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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네번째 시집 '기억의 미래'를 펴낸 이하석 시인. <영남일보D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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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석/문학과지성사/128쪽/1만2천원 |
대구를 대표하는 이하석 시인의 열네 번째 시집이다. 시집의 제목은 다소 상반된 단어의 조합이지만, 과거의 시 세계를 잇고 확장하는 동시에 여전히 스스로를 갱신하려는 시인의 의지를 이번 시집에서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시력 50년을 넘어선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담담하고 그윽한 시선으로 음지(陰地)를 응시한다. 그러면서 존재를 인식하는 여정을 그려낸다.
"블루 콤마의 주인도 내다보는 자에 속하지만, 자주 카페 밖으로 나가 강변 풍경이 되어서 담배를 피운다. 크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데, 그럴 때마다 연기가 급히 그의 몸을 부풀리다가 위축시킨다. 제 생을 제대로 왜곡시킬 줄 아는 것 같다. 나도 카페의 손님들도 그 모습을 멍하니 내다본다. 하지만 결국, 서로 빤히 들여다보이는 느낌이다. 가끔 눈이 마주치면 서로 울컥해진다."('블루 콤마' 부분)
해설을 맡은 김문주 문학평론가는 "이하석의 시에서 의식은 세계를 수렴하는 주관적 그물로서 작용하기보다 사물들을 현시(顯示)하는 감각으로서 실현된다"고 평한다.
2016년 펴낸 시집 '천둥의 뿌리'(한티재)에서 1946년 대구 10월 항쟁과 민간인 학살의 기억을 불러낸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도 질곡의 한국 현대사를 똑바로 응시한다. 1950년 여름 민간인 학살이 벌어졌던 가창골, 지금은 수장된 가창댐으로 향한 시인의 시선은 그곳에서 가만히 '소리'를 들으며 아픈 역사를 드러낸다.
"길이 들면 새들 울음으로 찢어대는/ 숲의 초입에/ 칼국숫집이 저녁을 환하게 밝힌다// (중략) // 오래전, 처형의 일기를 써 내렸던 물,// 나가보니 그 물소리로 삭은 기억의 숲이 어둠을 짓뭉개고 있다// 다시 들어와 국수를 들면서, 저마다 뿔들 주억대며,/ 자신들의 안安과 부否를 후루룩거리는 소리들을 듣는다.(후략)"('가창댐 아래서' 부분)
그러면서 시인의 시선은 다시 '5·18민주화운동'으로 이어진다.
"(전략) 아가야, 그때 그대로 다 큰 내 아가야,/ 어디에 묻혀서 썩든, 혼은 늘 집에 와서/ 그래, 그래, 자장자장// 세상은 시나브로 40년 전으로 역행하네./ 끊임없이, 더 묻고 물은 죄 따져/ 국가가 죽여서 버린다면// (중략) // 내 아가야, 그래, 그래,/ 우는 혼으로만 떠돌지 말고 집에 와서,/ 기어이, 국가보다 더 큰 어미 품에서/ 자장자장('자장가-5·18 40주년에 부쳐' 부분)
실제 코로나에 걸려 지난해 2월 '유폐의 시간'을 보내야만 했던 시인이 팬데믹의 한복판에서 목격한 풍경도 시어로 담아냈다.
"틈만 나면,/ 찻길과 인도의 감전感電으로 피워낸/ 제비꽃들이 바람에 왁자지껄하다.// 마스크 쓴 사람들이 묵묵히,/ 자신들도 모르게 그 선 밟은 채/ 버스를 기다린다// 그게 무에 그리 위험한지/ 버스보다 먼저, 기우뚱거리며/ 질병 관리 본부의 방역차가 달려와/ 또 소독제를 뿌린다."('틈만 나면' 전문)
또 코로나 시대의 구호나 다름없던 '최소 2미터 거리를 유지해주세요↑'가 "사랑이 왜 이겨내는 것인지를 알려주는 가장 불친절한 지표"라고 정의한다.
시인의 절친한 문우(文友)였던 문인수(2021년 6월11일 작고) 시인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도 한 편의 시로 드러낸다.
"손 떨며 감의 말 번역하던 면전의 질문이여./ 그대 죽음은 이른 답장의 추신.// (중략) // 이제는 불멸로/ 절경 아니라 사람의 숲 나오는 오솔길로/ 여울지며, 서로 빌려서/ 갚는 시름으로 계산한다.// (중략) // 그대 불러 우리는 무한의 소주잔을 나눌 뿐./ 서로 견딜 취기인데// 그대 먼저 손 열어/푸른 문을 닫는가?"('푸른 문-문인수 형에게' 부분)
이번 시집에는 일흔을 훌쩍 넘긴 노 시인의 '다음 시 세계'를 엿볼 수 있어 기대를 갖게 한다.
"사랑은 시로 할 수밖에 없는 것// 시의 말로 약속 잡고/ 결국 더 시선을 건드리지.// (중략)// 너는 내게 눈웃음 짓는다./ 나무 의자 수리하는 시인같이./ 그런 시는 도대체 무슨 눈길일까?// 퇴고할 수 없는, 그래,/ 나를 응시하는 너 말고 이 세상에/ 누가 더 낯선 시인가?"('낯선 시' 부분)
김문주 문학평론가는 "반백 년의 시력을 쌓으며 시적 장력을 이어온 노 시인이 환대하는 저 아름다운 '응시'와 '이명' 그리고 '이상기후'는 이전의 시적 경향과는 다소 결이 다른 '낯선' 것인 데다 다양한 현실을 담은 풍요로운 성찬이어서 '기억의 미래' 이후에 도래할 또 다른 시적 진경을 기대한다"고 말한다. 이는 시집 첫머리에 밝힌 '시인의 말'에서도 짐작된다.
"전반부가 삶/ 죽음과 관련이 있다면, 후반부는 구름의 주소록? 어쩌면 다 구름의 주소록? 나는 참 멀리 와서도 여전히 제자리에서 주소가 없느니."
백승운기자 swback@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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