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세뇌의 심리학…'보이지 않는 침투' 사상 주입부터 가스라이팅까지

  • 최미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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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3-31  |  수정 2023-03-31 08:04  |  발행일 2023-03-31 제16면
정신과 의사인 저자 경험·자료 토대
파블로프의 관점 외 다각도로 분석
한국戰 때 적용된 세뇌 기술도 다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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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과 의사인 저자는 이 책에서 중국 전체주의와 나치의 사고 통제 등을 다루며 정신에 대한 침입의 문화적 의미를 강조한다.

좀처럼 이해하기 어렵고, 공분을 사는 사건의 시작을 보면 '가스라이팅'이 있는 경우가 많다. 가스라이팅은 거부, 반박, 전환, 경시, 망각, 부인 등 타인의 심리나 상황을 교묘하게 조작해 그 사람이 현실감과 판단력을 잃게 만듦으로써 그에 대한 통제력을 행사하는 것을 말한다. 연인이나 가족 등 가까운 관계에서 많이 발생하는데, 이 또한 '세뇌'의 한 범주에 들어간다.

세뇌란 사람이 원래 가지고 있는 의식을 다른 방향으로 바꾸게 하거나 특정한 사상·주의를 따르도록 뇌리에 주입하는 것이다. 미국의 저널리스트 에드워드 헌터는 '세뇌(brainwashing)'는 중국어(洗腦·세뇌)에서 유래한 말로, 공산주의자가 아닌 사람을 수동적인 공산당 추종자로 만들기 위해 체계적인 사상을 주입, 전향, 자기고발을 이용하는 의식을 의미한다고 정의했다.

네덜란드 헤이그 출신인 저자 요스트 A.M. 메이를로(1903~1976)는 정신과 의사다. 그는 1923~1934년에 몇몇 병원에서 교수 겸 상주 정신과 의사로 일했다. 이후 헤이그에서 개업해 심리치료와 정신분석을 시작했고, 네덜란드 왕실과 정부 기관의 정신과 자문도 맡았다. 그는 나치가 네덜란드를 점령했을 때 이 책에서 소개한 정신과 고문과 강제 심문 기술을 직접 목격했다.

나치에 붙잡혔다 탈출해 영국에 주둔한 네덜란드군의 심리분과 부서장을 맡았던 저자는 나치로 인한 공포와 고문의 피해자 수백만 명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한 자료를 모았다. 이 과정에서 그는 끔찍한 환경에서 사람이 나타내는 다양한 반응을 접하고, 잔인한 진실을 알게 된다. 대부분 사람이 정신이 무너질 수 있고, 행동 또한 동물과 같은 수준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고문하는 사람이나 당하는 사람 모두 인간의 존엄을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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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스트 A.M. 메이를로 지음/ 신기원 옮김/ 에코리브르/ 329쪽/ 2만1천원

책에서 저자는 중국 전체주의와 나치의 사고통제, 정신적 살해, 세뇌 등을 다룬다. 이 중 정신적 살해는 저자가 만들어낸 단어다. '마음'을 뜻하는 'mens'와 '죽이다'라는 뜻의 'caedere'를 합한 말이다. 책에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와 공산주의자가 저지른 만행을 보여주며 세뇌, 사고통제, 정신적 살해가 인간을 어떻게 파괴하는지를 이야기한다. 이와 함께 한국전쟁 동안 세뇌의 기술이 어떻게 적용되었는지도 다룬다.

책은 특히 정신에 대한 침입의 문화적 의미를 강조한다. 저자는 강요의 기술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느낌과 생각에 대한 보이지 않는 침투가 더 중요하다고 역설한다. 그러면서 세뇌를 파블로프의 관점 외에도 임상심리학의 관점, 프로이트의 개념 등 다각도로 다룬다.

저자는 정신적 강요가 인간의 모든 상호작용에서 일어날 수 있다는 면에서 세뇌를 바라본다. 이를 위해 저자는 사람의 정신에 비밀스럽게 침투하는 기술, 관료제, 우리가 알아채기도 전에 우리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특수한 형태의 편견, 대중 망상에 대해 들여다본다. 그러면서 반역과 충성에 대해서도 질문을 던진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선 인간에게 막대한 정신적 압력을 가하는 현대문명에서 규율을 어떻게 정하는 것이 최선인지에 관해 이야기한다. 동시에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가치를 깊게 들여다본다. 그는 민주적이면서 자율적인 통치에는 자기통제, 정정당당함과 공정함, 사회의 규칙에 대한 자발적 승복과 협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저자는 "민주주의는 한계 없는 권력을 갖고자 하는 인간의 경향성에 제동을 걸고 우리 각자의 약점을 돌아보는 것"이라고 말한다.

최미애기자 miaechoi21@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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