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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현 경북대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 |
어릴 적 동무들과 모래밭에 모여 왼손을 묻고 그 위에 모래를 덮어 두꺼비집을 짓곤 했다.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게 새집 다오!" 이 노래를 부르며 집을 지었다 부수고, 지었다 부수곤 했다. 나중에 심훈의 '상록수'(1935)를 읽다 보니 이 가사가 나왔다. 그리고 가사의 뒷부분이 "두껍아 두껍아 물 길어 오너라 너희 집 지어 줄게/ 두껍아 두껍아 너희 집에 불났다 쇠고랑 가지고 뚤레뚤레 오너라"라는 것을 최근 알았다. 언제 누가 지었는지 모르지만, 많이도 불렀다. '상록수'의 주인공 영신이 모래로 성을 쌓고 지난 시절을 추억하며 부르던 그 노래대로 말이다.
또 하루는 사랑방에 마을 어른들이 모였는데, 한 분이 "글쎄 그 두꺼비란 놈이 말이지. 새끼를 배면 구렁이한테 가서 계속해서 대든단 말이야. 부아가 난 구렁이는 결국 두꺼빌 잡어먹어 버려. 그러면 구렁이는 죽고 그 몸속에서 두꺼비 새끼가 새까맣게 쏟아진단 말이야"라는 이야기를 했다. 나는 오래도록 그 이야기를 잊지 못했다. 그런데 김동리 문학을 읽다가 '두꺼비'를 만났다.
"두꺼비를 잡아먹은 능구렁이는 죽고, 그 죽은 마디마다 두꺼비 새끼가 난다는 이야기를 듣던 날 나는 첨으로 각혈이란 것을 했다."
이것은 김동리의 '두꺼비'의 첫 부분이다. 김동리는 처음 발표한 '두꺼비'(1939)가 검열로 사라진 줄 알고 다시 이 작품을 썼다고 한다. 그는 두꺼비 설화를 전면화했다. 삼촌은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가산이라도 지킬 셈으로 부일 협력을 한다. 나는 비밀 독서 서클을 하다가 연루되어 검거되었지만, 삼촌 덕분에 방면되었다. 이후 쫓기는 동지를 보살피며 활동하지만, 또 다른 동지의 밀고(?)로 일제 형사에게 잡혀간다. "내 머릿속은 두꺼빌 잡아먹은 능구렁이의 죽은 뼈마디마다 두꺼비의 새끼가 난다던 강서방의 이야기로써만 가득 찬 채 종로서를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놓았다"라는 결말은 하나의 비유를 형성한다. 일제 형사(능구렁이)가 나(두꺼비)를 잡아가더라도 수많은 두꺼비가 생겨나 일제에 항거하리라는 것이다.
"두꺼비가 자기를 길러준 처녀를 위해, 처녀를 채 가려 온 구렁이에게 흑흑 독기를 내뿜어 대들보 같은 구렁이를 퉁 하고 천장에서 떨어뜨려 죽이고 자기도 기진해 죽었다."
황순원 역시 '두꺼비'(1946)를 썼다. 그는 작품의 말미에 처녀를 잡아가려는 구렁이에게 죽음으로 대항한 두꺼비 설화를 제시했다. 광복 후 귀국한 현세에게 김 장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집을 비워달라고 한다. 그런 그에게 두갑이는 집을 얻어주겠다고 하며 집을 사들이는 연극을 제안한다. 현세는 할 수 없이 연극에 참여하지만, 두갑이에게 이용만 당하고 집도 얻지 못한다. 집 문제 해결을 구실로 자신의 욕심만 채우는 두갑이와 집을 비우라고 독촉하는 김 장로의 독기를 느끼며 "현세는 가슴속 한가운데서 분명히, 나도 살아야 한다. 나도 살아야 한다는 부르짖음 소리를" 듣는다. 현세는 자신도 가족을 지키기 위해 김 장로에게 대항해야겠다고 생각한다. 전재민의 처절한 삶을 다룬 이 작품에서 작가는 가족의 '생존'을 위해서 두꺼비처럼 독기를 뿜을 수밖에 없는 현실을 그렸다.
어릴 적 기억에 남는 또 하나의 삽화가 있다. 여름날 마당에 멍석을 깔고 저녁을 먹노라면 커다란 두꺼비가 마당을 가로질러 나타났다. 어머니는 밥알이나 음식 일부를 던져 주었다. 두꺼비가 먹지 않아도 어머니는 지나가는 손님 대접하듯 매번 그렇게 했다. 당시 두꺼비는 늘 우리와 함께 살았다. 오영수는 '두꺼비'(1954)라는 수필에서 나와 비슷한 경험을 그려냈다. 두꺼비는 징그럽긴 해도 아주 정겨운 동물이 아니었나 싶다.
김주현 경북대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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