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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이중섭 |
화가 이중섭이 1956년 서울 적십자 병원에서 무연고자로 사망하기 전, 마지막으로 거쳐간 도시가 바로 대구였다.
당시 영남일보 주필 겸 편집국장이었던 구상 시인은 그와 막역한 사이였다. 1939년 일본 유학시절 처음 만난 두 사람은 형제보다 더 끈끈한 우애를 이어왔다. 구상의 권유로 이중섭이 대구로 건너 온 때는 1955년 2월 24일이었다. 당시 이중섭은 명동 미도파화랑에서 열린 최초의 개인전이 실패하면서 몸도 마음도 피폐해져 있었다. 전시된 작품 45점 중 26점이 예약되는 드문 성황을 이뤘지만 실 구입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영남일보 주필 겸 편집국장이었던 구상은 바로 그 시기에 이중섭의 대구 개인전을 주선했다.
대구로 온 이중섭은 대구역 앞 경복여관 2층 9호실에 머물며 그림을 그렸다. 당시 이중섭이 지인들과 소식을 주고받은 것도 영남일보를 통해서였다. 이중섭은 자신에게 오는 우편물을 '경상북도 대구시 영남일보사 구상씨' 앞으로 배달하게 했다. 일본에 있던 이중섭의 부인 이남덕(일본명 야마모토 마사코) 여사도 남편에게 보내는 편지를 영남일보로 보냈다. 이 여사가 영남일보로 보낸 편지와 편지봉투는 현재 제주도 이중섭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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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있던 이남덕여사가 남편 이중섭에게 보낸 편지. 구상 시인의 도움으로 1955년 대구에 머물렀던 이중섭은 자신에게 오는 우편물을 '경상북도 대구시 영남일보사 구상씨' 앞으로 배달하게 했다. 출처=이중섭 미술관 |
대구 전시회에서는 '봄' '아동' '두 마리 소' '왜관풍경 A' 등 안내장에 표기된 26점과 대구에서 그린 10점, 그리고 서울에서 가져온 20점 등 모두 56점이 선보였다
하지만 대구 전시회 역시 큰 성과 없이 실패하고 말았다. 맥타가트(Mctaggart) 미공보원장이 그림 '싸우는 소'와 '환희', 그리고 은박지 그림 몇 점을 매입했을 뿐 그의 작품을 알아보는 이는 없었다. 대구 개인전마저 실패로 끝나자 이중섭은 더욱 피폐해져 갔다. 팔리지 않은 그림을 여관 부엌 아궁이에 넣고 불을 붙이는 이상행동까지 보였다. 결국 1955년 8월 대구 역전의 허름한 중국집에서 자장면 한그릇을 비운 뒤 이중섭은 서울로 다시 올라갔다. 그리고 이듬해 서울 적십자병원에서 무연고자 신분으로 홀로 숨을 거뒀다. 그의 나이 40세였다. 이중섭의 죽음에 가장 가슴 아파한 이는 구상이었다. 구상은 임종을 앞둔 반 혼수상태에서도 '친구 듕섭'을 찾을 만큼 이중섭을 그리워했다고 한다.
영남일보 창간 80주년 기념사업단

백승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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