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여행] 경남 거창 수승대…텅 빈 하늘 가로지르는 길이 240m 출렁다리…발 아래는 '한낮 은하수'

  • 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 |
  • 입력 2023-02-03 07:41  |  수정 2023-02-03 07:44  |  발행일 2023-02-03 제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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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렁다리 가운데에서 수승대 골짜기를 내다본다. 은하리 마을은 숲에 가려져 보이지 않고 수승대 물길만이 은하수처럼 흐른다.
깨끗한 마을이다. 겨울이라 조용한 마을이기도 하다. 지금은 식당과 펜션과 민박집과 편의점 등등 갖은 편의시설이 있는 관광지이나 간판 없는 돌담집들이 있고, 말끔히 정돈된 집터가 있고, 가지런히 가꾸어진 텃밭이 있고, 또 재(齋)가 있고, 정(亭)이 있고, 서원이 있으니 오래전부터 이 땅에 애정을 가진 사람들이 살아온 마을일 게다. 마을 앞에는 화강암 흰 바위들이 곱게 늙어 계곡을 이룬다. 계곡의 볕받이에는 차가운 냇물이 분분히 흘러 얕은 웅덩이가 되었다가 깊은 소가 되었다가 하는데, 바위틈 사이마다 흩뿌려진 응달에는 얼어붙은 계류와 쌓인 눈이 억만 개의 조각으로 빛나 골짜기는 적연히 한낮의 은하수다.

덕유산 자락의 남쪽 산줄기 둘러싸인 골짝
백제서 신라 가는 사신 송별했다 해 '수송대'
퇴계 '근심 잊을 만큼 빼어나' 수승대로 불러


◆은하리 또는 어나리의 수승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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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승대 너럭바위와 거북바위. 거북바위는 퇴계의 시를 비롯하여 옛 풍류가들의 시로 가득하다. 너럭바위의 물길 위에 세필짐 각자가 있다.
골짜기는 덕유산 자락의 남쪽에, 호음산에서 부종산으로 이어지는 동쪽 산줄기와 매봉에서 성령산으로 이어지는 서쪽 산줄기 사이에 넉넉히 펼쳐져 있다. 골짜기의 마을은 거창 위천면 황산리에 속해 있는데 냇물과 냇가의 흰 돌이 은하수 같아 예부터 은하리(銀洞里)라 했다. 서원 아래의 마을이라 어나리(원하리·院下里)라고도 했고, 물고기를 잡는 곳이라 어천(漁川)이라고도 불렀다. 계곡에는 평평하고 아주 넓은 너럭바위가 있다. 삼국이 대립하던 옛날, 이 바위에서 백제에서 신라로 가는 사신을 송별했다 하여 '수송대(愁送臺)'라 했다 한다. '돌아오지 못할 것을 근심하였다'는 뜻이다.

마을 안 은하리길을 따라 계곡을 거슬러 오른다. 황산리는 이 고장에서 널리 알려진 거창신씨 집성촌인데 중종 때 선비인 요수(樂水) 신권(愼權)은 그들이 자랑스러워하는 조상 가운데 한 사람이다. 일찍이 벼슬길을 포기한 그는 이 골짜기에 은거해 학문에 힘썼다고 한다. 널찍한 계곡에 가로놓인 주홍빛 현수교를 지나 조금 오르면 계류 가운데 작은 섬처럼 자리한 솔숲 너머로 수송대 너럭바위가 환하다. 신권은 너럭바위 앞 큰 거북 모양의 바위를 '암구대(岩龜臺)'라 이름 지었고 그 위에 단(壇)을 쌓아 나무를 심었다. 아래로는 바윗돌을 듬성듬성 놓아 흐르는 물을 막고 '구연(龜淵)'이라 불렀다. 중종 35년인 1540년 즈음에는 암구대 옆 물가에 '구연재'를 지어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리고 마을을 아예 '구연동'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2년 뒤에는 냇물 건너 언덕에 아담한 정자를 세우고 자신의 호를 따 '요수정'이라는 편액을 했다. '요수'란 '슬기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한다'는 뜻으로 논어의 '지자요수(知者樂水)'에서 따온 것이다.

그즈음 신권은 퇴계 이황으로부터 찾아오겠다는 전갈을 받는다. 그러나 한양으로 급히 떠나야 했던 퇴계는 걸음 대신 편지 한 통을 보낸다. '수승(搜勝)이라 대 이름 새로 바꾸니… 뒷날 한 동이 술을 안고 가/ 큰 붓 잡아 구름 벼랑에 시를 쓰리다.' 퇴계는 이 아름다운 골짜기에 '수승'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주었다. '근심을 잊을 만큼 빼어나다'는 의미다. 1543년 이른 봄날이었다고 한다. 시는 힘이 세고, 퇴계라는 이름은 더욱 힘이 세다. 그 이름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은하리 계곡 전체를 이르는 이름이 되었다.

