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 추 거문고 이야기]〈25> 죽리탄금

  • 김봉규 문화전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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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5-01-17  |  수정 2025-01-17 08:17  |  발행일 2025-01-17 제16면
적막한 대숲서 홀로 絃을 타니 밝은 달 나를 찾아와 비추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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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시불(詩佛)'로 불린 시인 왕유(王維·699~759). 시선(詩仙) 이백(李白), 시성(詩聖) 두보(杜甫)와 함께 당시(唐詩)의 3대 거장으로 꼽힌 그는 불교적 색채가 짙은 시로 인해 '시의 부처'를 뜻하는 '시불'로 불리었다. 그는 수묵화의 대가이기도 했다.

초년의 왕유는 적극적인 유가 사상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정치적인 실의에 빠지기 시작한 중년 이후에는 불가와 도가의 경향을 아울러 보이다가, 점차 불교에만 심취했다. 이백과 두보가 각각 낭만시와 사회시 창작에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다면, 왕유는 자연시 창작에 독보적인 면모를 보였다. 그는 동진(東晋)의 도연명 이후 최고의 자연시인으로 평가된다.

송나라의 대문호 소동파는 '시중유화' '화중유시', 즉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는 말로, 산수 수묵화의 대가이기도 했던 왕유의 시와 그림의 예술적 경지를 압축 평가함으로써 후세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왕유는 바로 남종화의 길을 연 인물로, 소위 의경(意境)을 중시하는 문인화의 전통을 개척한 것이다.

왕유의 자연시는 대부분이 은거 생활과 불도(佛道) 사상이 결합된 산물로, 은둔의 초탈 정신이 짙게 투영돼 있다. 세속적인 욕망을 벗어난, 한가롭고 편안하기 그지없는 시인의 성품과 정서가 작품 속에서 여실히 표현되고 있다. 가장 큰 특징은 전원 경물이나 산수 풍광의 묘사 가운데서 절로 풍기는 은둔적 정취다.

그런 작품 중에서도 그의 시집 '망천집(輞川集)'에 있는 '죽리관(竹籬館)'이 대표적이다. 이 시에 거문고(칠현금)가 등장하는데, 그윽한 대숲 속의 탈속적인 정취를 표현하는 핵심 요소로 묘사된다. 고요하고 적적함이 감도는 깊은 대숲에서 거문고를 타고 휘파람도 불며, 달빛과 교감하는 정취를 담담하게 표현하고 있다. 대숲의 그윽함과 시인의 고아한 정취를 절묘하게 드러낸 수작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작품이다. 그의 시 '죽리관'이다.

'詩의 부처' 칭해진 中 시인 왕유
불도 사상 결합된 산수 풍광 묘사
대표작 '죽리관' 자족의 미학 노래

단원의 부채그림 '죽리탄금도'는
왕유의 시 '죽리관' 오롯이 담아


◆왕유의 시 '죽리관'

'그윽한 대숲에 홀로 앉아(獨坐幽篁裏)/ 거문고를 타다가 휘파람 길게 불어본다(彈琴復長嘯)/ 숲이 깊어 사람들은 알지 못하지만(深林人不知)/ 밝은 달이 찾아와 비추어 주네(明月來相照)'.

그는 한때 승려가 되기 위해 출가를 결심했으나, 왕(숙종)이 허락하지 않아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출가는 하지 않았지만 불교를 신실하게 믿었던 그는 불가에서 금하는 오신채(五辛菜)를 먹지 않고 화려한 복장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아내가 사망한 후에도 재혼하지 않고 죽을 때까지 30년 동안 독신으로 살았다.

왕유는 30세 때 아내와 사별했고, 40세에 벼슬을 접고 홀로 장안 근처 망천(輞川) 남쪽에 별장 망천장(輞川莊)을 지어 늘그막을 보냈다. 그의 별장은 규모도 작지 않고 여러 가지 면에서 유명했던 모양이다. 망천장은 후대에 사대부원림의 전형이 되기도 했다. 왕유가 망천장에 은거하며 친구 배적과 이 별장의 명소 20군데를 읊은 '망천 20수'가 유명한데, 그 가운데 '죽리관'이 널리 인용됐다. 죽리관은 대숲에 지은 별채인데, 망천장의 풍경은 그림으로도 많이 그려졌다. '망천도'로 불렸다.

