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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구라 컬렉션 중 전(傳) 금동반가사유상. |
걸음의 무게란 것은 사실 삶의 궤적에 다름 아니다. 인생사 모든 본말을 사필귀정(事必歸正), 인과응보(因果應報), 새옹지마(塞翁之馬) 등으로 반추하는 것도 그 맥락이다. 이것은 또 자신의 삶을 자신이 철저히 책임져야 한다는 뜻일 터. 누구나 단독자(單獨者)란 사실은 쓸쓸하고도 씁쓸하지만, 생멸(生滅)처럼 불변인 것이다. 해서 '내 걸음걸이가 근사하지 않을 때/ 내 기쁨은 필경/ 다른 사람한테는 괴로운 일일 것'이란 정현종의 시처럼 혹시 내가 나쁘게 걷고 있지는 않나 경계하며 무겁게 걸음을 떼는 아침이다.
금고형 받고 출셋길 막히자 조선으로
경부철 대구출장소로 발령 받았으나
업무보다 현지시찰하며 수많은 땅 수탈
엄청난 부 축적 후 고미술품 수집 집중
불법도굴로 경주 금관총 유물까지 갈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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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야차처럼 망국 조선을 도륙하고 유린한 자들이 있다. 철저히 나쁘게 걸은 자들이다. 그 악한들 중에는 파렴치하게도 선량한 조선 백성들은 꿈도 꾸지 않았던 조상의 무덤까지 파헤쳐 도굴을 감행한 자들이 있다. 그자들은 도자기, 불상, 불화, 서적, 황실 물품 등 눈에 띈 거의 모든 유물을 약탈해 갔다. 그중에서도 가장 악랄한 도굴꾼 3인방으로 꼽히는 것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가루베 지온(輕部慈恩), 오구라 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다.
그자들은 무소불위의 권력과 부패한 조선 관청의 묵인 그리고 돈에 눈이 먼 조선 부역자들을 이용하여 우리의 문화유산, 유물을 말 그대로 수탈해 일본으로 가져갔다. 이토 히로부미는 고려청자광(高麗靑瓷狂)이었고, 가루베 지온은 일본어 교사·고고학자로 위장한 도굴꾼으로 백제 고분, 특히 송산리 고분군 중 6호분을 도륙해 간 자다. 이들로 인해 조선은 이집트처럼 도굴이 일상화된 대난굴(大亂掘) 시대를 맞고 마는데, 그 중 오구라 다케노스케는 대구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연관성이 있어 나쁜 걸음의 주인공으로 삼는다.
오구라 다케노스케는 1870년 치바현 나리타시에서 태어났다. 도장을 운영하는 아버지에게 검술과 한학을 배우고 소학교를 나와 12살에 호쿠소에이칸 의숙에 입학해 영어를 배웠다. 메이지유신 이후 근대화를 지향하던 일본은 제국대학령을 공포하고 교육제도를 완성하던 시기라, 가업인 농사에 뜻이 없던 오구라는 도쿄제국대학의 법학부에 입학했다. 졸업 후 닛폰우선주식회사에 입사해 근무하던 중 아버지가 표면상 사장직을 맡았던 도쿄위생회사의 뇌물 수뢰사건을 맡아 변론을 하다가 위증죄로 금고형을 받아 감옥에 가게 된다.
이 사건으로 사실상 일본에서의 출셋길이 막힌 오구라는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후쿠자와 유키치, 일본 왕가, 군대와도 연결이 되는 처가의 막강한 인맥을 통해 당시 일본 하층민들에게 부귀영화를 가져다준 꿈의 개척지 조선으로 건너온다.
1904년 경부철도 대구출장소로 발령을 받은 오구라는 발령지 업무보다 현지 시찰을 하며 토지를 물색해 닥치는 대로 사들였다. 1905년부터는 아예 경부철도에서 나와 고리대금업을 하며 담보로 잡은 조선인들의 땅을 수탈에 가깝게 착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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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오구라가 대략 평당 3원에 매입한 토지는 1906년 대구 읍성 철거와 경부선 개통으로 100배 이상 상승했는데, 이는 조선총독부 등에 포진한 그의 인맥과 박작대기로 잘 알려진 친일파 박중양이 작당한 결과였다. 이 행태에 분개해 토지가옥증명규칙으로 경북도 관찰사 이용익이 강력히 단속하자 오구라와 일인들이 총독부를 등에 업고 그를 대구에서 쫓아내 버렸다.
