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오늘은 진행이 빠르다…도피 꿈꿀 때 몸 일으켜 세워주는 영혼의 물결

  • 최미애
  • |
  • 입력 2023-09-15  |  수정 2023-09-15 07:54  |  발행일 2023-09-15 제17면
시적 자아의 원천 '고향의 바다'

길·시간 얼크러져 새로운 흐름

수많은 이 향한 애틋함·너그러움

후포백사장
경북 울진군 후포면 출신 김명인 시인에게 바다는 시적 자아의 원천이다. 울진 후포해수욕장의 백사장. 〈영남일보 DB〉
오늘은진행이빠르다
김명인 지음/문학과지성사/112쪽/1만2천원

등단 50주년을 맞은 김명인 시인의 열세 번째 시집이 나왔다. 직전 시집인 '이 가지에서 저 그늘로'(문학과지성사) 이후 5년 만에 나온 시집으로, 그동안 발표한 55편의 신작 시를 묶었다. 김 시인은 등단 이후 중후하면서도 섬세한 시선으로 그려낸 삶의 풍경을 독특한 시간성으로 배치해 경이로운 작품 세계를 선보여왔다. '언어의 의미 극대화를 통한 세계와의 관계성 탐구'(김치수), '현실과 불화한 존재들이 풍경에 휘말려 들어간 치열한 여정'(정과리) 등으로 설명되는 그의 시 세계는 그가 오랜 시간 집중한 시적 토대인 '바다'와 '길' '시간'이 얼크러져 새로운 유속으로 흘러간다.

"임종 무렵의 어머니는/ 지워지는 둘레에 골똘한가 보았다/ 눈가 묽어지는 저물 무렵/ 넋 놓고 잠겨 드는 바다처럼/ 반짝이는 석양을 켜 들곤 했으니"('넋 놓고 잠겨 드는 바다처럼' 중)

"비탈길 가에 접시꽃 한창인 때,// 어머니는 나를 앞장세워/ 외가를 다녀오곤 했다// 뭘 풀칠하는 줄도 모르는/ 이웃과 친족의 둘레"('짙푸른 슬픔이 사는 곳' 중)

그의 시에는 '둘레'가 수없이 등장한다. 둘레는 사전적 의미에서 알 수 있듯, 삶의 흔적이 담긴 근방의 물리적 터전을 가리키는 동시에 의식의 바탕에 그어진 저지선이다. 시에서 화자는 둘레를 따라 과거를 회상하며 장면을 구체적으로 시각화한다. 그러면서 현재의 질문을 무심히 던진다. 이는 수묵화에서 종이에 한 점의 먹을 떨어뜨려 번지게 하는 발묵 기법을 연상시킨다. 이 같은 시적 태도는 세월의 축적을 고스란히 보여주면서, 경험을 뛰어넘는 예측 불가능한 형상을 독자 또한 화자와 함께 동시에 관찰하게 한다.

김 시인은 혼혈아, 미군, 양공주가 거리를 메운 동두천에서 교사로 재직하다 베트남전쟁에 참전하기까지 자신의 한 시절을 그린 첫 시집 '동두천'(1979)의 '동두천'과 '영동행각' 연작을 통해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는 이방인의 상처, 바닷사람들의 고단한 속살을 생생하게 담아낸 바 있다. 시인의 고향에 자리 잡은 바다는 시인의 시적 자아의 원천이다. 그의 시에서 화자가 먼 곳으로 도피를 꿈꿀 때, 바다는 생명이 펄떡거리는 자연 그 자체이자 존재의 탄생과 소멸을 건드리는 영혼의 물결로 작용해왔다.

"파도는 일생일대를 제자리에 돌려놓잖아!"('봤어?' 중)라고 하거나 "난파란 물의 습성이 소리로 바뀌는 것,/ 때로는 일대가 뒤집히기도 하니/ 소용돌이를 잠재운 바다에겐/ 넓이만 아득한 게 아니"('난파란 물의 습성이 소리로 바뀌는 것' 중)

김 시인의 시에서 삶의 은유로서 등장하는 바다는 불가항력적인 운명을 함부로 거스르려는 인간의 투쟁을 한없이 작은 것으로, 파편적인 것으로 만든다. 그러면서 자연법칙의 위대함 속에서 초월적 자유를 얻어낸다. 그의 시에는 거스를 수 없는 힘에 떠밀려 간신히 몸을 일으켜 세우는 수많은 존재를 향한 애틋함과 너그러움도 담겨 있다.

경북 울진 출신인 김명인 시인은 197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출항제'가 당선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동두천' '머나먼 곳 스와니' '물 건너는 사람' '푸른 강아지와 놀다' '바닷가의 장례' '길의 침묵' 등과 시선집 '따뜻한 적막' '아버지의 고기잡이', 산문집 '소금바다로 가다' 등이 있다. 소월시문학상, 현대문학상, 이산문학상, 대산문학상, 목월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최미애기자 miaechoi21@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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