'죽리관'은 '망천집(輞川集)'에 실려 있는데, '망천집'은 왕유가 자신의 은거지인 망천장(輞川莊)에서 경치가 뛰어난 20곳의 아름다움과 감흥을 시로 읊은 후 엮은 시집이다. 이 시들은 후대의 많은 문인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그런 그가 남긴 이 시 '죽리관'은 그의 사후에 많은 시인묵객들의 작품 소재로 활용됐다. 서예 작품은 물론이고, 그림의 소재로 활용돼 다양하게 표현되고, 찻잔을 비롯한 도자기에도 묘사됐다.

◆김홍도 '죽리탄금도'

우리나라 그림 중에는 단원 김홍도의 부채그림 작품 '죽리탄금(竹裏彈琴·대숲에서 거문고를 뜯다)'이다. 왕유의 시 '죽리관'을 주제로 하여 그린 선면도이다. 밝은 달밤에 대나무 숲에 앉아 거문고를 타고 있는 고사(高士)를 그렸다. 선면의 좁은 부분에 해당하는 근경의 바위와 대나무는 고사가 앉아 있는 곳을 속세와 격리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해도 되겠다. 선비 뒤에 차 끓이는 동자도 함께 배치하고 있다. 화면 위 빈 곳 흘려 쓴 글씨는, 김홍도가 왕유의 시 '죽리관(竹裏館)'을 옮겨 적은 것이다.

달빛 스며드는 대숲의 고요한 밤, 거문고를 뜯고 분위기를 느끼며 차를 마시는 즐거움을 만끽하는 일은 아무나 누릴 수 없었을 것이다. 왕유가 죽리관에서 누렸을 이런 삶을 그림으로나마 그려 수시로 보며, 그림 속 인물에 자신을 투영함으로써 이상향에 이르고자 했을 것이다.

'죽리관' 시에서 보듯이 왕유는 거문고를 즐겼던 모양이다. 그 덕분에 누구나 원했을 멋진 경계를 너무나 잘 표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왕유의 시 중 거문고 곡으로 연주되는, 지금도 연주되는 대표적 거문고 곡이 있다. '양관삼첩'으로 불리는 곡인데, 바로 왕유의 시 '송원이사안서(送元二使安西)'라는 너무나 유명한 작품이다. '위성의 아침 비 가벼운 먼지를 적시니/ 객사의 푸릇푸릇한 버들 빛이 새롭다/ 그대에게 권하노니 다시 술 한 잔 마시게(勸君更進一杯酒)/ 서쪽으로 양관을 나서면 친구도 없을 테니(西出陽關無故人)'.

왕유가 위성에서 친구인 원이를 서역 먼 곳으로 떠나보내며 지은 시다. 양관(陽關)이 있는 결구를 세 번 불렀다고 해서 '양관삼첩(陽關三疊)'으로도 통하는 이별노래다. 위성은 당나라 때 장안에서 서쪽으로 떠나는 사람들을 전송하는 이별의 장소로 유명하다. 이별의 아쉬움을 노래한 시 중에 대표 격일 것이다. 그러다보니 곡이 붙여졌는데, 처음에는 '위성곡' 또는 '양관곡'이라 하다가 훗날에 와서는 '양관삼첩'이란 이름으로 고정되었다. 피리나 얼후(二胡)로 연주하는 것도 있지만, 거문고(칠현금)로 연주되는 것이 대표적이다.

양관(陽關)은 오늘날 중국 북서부의 감숙성에 있다. 옥문관과 함께 중국 서쪽의 경계에 놓인 관문이었다. 따라서 이 관문을 나선다는 것은 세상 밖으로 나감을 의미했다. 왕유는 위성, 즉 오늘날의 시안(西安)'에서 관문 밖 세상으로 떠나가는 친구에게 석별 잔치를 열어주는 전별의 자리에서 이 시를 지었다. 그런 이 시에 곡조가 붙고 널리 연주되게 됐다. 마지막 부분인 '서쪽 문을 나서면 반길 이 없으리니'를 세 번 후렴조로 연주하거나 부른다고 해서 三疊(삼첩)이란 수식어가 붙어 곡명이 '양관삼첩'이 됐다고 한다.

왕유가 망천장에서 지은 시 20수 중 널리 사랑받는 '녹채(鹿柴)'도 더불어 소개한다. '텅 빈 산에 사람은 보이지 아니하고(空山不見人)/ 어디선가 사람의 말소리만 들려오네(但聞人語響)/ 저녁 놀빛 깊은 숲속으로 들어와(反景入深林)/ 다시 푸르른 이끼 위를 비추네(復照靑苔上)'.

김봉규 문화전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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