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 추 거문고 이야기] 〈21〉 풍류남아 임제와 거문고

  • 김봉규 문화전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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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4-11-22  |  수정 2024-12-20 08:16  |  발행일 2024-11-22 제14면
"거문고 하나 칼 한 자루로 살아왔네"…세상과 등진 자유분방한 천재시인
16세기 조선에서 가장 개성적이며 뛰어난 문장가로 평가받은 풍류가객 백호(白湖) 임제(1549~1587). 호방한 기질의 그는 당시의 가치관이나 예속에 구속받지 않았으며, 시대를 비판하는 정신을 잃지 않아 '풍류기남아(風流奇男兒)'로 불리었다. 거문고는 빼어난 시인이자 일세의 풍류객이었던 그에게도 가장 소중한 반려였다.

문과 급제 후 제주목사인 아버지를 찾아보고자 제주도로 떠났는데, 이 때 챙긴 봇짐 속에는 임금이 내린 어사화 두 송이와 거문고 하나, 칼 한 자루가 전부였다.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는 그에 대해 '선비들은 그를 도 밖의 사람이라 하며 사귀기를 꺼려했으나, 그의 시와 문장은 서로 취하였다'라고 적고 있다.

임제의 시 '성이현과 작별하며(留別成而顯)'이다. '말을 하면 세상이 나더러 미치광이라 하고/ 입을 다물면 세상이 나를 바보라 하네/ 그래서 고개 저으며 떠나가지만/ 나를 알아주는 이가 어찌 없으랴(出言世謂狂 緘口世云癡 所以掉頭去 豈無知者知)'.

이런 그에게 거문고는 최고의 친구였던 모양이다. 그는 류우경(柳虞卿)에게 준 시에서 이렇게 읊었다. '글 배우려다 중간에 그만 두고/ 기생집에 드나들었네/ 거문고 잡을 때보다 좋은 게 있으랴/ 고요하게 앉아서 맑은 밤 퉁기네(學書不成去 來往靑樓下 莫如携玉琴 靜坐彈淸夜)'.

임제는 어려서부터 지나칠 정도로 자유분방했고, 그래서 스승도 없었다. 1570년 22세 되던 겨울, 충청도를 거쳐 서울로 가는 길에 쓴 시가 대곡(大谷) 성운(1497~1579)에게 전해진 일이 계기가 되어 성운을 스승으로 모셨다고 한다.

1571년에 어머니를 여읜 후, 글공부에 뜻을 두고 과거에 몇 번 응시했으나 번번이 떨어졌다. 이후에도 계속 학업에 정진하여 '중용(中庸)'을 800번이나 읽었다고 한다. 1577년 알성시(謁聖試)에 급제한 뒤 흥양현감(興陽縣監), 서북도병마평사(西北道兵馬評事), 관서도사(關西都事), 예조정랑(禮曹正郞), 홍문관지제교(弘文館知製敎) 등을 지냈다.

그러나 호방하고 얽매이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 탓에 벼슬길에 대한 마음이 차차 없어졌고, 관리들이 서로를 비방 질시하며 편을 가르는 현실에 환멸을 느꼈다. 그래서 유람을 시작했고, 가는 곳마다 많은 일화를 남겼다.

서북도병마평사로 임명되어 임지로 부임하는 길에 기생 황진이의 무덤을 찾아가 시조 한 수를 짓고 제사 지냈던 일, 기생 한우(寒雨)와 시조를 주고받은 일, 평양 기생과 평양감사에 얽힌 일화 등이 유명하다. 이러한 일화로 인해 사람들은 그를 평가하길 기이한 인물이라고 했다. 또 한편에서는 법도에 어긋난 사람이라 했다. 그러나 당시의 상반된 평가와는 상관없이 그의 글은 높이 평가됐다. 이달(李達), 백광훈(白光勳), 허균(許筠), 성혼(成渾), 이이(李珥), 정철(鄭澈), 신흠(申欽) 등과 교류했다.

임제는 훗날 자신을 이렇게 노래했다. '아름다운 거문고와 보검이면 행장은 족하네/ 바둑판과 찻잔은 세상사의 찌꺼기에 불과한 것/ 칼집에는 별을 찌르는 명검이 있고 꿈속에는 귀신이 곡할 시가 있노라'.

'견흥(遣興)'이라는 시에서는 이렇게 읊었다. '중도 아니고 속인도 아닌 소치(嘯癡)라는 놈/ 거문고 하나 칼 한 자루로 살아왔네/ 때로는 북쪽에 가서 처자식 만나보고/ 돌아오면 강남의 늙은 중들 집에서 더부살이하네(非僧非俗嘯癡漢 一琴一劍爲生涯 有時北去問妻子 來寄江南禪老家)' '소치(嘯癡)'는 임제의 호.


