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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박집 죽림주간의 겨울 풍경, <죽림주간 제공> |
아침 일찍 예천행 버스를 탔다. 후배가 운영하는 한옥 민박집에 가는 길이다. 한옥스테이에 가겠노라고 친구들과 몇 달 전부터 벼르던 것이 오늘에야 성사된 것이다. 동대구에서 예천으로 가는 아침 버스에 탄 승객은 단 한 명뿐이었다. 감염병 대유행을 겪으며 알아채지도 못할 만큼 순식간에 지나가는 겨울이었다. 도시에서는 계절조차 바빴다. 모처럼의 여행을 앞두고 새벽까지 밀린 일들을 마무리하느라 지난 밤에 잠을 설쳤다. 창밖을 구경할 새도 없이 잠이 들었다.
오래되고 낡은 한옥을 고쳐서 여행자에게 숙소로 제공하는 것을 한옥스테이라고 부른다. IT업계에서 UX디자이너로 일하다가 회사를 그만두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선택한 것이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것이다. 후배는 십여 년 전부터 시골 초등학교 방과 후 교실 프로그램에서 교사로 봉사를 해왔는데, 그런 인연이 여기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서울에서 살던 삼십 대 청년이 시골에 내려와 숙박 서비스를 브랜딩 하는 일은 사람들의 이목을 끈다. 침묵하던 마을에 자동차와 젊은 사람들이 드나들기 시작했으니 반가운 일이다. 지방소멸이라는 섬뜩한 단어 앞에서는 더욱 그렇다.
버스가 속도를 늦추는가 싶더니 어느덧 예천 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예천은 처음 와 본 곳이다. 경북도청이 있는 안동에는 그나마 방문할 일이 있었지만, 바로 옆 예천에서는 이렇다 할 일이 생기지 않았다. 친구들을 만나기로 약속한 시간까지 30분 정도가 남았다. 작은 터미널 대합실에서 몸을 녹인다. 한쪽 구석에 마련된 수유실에는 먼지가 내려앉았다. 사용하는 사람이 있긴 한 걸까. 할머니 세 분과 매점 사장님이 큰 소리로 이야기를 나눈다. 어디를 가야 하는데 어떻게 갈지 그 방법을 상의하고 있었다. 똑같은 질문과 대답이 무한 반복 중이다. 묻는 사람도 답하는 사람도 듣기는 포기한 것 같았다. 결국 승강장에 버스가 들어오고 나서야 대화는 멈췄고, 답도 내려진 것 같다. 모두 서둘러 대합실을 빠져나갔다. 이곳에선 마을에서 마을로 이동하는 일이 무척 어려운 일임을 깨닫는다. 대합실에 방문하는 몇몇 사람들은 종이와 볼펜을 들고서 다음 날 버스 출발 시간을 확인하러 오기도 했다. 안내판에 써진 숫자를 믿기 어려운지 매표 직원에게 재차 확인한다. 우리는 스마트폰에 앱을 설치하고 일사천리로 표를 예매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종이와 볼펜을 들고 와서 버스 운행 시간을 받아 적고 돌아가는 사람들의 시대에 살고 있기도 하다. 중첩된 세계다.
대나무 숲 아래 마을에 위치한 한옥은 고요하다 못해 어딘가 외로워 보였다. 하지만 바쁜 일상을 떠나서 휴식을 원하는 사람들이 하루이틀 묵어가기에는 최적의 환경이었다. 집도 사람도 시간을 멈춘 곳. 잠시 즐길 수 있는 외로움이라면 그보다 더한 사치도 없을 것이다. 고양이 '림이'가 꼬리를 세우며 툇마루에서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준다. 집 담장을 허물어서 마을 전체가 앞마당이었다. 추수가 끝난 논밭이 서정적이기도 하고 을씨년스럽기도 하다.
