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향 인사를 찾아서] '안동 출신' 류중석 경실련 공동대표 "재정자립 새 길 연 것처럼…MZ 트렌드 맞춰 새 공동체 고민해야죠"

  • 김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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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4-03-27 08:31  |  수정 2024-03-27 15:58  |  발행일 2024-03-27 제25면
도시 인프라, 시민이 함께 만든 공공재산
골고루 혜택 가야 한다는 게 '경실련 철학'
지방소멸 문제는 당파 초월 시대적 명제
獨 '소도시 특화산업' 사례 벤치마킹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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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출신의 류중석 경실련 공동대표는 시민 누구나 도시의 인프라를 누리고, 지속가능한 삶을 살아가는 '공간정의'의 개념을 강조했다.

2차대전 후 한국은 전 세계 어느 나라도 이루지 못한 경제적 성장과 풀뿌리 민주주의를 안착시켰다. 이는 전 국민의 뼈를 깎는 노력과 함께 공동체의 내일을 위해 사회 변혁을 추구해온 시민단체의 활발한 활동도 한몫을 단단히 했다. '경실련(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은 공정한 소득분배에 기초한 경제정의를 실현하려는 취지로 1989년 발족한 우리나라 시민사회단체의 맏형 격인 단체다. 안동 출신으로 경제 민주주의를 위해 끊임없이 목소리를 내온 류중석 경실련 공동대표(전 중앙대 교학부총장)를 만났다.

◆공정한 경제 만들기 30년

경실련은 한국에서 처음으로 '대안(代案)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바른 생활상'을 2003년 수상했다. 독일계 스웨덴인 야콥 폰 윅스쿨이 제정한 이 상은 노벨상 이외의 영역에서 가치 있는 활동을 하는 이들에게 주는 상이다. 경실련은 사회정의와 책임을 바탕으로 폭넓은 개혁 프로그램을 개발, 확산시키고 북한과의 화해 증진에 기여한 공적을 인정받아 수상자로 선정됐다.

류 공동대표는 세계 무대에서 인정받은 경실련의 오늘이 있기까지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이다. 공정한 시장경제 질서와 경제 정의의 안정적 유지를 목적으로 시민, 청년, 서민층 등이 결성한 경실련에서 벌써 30여 년을 활동가들과 함께했다. 그가 경실련 활동을 시작한 계기는 무엇일까.

"대학 시절 건축학을 전공했는데, 2학년 때 받은 과제가 대기업 회장의 집을 설계하라는 것이었어요. '왜 이런 과제를 주는 걸까. 매년 1천여 명이 넘는 건축학도가 배출되지만 과연 대기업 회장님 집을 설계할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잘사는 사람들만 위해서 내가 배운 지식을 써야 되나 하는 생각을 그때부터 했던 것 같아요."

서울대 재학시절 그의 관심은 '집'이 아닌 '도시'로 향했다. 잘사는 사람, 못사는 사람, 약한 사람, 강한 사람, 어린이, 노인 등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도시에서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공간을 설계하는 '도시공학'에 주목했다.

◆'도시'는 시민을 위한 공유재산

한 보고서에 따르면 2030년 전 세계 도시화율은 60%로 예상된다. 이에 따라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에 대한 개념을 새롭게 정립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도시를 단순히 정주하는 공간만이 아닌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한 사회, 경제, 환경적 현안의 해결책이자 새로운 동력으로 인식해야 한다는 사고가 확산하고 있는 것이다.

"UN에서는 20년마다 'UN해비타트 회의'를 열고 있습니다. 1996년 터키 이스탄불에서 '지속 가능한 도시'에 세계인의 합의가 이뤄졌고, 2006년 에콰도르 키토에서 '포용도시' 개념이 제기됐습니다. 향후 전 세계 지자체 도시개발의 좌표가 만들어진 셈이죠."

