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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업 객원논설위원 |
2020년 시작된 불황의 어두운 터널이 내년에도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최근 전경련이 매출 500대 기업을 대상으로 내년도 투자 계획을 조사한 결과, 응답 기업의 48%가 계획이 없거나, 아예 계획을 세우지 못했다고 답했다. 고금리·고물가·고환율 3고(高) 위기로 경영상황이 매우 어려운 만큼 허리띠를 바짝 졸라매는 형국이다.
경기침체는 소득 상위계층보다는 중하위층에 심각한 타격을 준다.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적 불평등 문제를 연구해 온 토마스 피케티는 자산소득을 가진 고소득층보다는 임금소득에 의존하는 중하위층 소득자가 실업과 임금감소로 불황에 더 취약할 수밖에 없고, 국민 총소득 중 자산소득 비중이 임금소득보다 더 큰 우리 같은 사회에서는 계층 간 격차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올해 월세 비율이 처음으로 40%를 돌파해 역대 최고치를 기록한 서울 아파트 임대차 거래도 무주택 저소득층의 어려움을 가중시키고 있다. 전세대출 규제와 가파른 금리 인상으로 전세금 대출이 어려워진 탓에 세입자가 월세방식을 강요받은 탓이 크고, 임대차보호법 개정과 종합부동산세 강화로 압박을 느끼는 임대인들도 전세금을 올릴 수밖에 없어 결과적으로, 가계부채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것이다. 이것이 지난 불황 3년간 우리나라의 계층 간 경제 불평등이 심화된 모습이고 내년에는 더 깊은 수렁에 빠져들 것으로 보인다.
요즘 많이 회자된 '초격차'는 기업들에겐 로망이지만 보통 사람들 간에는 재앙의 단어다. 시장을 뒤흔드는 기술혁신도 혁신역량이 모자라는 경쟁기업들에게는 공포 그 자체다. 1844년 카를 마르크스는 파리의 카페 드 라 레장스에서 엥겔스와 만나 맨체스터 방직공장의 참혹한 노동현장을 떠올리며 '계급 없는 사회'를 꿈꾸고, 영국으로 이주하여 공산주의 이론의 총화인 '자본론'을 집필한다. 당시 그가 집중 연구한 것은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이었다. 스미스가 노동생산성 향상을 위해 제시한 분업(division of labor)을 노동소외 이론으로 비판하고, 시장경쟁은 언제나 잉여 노동가치의 착취를 통해 자산계급이 무산계급을 지배하는 수단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1970년대 후반부터 정부규제를 배제하는 하이에크의 이론을 바탕으로 한 신자유주의는 영국을 비롯한 서방세계에 확산되고, 이념 폐쇄적이었던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를 겪으며 승리감에 도취되기에 이른다.
하지만 자유 시장경제를 보완하는 취약계층 보호와 사회복지 지출이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 이후 전 세계적으로 줄어들고 소득 불평등이 악화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자유 시장경제체제가 붕괴되지 않고 존속한 것은, 상황에 따라 정부개입에 의한 유효수요 창출을 인정하는 케인즈주의와 사회주의적 정책 요소의 도입으로 체제의 개방성을 유지한 탓이 크다. 이 점은 '포용적 정치제도'를 국가번영의 조건으로 제시한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의 저자 대런 애쓰모글루의 통찰과 일관성이 있다.
이것이 지금 우리나라에서 불평등 문제 해결이 중요한 이유의 역사적 배경이다. 국가장학금을 신청한 서울대 신입생 중 부모의 월 소득 인정금액이 9분위(949만원) 이상인 고소득 가정 출신이 2017년 43%에서 2020년 63%로 크게 높아졌고, 의과대학이나 로스쿨도 마찬가지였다. '고장 난 사회적 엘리베이터'가 수저계급론을 낳고 소득 불평등이 기회의 불평등으로 고착되는 현상이 아닌지 정말 우려스럽다. 지금의 삶이 고통스러워도 미래의 희망이 있다면 꿋꿋이 이겨냈던 것이 우리의 과거이고 우리 사회의 잠재력이다.
권업 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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