수승대 계곡 혹은 수승대 국민관광지는 겨울철 눈썰매 타고 여름철 물놀이 즐기는 피서지로 유명하다. 신권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구연재는 1694년에 '구연서원'이 되었다. 서원 입구에 '관수루(觀水樓)'라 적힌 문루가 장대히 섰다. 물을 보는 누각, 관수루. 맹자는 물을 보는 데에도 방법이 있다고 했는데, '반드시 그 물의 흐름을 봐야 한다. 흐르는 물은 웅덩이를 채우지 않고는 다음으로 흐르지 않는다'고 했다. 관수루에서 수승대를 본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수승대에 올라 맑은 웃음으로 서성이다 훌쩍 떠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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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수 신권의 정자 요수정. 요수는 논어의 '지자요수'에서 따온 것으로 '슬기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 한다'는 뜻이다.
◆은하수 건너 다시 수승대

구연서원을 지나면 야자매트가 깔린 현대의 길이 계곡을 따라 오른다. 고개를 들면 이마 위 높고 높은 허공에 출렁다리가 걸려 있다. 매트 길을 지나 128개의 계단이 있는 데크 산책로를 시나브로 오르면 도로다. 길을 건너면 부종산을 오르는 계단이 시작된다. 단이 높은 계단을 202개 정도 오르면 출렁다리의 동단이다. 숫자에 자신은 없다. 헉헉대느라.

출렁다리는 지난해 10월에 완공된 것으로 지상 50m 높이에 지주 없이 걸린 현수교다. 길이는 240m로 제법 길다. 절지동물 같은 다리다. 지네의 등을 타고 꿀렁꿀렁 전진하는 것 같다. 다리 가운데에서 수승대 골짜기를 내다본다. 너럭바위도 거북바위도 요원하여 희미하고, 정자도 서원도 식당도 민박도 숲으로 은거했다. 먼 산은 먼 것을 보고, 물길은 은하수처럼 흐르고, 37번 국도는 제 갈 길을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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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승대 출렁다리. 지난해 10월에 완공된 것으로 지상 50m 높이에 지주 없이 걸린 현수교다. 길이는 240m로 성령산과 부종산을 연결한다.
출렁다리의 서단은 성령산이다. 산정으로 향하는 등산길도 있고 계곡으로 곧장 내려가는 계단 길도 있다. 단의 높이가 편안한 276개의 계단을 내려온다. 이 숫자에도 자신은 없다. 두리번대느라. 계단을 내려오면 계곡 옆으로 숲길이 좁게 이어진다. 안전을 위해 박아 놓은 두툼한 나무 말뚝에 이끼가 앉았다. 햇빛이 빗살무늬로 내려앉은 자리에는 이끼꽃이 피었다. 간간이 새가 울었고 물소리는 가까웠다가 멀어졌다. 거창신씨의 무덤 두 기를 지나면 곧 요수정의 옆모습이 솔숲 사이로 보인다.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는 환한 얼굴의 거북바위가 있다. 둘은 사이가 좋다. 요수정 뒤편에는 구연재를 지은 이듬해인 1541년에 요수 선생이 직접 지었다는 담장 높은 '함양재(涵養齋)'가 있고, 그 아래에 원각사 절집이 있다. 원각사는 60년대 지해스님이 수승대 골짜기 토굴에서 부처님의 계시를 받아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기도를 하면 소원을 이룬다 하여 불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요수정에서 구연교라 새겨진 통통한 무지개다리를 건너 너럭바위에 오른다. 희디희고 넓디넓다. 그 너른 너럭바위의 단 차에 기대어 좁고 곧은 물길이 나 있다. 물은 당당하게 흘러 거북바위 앞으로 거침없이 쏟아졌다가 구연으로 잠긴다. 바위에 '세필짐(洗筆)'이라는 각자가 있다. '흐르는 물에 붓을 씻는다'는 말이다. 그 곁에는 물방울 모양의 얕은 웅덩이가 있고 그 위에 '연반석(硯磐石)'이라는 이름이 단아한 필체로 새겨져 있다. '먹 가는 돌'이란 뜻이다. 연반석에 먹 갈아 글 쓰고 세필짐에서 붓을 씻었다는 얘기다. 동그란 바위 구멍에는 막걸리 한 말을 넣어 놓고 장주갑(藏酒岬)이라 부르면서 글이 좋을 때마다 꿀꺽꿀꺽 막걸리를 들이켰다지. 언젠가 막걸리 한 말 부려 놓아도 될 날이 오려나? 어이쿠, 오토바이 탄 사람이 달달달 서원 앞을 지나며 내다본다. 핸들 앞에는 손글씨로 '순찰'이라 적은 골판지가 자랑스럽게 붙어 있다. 잘 걸었고, 잘 쉬었다. 글·사진=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 여행 Tip

12번 대구광주고속도로 거창IC로 나와 군청, 법원 쪽으로 우회전해 직진, 중앙교사거리에서 좌회전해 3번 국도를 타고 진주, 함양, 수승대 방면으로 간다. 말흘교차로에서 37번국도 무주, 위천 쪽으로 빠져나가 마리삼거리에서 오른쪽 무주, 설천 방면으로 가면 된다. 수승대 입장료는 무료, 주차료는 3시간 이하 무료다. 출렁다리는 동절기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50분까지이며, 매주 월요일은 시설물 점검을 위해 휴장한다. 출렁다리는 수승대에서 출발해 갈 수 있고, 다리 바로 아래에서 올라갈 수도 있다. 수승대에서 출발해 계곡 동편 길을 따라 올라간 뒤 출렁다리를 건너 계곡 서편으로 내려오는 길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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