 통제되는 시뮬런트들이 삶의 의미를 찾는 과정을 속도감 있게 그린다. 비정한 미래 사회의 모순에 저항할 수 있는 내면의 힘을 길러나가는 여정도 흥미롭다.

저자는 두 가지 버전의 서로 다른 결말을 준비해 놓았다. 독자의 선택에 따라 다른 엔딩이 가능한 인터랙티브 서사 구조다. 에필로그 마지막 장까지 손에 땀을 쥐는 흥미진진한 서사를 경험할 수 있다. 제이나가 회사와의 목숨을 건 게임에서 어떤 선택을 할지, 엔딩이 끝난 후 어떤 놀라운 부활이 기다리고 있는지는 전혀 새로운 방식의 결말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제이나의 일상을 통해 감정 자본주의, 매력노동으로 괴로움을 겪는 현대인의 '계산된 삶'도 엿볼 수 있다. 특히 주인공 제이나는 자율성을 통제당하는 곳에서 세계관 자체를 의심하는 문제적 자아다. 저자는 아서 C.클라크상 대담에서 '의심'을 가장 인간적인 본성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제이나를 통해 우리가 현재에 대해 의심하며 새로운 세계를 상상함으로써 더 나은 미래를 그려 볼 수도 있다. 백승운기자 swback@yeongnam.com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문화인기뉴스

영남일보TV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

영남일보TV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