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빈과 자비, 그 두 단어로 압축될 수 있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삶은 교황청이라는 권위의 탑보다 오히려 성프란치스코의 누더기 옷자락을 닮아 있었다. 교황 즉위 첫날부터 “가난한 이들의 교회가 되자"고 외쳤던 그 목소리는, 번쩍이는 금빛 제의보다 더 눈부시게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4년 8월, 뜨거운 여름 한복판에 한국 땅을 밟았다. 아시아 최초의 시복식이 열린 광화문 광장. 그는 뜨겁게 달구어진 도로 위에 무릎을 꿇고, 그 땅에서 순교한 이들을 향해 묵묵히 기도했다. 정치적 함의도, 종교적 전략도 없었다. 다만 “기억과 위로"만이 있었다. 그는 그렇게 한국을 사랑했고, 한국인들에게 잊을 수 없는 시간을 선물했다.
그 방문은 단지 '교황의 공식 일정'이 아니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권좌가 아닌 고통의 현장으로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을 따뜻이 끌어안았다. 노란 리본을 조용히 가슴에 달고, 말없이 눈물을 닦아주는 손길로 그들 곁에 머물렀다. “슬퍼할 시간을 빼앗긴 이들을 위한 기도", 그것이 그의 위로였다. 통곡으로 무너진 한 가족, 한 사회의 가슴에 그는 교회보다 먼저 도달했다.
그의 위로는 역사의 상처로도 이어졌다. 교황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직접 만나 손을 맞잡고 눈을 맞췄다. 어떤 공식 사과도, 어떤 정치적 성명도 그 눈빛만큼 진심일 수 없었다. 고개 숙인 그 순간, 수십 년간 말로는 치유되지 못했던 상처가 잠시 숨을 돌렸다. 피해자에게는 목소리가 아닌 '존재 그 자체'로 다가갔던 것이다.
그가 머무는 동안 단 한 번도 특권을 누리지 않았다. 방탄차량 대신 창문 열린 소형차를 탔고, 고급 숙소 대신 성직자들과 함께 식사를 했다. 그 어떤 치장도, 그 어떤 외교적 제스처도 없었다. 오로지 인간 대 인간으로 마주하려는 그의 태도는, 우리 사회가 잃어버린 진심의 얼굴을 되찾게 했다.
그는 교황청을 '권력의 성'이 아닌 '사랑의 집'으로 만들려 했다. 금융 스캔들과 권위주의가 드리운 그늘 속에서도 그는 끝내 타협하지 않았다. 부패한 성직자를 꾸짖었고, 고통받는 이들과 끝까지 함께했다. 겸손과 청렴, 그 둘은 단지 그의 미덕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에게 있어 존재의 방식이었다.
사후의 교황을 어떻게 불러야 마땅할까. 누군가는 '근대 교황사상 가장 진보적인 인물'이라 평하고, 또 다른 이는 '사회 정의를 설파한 혁명가'라 부른다. 그러나 기자의 눈으로 보자면, 그는 무엇보다도 “인간이었다." 누군가의 눈물을 닦아주기 위해 손을 내밀 줄 알고, 외면당한 자에게 가장 먼저 다가갈 줄 아는, 가장 아름다운 인간이었다.
비록 이 땅에는 여전히 악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고, 탐욕과 무관심 속에 고통 받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프란치스코 교황은 그 어둠 한가운데서도 끝없이 자비와 연대를 노래했다.
정의가 때때로 침묵하는 세상에서, 그는 조용히 묻고 있었다. “당신은 사랑으로 응답할 수 있는가."
그는 떠났지만, 그가 품었던 기도는 여전히 이 땅에 남아 있다. 한국을 끌어안던 그날의 햇살처럼, 따뜻하고 조용하게 우리를 비추고 있다.

한유정
까마기자 한유정기자입니다.영상 뉴스를 주로 제작합니다. 많은 제보 부탁드립니다.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