도시건축학자이자 시민활동가인 그는 UN과 보폭을 맞추며 지속 가능한 도시의 미래를 고민했다. 그런 맥락에서 도심 속에 방치된 '공개공지'를 찾아 시민에게 돌려준 사업은 사회적으로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현행법에 따르면 바닥면적이 5천㎡가 넘는 대형건물의 경우 지자체가 용적률을 높여주는 대신 대지의 5~10%를 공개공지로 만들어 시민의 쉼터로 활용하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대다수 건축주들이 공개공지를 주차장, 적재장 등으로 몰래 사용하는 사례가 많았다. 그는 경실련 회원들과 공개공지 되찾기를 범사회적 운동으로 전개해 성과를 올렸다.

"도시는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기여해서 만든 일종의 '공공재단'과 같은 것입니다. 도시의 인프라 스트럭처라고 하는 교통수단, 상하수도, 전기, 가스, 인터넷, 병원 등 기반시설들도 시민들이 함께 만든 공유재산이구요. 따라서 시민에게 골고루 혜택이 가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경실련의 '공간 정의' 철학입니다."

◆"지방소멸, 여야의 문제 아냐"

경실련은 1989년 발족부터 지금까지 사회의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두고 활동했다. △국회의원 및 공직자 이해충돌 실태 공개 △가짜 농부의 농지소유금지 입법청원 △그린벨트 해제 반대 △비급여 없는 공공병원 도입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 △전경련 해체 △삼성그룹 편법 경영승계 문제 △전월세 임대료 상한제 도입 △기초지방선거 정당공천 폐지 △4대강 사업 감시 △검찰개혁 및 부패방지법 제정 촉구 △한보비리 진상규명과 정치자금제도 개혁 등에 목소리를 냈다. 재깍재깍 다가오는 '지방소멸' 문제도 중요 어젠다로 설정하고, 십수 년째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서울의 집을 팔면 비슷한 평수의 집을 지방에서 5채를 살 수 있다고 합니다. 서울의 부동산 가격이 천정부지로 오르면서 공장 부지 확보가 어려워진 서울의 기업들은 경쟁력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지방소멸 문제는 여야를 가리지 않고, 당파를 초월해서 해결해야 할 절대적 명제라고 생각합니다."

해외의 사례를 들어 한국의 위기를 타개할 방법도 제시했다. "지방분권이 잘된 독일은 한국처럼 천만 인구를 가진 도시가 없습니다. 대부분 30만~50만 정도의 소도시들인데, 그들은 각각 특화된 산업으로 도시발전을 견인하고 있습니다. 독일의 도시들은 네트워크를 통해 유대감을 형성하고 건강한 선순환 경제를 만들어갑니다. 서울처럼 집값이 널뛰기 하는 일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MZ와 함께하는 시민운동 기대

한국의 시민사회운동은 1990년대 절정을 지나 2000년대 들어 조금씩 침체의 길을 걷고 있다. 현재 활동 중인 다수의 시민단체들이 자립기반을 다지고 활동을 하기보다 사무국을 중심으로 정부나 기업의 정책연구 프로젝트를 수행하며 조직을 유지하고 있다. 급기야 '시민 없는 시민단체'라는 말이 나오기도 한다.

"정부 지원을 받으면서 어떻게 정부를 떳떳하게 비판하냐는 언론의 날카로운 지적이 경실련에도 있었어요. 당시 내부적으로 심각한 위기의식을 가지고 워크숍을 진행했습니다. 우리가 도덕성을 잃으면 시민운동의 기반이 무너진다는 내부적 결의가 있었고, 이후 경실련은 정부 보조금을 1원도 받지 않는 단체로 탈바꿈을 했습니다."

경실련은 현재 10여 년째 정부 프로젝트를 거부하고, 나 홀로 길을 걷고 있다. 회비와 후원금으로 단체를 꾸려나가니 재정 상태는 어렵다. 새로운 회원을 확충하기도 호락호락하지 않다.

"시민운동의 앞날은 여전히 숙제로 남아 있습니다. 개인주의와 가치 소비를 하는 젊은이들에게 공동체의 가치를 얘기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지 의문입니다. 그렇지만 숱한 위기를 잘 극복해왔던 것처럼 변화하는 사회에 맞춰 변신을 하고, 더 나은 공동체를 위해 고민해야겠지요."

글·사진=김은경기자 enigma@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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