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은 세상] '법대로' 하지 않아 다행이야

  • 정혜진 변호사
  • |
  • 입력 2023-02-23  |  수정 2023-02-23 08:34  |  발행일 2023-02-23 제22면
일상생활 법보다 중요한 건

상호 신뢰와 약속 바탕으로

순리대로 문제 풀려는 태도

법은 사회적 약자 보호 위한

안전장치로서 반드시 필요

2023022201000742400030041
정혜진 변호사

지난해 이 무렵, 살던 집을 비워줘야 하는 상황에서 전세가가 급등했다. 기존 전세금에 상당한 금액을 더 보태도 당시 살고 있던 아파트 정도의 집을 얻을 수 없는, 믿기 힘든 현실이었다. 집 걱정에 발을 동동 구르다 운 좋게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를 저렴하게 구했다. 임대인이 1년짜리로 내놓아 사람들이 계약을 꺼리던 물건을 내가 잡은 것이다.

사실, 법대로 하면 주택 전세를 1년으로 하는 건 무효다. 주택임대차보호법이 2년 미만으로 정한 임대차의 기간을 2년으로 보기 때문이다. 임차인은 2년 미만으로 정한 기간이 유효함을 주장할 수 있지만, 임대인은 그럴 수 없다. 최소한의 주거 안정성을 부여하기 위해 임차인에게 유리하게 만든 편면적 강행규정이다. 계약 기간을 짧게 하면서 가격을 시세보다 저렴하게 했다고 해도 다르지 않다. 변호사인 내가 그걸 모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계약 당시에는 2년을 살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전혀 하지 않았다. 빠듯한 전세금으로 그럭저럭 괜찮은 집을 얻어 다행이라고만 여겼다.

화장실 가기 전과 다녀온 후가 다르다고 했던가. 이사 시기가 다가오자 주어진 권리를 스스로 포기하려는 내가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내 사정을 잘 아는 변호사 친구들에게 조언을 구했더니 의견이 갈렸다. 변호사가 자기 권리도 못 챙기면서 남의 권리를 어떻게 보호해 주냐며 타박을 준 친구는 지금 당장 2년 계약을 주장하는 내용증명 우편을 임대인에게 보내라고 했다. 하지만 임대인에게 밉보이면 이사 나가야 할 때 전세금 반환을 바로 못 받거나, 원상회복과 관련해서 별거 아닌 거로 꼬투리 잡힐 수 있다며 법보다 현실을 걱정하는 의견도 만만치 않았다.

오랜 고민 끝에 '법대로' 카드를 포기했다. 현실적인 우려에 공감이 갔고, 그에 더해 변호사가 가진 법 기술을 이용해 상대방의 뒤통수를 치는 건 권리를 떠나 부끄러운 일이라는 생각이 뒤늦게나마 들었다. 임대인은 계약 기간을 짧게 하는 대신 전세금을 시세보다 낮게 책정하는 방식으로 합리적인 계약을 제안했고 내가 기꺼이 그 제안에 응해 계약이 성사되었으니 계약에 따른 신뢰를 지키는 게 당연한 '도리'였다. 다행스럽게 전세가는 꾸준히 떨어져 지금의 전세금으로 이 아파트 물건을 '시가대로' 구할 수 있을 정도이니 이사 간다고 그리 큰 손실을 보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중개인을 통해 임대인이 먼저 연락을 해 왔다. 그 사이 사정이 변경되었다며 그 집에 1년 더 있어 주면 안 되겠느냐고.

세상에! 몇 달을 고민하던 '법대로'를 내려놓는 순간 거짓말처럼 문제가 쉽게 풀렸다. 결과론적이긴 하지만 1년 전 시세보다 저렴한 전세를 얻어 2년을 살게 되었으니 결국 내가 시장의 '승자'가 된 셈이다. "법대로 하면 1년 계약은 무효입니다"라는 내용증명 우편을 먼저 보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하니 정말 아찔했다.

물론 내가 운이 좋았던 건 안다. 우리 사회에는 법으로 보호를 해 주어야만 겨우 주거안정을 얻는 이들이 많고 법은 그런 경우를 대비하여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일상의 법률생활에서 법보다 더 중요한 건 서로에 대한 신뢰라는, 만고의 진리를 이번 일을 통해 새삼 깨닫게 되었다. "권리의 행사와 의무의 이행은 신의를 좇아 성실히 하여야 한다." 로스쿨 때 멋모르고 외웠던 민법 제2조의 의미를 이제 조금은 알 것 같다.
정혜진 변호사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오피니언인기뉴스

영남일보TV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

영남일보TV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