16세기 조선의 '풍류기남아'
문과 급제 후 벼슬길 욕심 사라져
상반된 평판과 달리 문장 높이 평가
40세도 안돼 요절한 당대 대표 한량
시문에 능해 작품 700여 수 남겨
기생 한우와 시조 오간 일화도



◆기생 한우(寒雨)와 동침 사연

'북천(北天)이 맑다 해서 우장(雨裝) 없이 길을 나섰더니/ 산에는 눈이 오고 들에는 찬비로다/ 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얼어 잘까 하노라'. 임제가 기생 한우(寒雨)에게 지어 준 시다. '찬비'는 기생의 이름 '한우(寒雨)'를 함께 의미하는 표현이다. 한우에 대한 마음을 담아 멋스럽게 표현하고 있다.

임제는 당대의 대표적 한량(閑良)이었다. 40세를 채우지 못한 채 요절한 그였지만, 여인들과 많은 염문과 정화(情話)를 뿌리고 간 주인공이다. 그는 시문에 능하여 주옥같은 작품 700여 수를 남겼다. 한시뿐만 아니라, 시조도 6수를 남겼는데 모두가 여인들과의 사랑 노래다.

임제가 관서도사(關西都事)로 근무할 당시 평양에 '한우(寒雨)'라는 기생이 있었다. 그녀는 미모에다 시문에도 능했다. 거문고와 가야금에도 뛰어나고, 노래 또한 명창이었다. 재색을 겸비한 그녀에게 접근하려는 한량들이 많았지만, 언제나 차갑게만 대해 '한우'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한량인 임제가 한우를 모르고 지낼 리는 없었다. 여러 번 연회에서 그녀를 보게 되면서 호감을 갖게 됐다. 하루는 두 사람이 술자리에서 제대로 어울리게 됐다. 시를 논하고 세상을 개탄하면서 술잔이 여러 순배 돌았다. 한우가 거문고를 타면, 임제는 퉁소를 불며 화답했다. 임제는 항상 품에 옥퉁소를 지니고 다녔다. 거문고를 직접 연주하기도 했다. 취기에다 서로에 대한 호감으로 두 사람의 기분이 도도해지는 가운데 임제가 즉흥적으로 위의 시조를 읊었다.

그대가 '찬비'를 뿌리면 얼어 잘 수밖에 없는데, 당신의 마음은 어떠한지 떠보는 것이었다. 노래를 들으며 머리를 숙이고 있던 한우가 이윽고 고개를 들었다. 오늘 같은 날을 기다렸다는 듯이 곧바로 거문고를 타며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어이 얼어 자리 무슨 일로 얼어 자리/ 원앙침(鴛鴦枕) 비취금(翡翠衾)을 어디 두고 얼어 자리/ 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녹아 잘까 하노라'.

임제의 '한우가(寒雨歌)'에 화답한 이 시조에는 그녀의 뜨겁고도 은근한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임제가 '오늘 그리던 한우 너를 맞아 함께 몸을 녹이며 자고 싶은데 혼자 외롭게 자야 하겠는가'라며 마음을 떠본 것인데, 이에 대한 한우가 기발한 시로 화답을 한 것이다. '무엇 때문에 찬 이불 속에서 혼자서 주무시렵니까. 저와 같이 따뜻하게 주무시지요'라고 한 것이다.

[동 추 거문고 이야기] 〈21〉 풍류남아 임제와 거문고
전남 나주시 다시면에 있는 임제가 항상 지니고 다녔던 거문고·옥퉁소·보검.
거문고와 검, 퉁소를 항상 지니고 다녔던 임제는 풍류남아이고, 자유분방한 시인이었다. 가는 곳마다 풍류가 있고, 모르는 기생이 없을 정도였다. 그의 풍류에는 거문고가 항상 함께했다.

천재시인으로 불리었던 임제에 대해 노산(鷺山) 이은상(1903~1982)은 '구금(拘禁)을 미워하고 방종(放縱)을 즐겨했던 사람은 소동파보다는 오히려 시인 임백호 선생을 더 높이 평가한다'면서 '조선왕조 500년에 가장 뛰어난 천재시인이 누구냐고 물으면 우리는 백호 임제 선생으로 대답할 것'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글·사진=김봉규 문화전문 칼럼니스트 bg429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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