저녁밥을 먹기 전에 삼십 여분 걸어 나가서 읍내를 산책했다. 사람이 보이지 않는 읍내였다. 식당, 다방, 학교 등은 한때 이곳이 제법 번화가였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친절한 초등학생들과 인사를 주고받았다. 전교생이 40여 명 정도라고 한다. 사람도 장소도 오래되어서 낡아가는 것을 막을 도리는 없지만, 그것은 이야기가 쌓여가는 과정이다. 이야기를 어떻게 발굴하고 맥락화해야 할까. 길을 걸으며 생각했다.
밤이 깊어지면서 함박눈이 내렸다. 외딴 시골 한옥집에서 맞는 하얀 눈은 12월의 정취를 더해 주었다. 한 해를 어루만져주듯이 눈은 더욱더 고즈넉하게 내렸다. 그날 우리는 로컬 브랜딩을 화두로 삼았다. 각자의 삶의 방식을 소신 있게 선택한 용기 있는 청년들에 대해 이야기 나눴다. 동시에 도시로 향할 수밖에 없는 경쟁 사회의 현실 또한 이야기 나눴다. 가끔 시골을 체험하는 우리와 매일같이 시골에서 생계를 꾸려가는 후배 사이에는 입장 차이가 있을 것이다.
최고의 삶이란 없다. 누군가의 부러움은 누군가에겐 반복되는 일상이고, 누군가의 일상은 누군가에겐 부러움이 되기도 한다. 각자의 삶이 그 자체로 멋지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우리는 하루하루 허상만 바라보게 된다. 이것을 잘 알면서도 허상을 벗어나기란 여간해서 쉽지 않다. 이야기는 꼬리를 물고, 돌고 돌아 결국 2022년에도 여전히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어서 안타깝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점점 더 세지는 눈발은 세상의 모든 소리를 삼켜버릴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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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완 (북디자이너·영남대 시각디자인학과 교수) |
'로컬'이라는 말을 자주 쓴다. 도시 재생에 이어 농촌 재생도 사업화되어간다. 인구가 줄어들고 의료 복지 인프라가 취약한 소도시와 시골 지역을 위한 정책은 중요하다. 인구가 많아야 병원이 생기는지, 병원이 생겨야 인구가 많아지는지는 쉽지 않은 문제지만, 아무튼 살고 있는 사람이 중심이 되는 정책이 필요하다. 그래서 이곳에 살고 있는 청년들을 재미있게 만들어 줄 궁리를 해야 한다. 동시에 꿈을 좇아 어딘가로 떠나는 청년들에게도 응원을 보내야 한다. 앞뒤 가리지 않고 청년을 붙잡아두려는 예산은 일종의 최면술과 같다. 도시와 시골이 물처럼 유연하게 흐를 수는 없을까. 기회는 사람이 많은 도시에도 있고, 시골 마을에도 있다는 것을 청년들은 증명해 보이고 있다.
디자인은 클라이언트를 돕는 일만은 아니다. 디자인은 스스로 필요성을 만들어낼 수 있다. 장소에서 이야기를 발굴하고 그 가치를 매력적으로 제시하는 것도 디자인이다. 시간이 쌓아놓은 이야기를 흩어지지 않도록 다루는 것도 디자인이다. 후배의 한옥집을 방문한 사람들이 떠오른다. 그들이 쓴 방명록을 보면서 이 장소가 주는 위로와 휴식이 특별하고 소중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연로하신 어머니와 이모 부부를 모시고 일주일 동안 머물다 간 40대 여성, 기념일을 자축하기 위해 방문한 레즈비언 커뮤니티 회원들, 도시 생활에 지쳐 멍 때리러 온 회사원, 결혼을 앞두고 프러포즈를 하러 온 연인, 그리고 대학 졸업 후 이십여 년 만에 한자리에 모인 나와 친구들. 시골의 민박집에서 사람들의 경험을 섬세하게 이끌어 내고 돕는 일은 일상과 비일상의 경계에서 만나는 가장 멋진 디자인이다.
북디자이너·영남대 시각디자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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