토지 투기로 엄청난 부를 축적한 오구라는 그 후 일본으로 곡물을 담아 나를 가마니 제작회사, 남선전기, 북선전기(현재 한전의 전신)를 위시한 전기사업, 선남은행(상업은행의 전신) 등 금융업에도 뛰어들어 어마어마한 큰돈을 벌어들였다.
1920년대부터 조선의 전기왕으로 불리기 시작한 오구라는 차기 사업으로 고미술품 수집에 눈을 돌렸다. 이는 서양 열강 제국주의자들의 트로이, 투탕카멘, 실크로드 등 발굴에 자극을 받은 데 기인한 것이었다. 본디 '서구인과 동등한 일본인'과 달리 조선은 미개하며 조선인은 짐승처럼 다뤄야 한다는 망상에 젖어있던 오구라는 유물과 고미술품의 정당한 매입보다 처음부터 불법 도굴에 매진했다.
그도 그럴 것이 막강한 금권력을 가진 오구라를 관청은 묵인했으며, 초대 경주박물관장은 취미로 문화재를 연구하던 대서업자 모로가 히데오였고, 금품으로 무지한 조선인들을 도굴꾼으로 고용했으니 고령·창녕의 대가야 고분은 물론 경주 금관총 유물까지 싹 쓸어 담다시피 할 수 있었다.
늘 학술조사에 앞서 거의 도굴돼 온전한 부장품이 없던 영남 고분군으로 오구라가 대낮에 도굴꾼을 이끌고 다녔다는 증언도 있다. 물론 오구라는 어김없이 원형의 부장품들을 소유하고 있었고, 1929년 민간 소장품 유물 전시회에 버젓이 출품해 전시하기도 했다. 심지어 가야 고분을 도굴하면서 다이너마이트를 터뜨린 무분별한 행태와 출토지가 어디인 줄 모르는, 혹은 밝힐 수 없는 유물이라는 뜻으로 거의 '전(傳)' 자가 붙은 오구라 소장품으로 그의 만행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오구라의 천인공노할 이 행태에 이병학, 장직상, 장혁주, 이와세 시즈카 등이 적극 부역했고, 불편한 진실이지만 대구에서 이름만 대면 알만한 유명인사들도 숫자를 셀 수 없이 많이 연루되어 있다. 이후 근 30년에 걸쳐 광적으로 수집한 오구라의 유물은 고분 출토품을 비롯하여 불교문화재, 도자기, 목칠공예품, 금속공예품, 회화, 전적, 서예, 복식 등인데 그중 고종황제의 익선관과 을미사변 직후 명성황후의 처소에서 낭인들이 들고나왔다는 풍혈반은 우리의 피를 거꾸로 솟구치게 한다.
19세기 조선 왕실에 전래되었던 것으로 알려진 용봉문두정 투구와 두정 갑옷 그리고 16.3㎝의 작은 크기지만 절묘함을 간직한 금동반가사유상은 오구라 컬렉션의 가장 큰 자랑거리로 여기며, 도쿄국립박물관 한 모퉁이에는 지금도 5세기 창녕 고분군의 금동투조관모, 금동조익형관식, 금제태환식귀고리, 금제팔찌, 금동정강이보호대, 금동투조신발, 단룡문환두대도 등을 마치 숨겨놓은 듯 전시하고 있다. 그중 39점은 일본의 국가문화재로 지정해 놓고 있다.
오구라가 수탈해 간 유물을 공식적으로는 광복 후 챙겨가지 못한 것과 1964년 대구 동문동 집 마루 아래에서 발견된 것, 오구라의 아들이 도쿄국립박물관에 기증한 것 등 2천2백여 점으로 파악하지만, 개인적으로 처분했거나 계속 은닉 중인 유물을 포함하면 4천 점에 이를 것이란 추정도 있다.
1945년 일본으로 돌아간 오구라는 유물을 재단법인의 자산으로 바꾸고, 오구라컬렉션보존회 이사장으로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1964년 우리나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수집한 문화재 5천여 점 가운데 8할을 대구에 두고 온 것이 아쉽다. 오히려 반환을 받고 싶다'라고 뻔뻔하게 말한 직후 95세로 사망했다.
1965년 한일기본조약 체결 당시 우리나라는 오구라 컬렉션 반환을 강력히 요구했으나, 일본 정부는 민간소장품이라는 사유로 거부하여 현재까지 반환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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