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80주년 기획 내 이름은 투사 .5] 하와이 사진신부에서 독립운동가로… ‘대구 최초 여학생’ 이희경 지사

  • 박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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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5-05-14 08:53  |  발행일 2025-05-14
신명여고 졸업 후 ‘사진신부’로 하와이 이민
대구 방문한 후 국내·외 독립운동 다수 참여
한인사회 ‘지도자’로 자금 지원 등 항일운동 전개
모교 ‘신명고’ 역사관에서 발견한 그의 흔적
신명여고 제 1회 졸업생 사진

신명여고 제 1회 졸업생 사진

제일 왼쪽이 이희경 지사. 신명고 제공.

권도인·이희경 부부. 권씨는 양복, 이씨는 한복을 입고 있다.

권도인·이희경 부부. 권씨는 양복, 이씨는 한복을 입고 있다. 영남일보DB

이희경

신명고역사관에 전시된 이희경 지사의 사진. 박영민기자.

연혁

이희경 지사 연혁. 출처: 신명고역사관, 공훈전자사료관

대한민국 광복 80주년을 맞아 영남일보가 5월에 소개할 인물은 대구에서 태어나 '사진신부'로 하와이로 떠난 뒤 평생을 독립운동에 바친 여성, 이희경 지사(李喜敬·1894~1947)다. 대구 최초로 정규 여성교육기관을 졸업했다. 하와이 한인사회의 구심점으로 활동하며 항일운동에 헌신했다.

◆ 대구 최초 여학생, 하와이에서 보여준 여성 독립의 길

1894년 1월 8일, 이희경 지사는 대구 명치정 2정목(현 중구 계산동)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이금례. 1912년 신명여학교 제1회 졸업생 3인 중 한 명이다. 대구에서 정규 교육을 받은 첫 여성 중 하나였다. 졸업 후 5개월 뒤 그는 사진 한 장만들고 하와이행을 결정했다. 경북 영양 출신 권도인의 사진을 품에 안고 태평양을 건넜다. 중매인 '매파'는 원래 언니를 추천했지만, 이희경은 '하와이에 가면 대학에 진학할 수 있다'는 꿈을 안고 직접 나섰다. 당시 권도인은 '하와이국민회' 간부로 활동하던 민족운동가였다. 결혼과 동시에 이희경도 자연스레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하와이에 정착한 뒤 3년째인 1915년 첫째 딸이 태어났다. 1918년 이희경은 딸과 함께 고향 대구를 찾았다. 시동생 혼례와 딸의 출생신고를 위한 귀국이었다. 하지만, 3월8일 서문시장에서 벌어진 만세시위는 그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신명여학교 후배들이 거리로 나왔고, 친오빠 이범교도 시위에 가담했다. 이희경은 그날 여성 등 모든 국민이 힘을 합치면 조국을 꼭 되찾을 것으로 확신했다.

만세운동을 지켜본 이희경은 국내에서 바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당시 서울에선 대한민국애국부인회가 결성됐다. 일단 그는 이 단체에 참석했다. 대구지부가 설립되자, 신명여학교 교사 유인경으로부터 대구지부장 직을 물려받아 자금 전달과 임시정부 후원에 앞장섰다. 1919년 11월엔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풀려난 후 1920년 하와이로 돌아갔다.

하와이에 돌아오자마자 조국에서 지켜본 만세운동의 열기를 동포 사회에 전파했다. 임시정부 수립 소식까지 들리자 하와이에 있던 노동이민자들은 피도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하와이국민회는 날마다 대책회의를 했고, 후원금도 모았다.

같은 해 이희경은 대한부인구제회에 가입했다. △하와이 부녀사회의 운동 역량과 집중 △독립운동자금 모집과 독립전쟁 출정군 구호를 위한 적십자 대훈련 △항일독립외교 선전 등을 후원하기 위해서다. 이 여성들은 매주 떡과 잡채, 산적을 만들어 교회 앞에서 팔았다. 수익금은 YMCA와 국내 신문사를 통해 항일운동 자금으로 전달됐다.

1928년 이희경은 대한부인구제회를 탈퇴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영남지역 멸시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경상도 여성들이 '대한부인구제회'를 대거 탈퇴해서다. 이후 이희경은 경상도 출신 여성들을 중심으로 '영남부인회'를 결성했다.

영남부인회는 '실업 발전과 동포 간 친목 증진을 통해 독립을 달성한다'는 목표를 내세웠다. 15년간 교민 여성들의 경제·사회적 지위를 높이는 한편, 모은 수익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지원했다. 자립과 애국을 병행하는 활동을 전개한 것.

1937년 중일전쟁 발발 후, 이희경은 다시 전면에 섰다. 이때 하와이 교포사회는 임시정부를 놓고 이승만 지지파와 반대파로 나뉘어졌다. 하지만 이희경 부부는 갈등의 파고를 뛰어넘어 독립자금과 전쟁 후원금을 모으는 데 주력했다.

1940년대 초 이희경은 대한부인구제회 호노룰루 지방대표로 선출됐다. 미주 한인단체인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재무부위원, 조사부위원 등도 역임했다. 이희경은 하와이에서 1945년 8월 해방소식을 들었다.

광복 직후엔 전후한국구제회의 회계로 추대돼 구국지원 활동을 이어갔다. 하지만 1947년 6월 26일. 그는 하와이 호노룰루에서 교통사고로 안타깝게 생을 마감했다. 향년 53세. 그의 유해는 다이아몬드헤드기념공원에 안장됐다. 정부는 2002년 건국포장을 추서한 후 2004년 유해를 봉환해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 이장했다.

신명고 역사관에 비치된 동창회원명부. 박영민 기자.

신명고 역사관에 비치된 동창회원명부. 박영민 기자.

동창회원명부

동창회원명부 제1회 졸업생 중 이희경 지사의 본명 '이금례'가 적혀있다. 박영민 기자.

◆후손 “어머니는 항상 바쁘셨던 분"…신명고역사관에 남은 이희경의 흔적

“돌이켜보면 내 삶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쓰였어요. 어머니가 생전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살아야 한다는 말씀을 많이 하셨는데, 지금의 성정은 어머니한테서 온 것 같아요."

이희경과 권도인 부부의 직계 후손은 하와이에서 뿌리를 내렸다. 막내딸 권정희(권에스더)씨는 2017년 영남일보와 인터뷰한 기록도 있다. 권씨는 하와이에서 이민법을 전공한 뒤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는 인권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권씨는 독립운동과 생계활동을 병행한 부모를 두고 “늘 바빴다"고 했다. 그는 “어릴 때 부모님을 뵙기 힘들었다. 어머니는 일요일마다 교회와 여성 모임에 갔고, 아버지는 공장에 가거나 발명품을 생각하기에 바빴다"고 전했다.

대구에서 이희경 지사 흔적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주로 하와이에서 국내 항일운동을 후원하는 방식으로 활동해서다. 하지만 모교인 신명고에선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었다.

지난 14일 방문한 신명고 역사관. 내부에 마련된 '신명의 3·1운동 인물' 코너엔 이희경 지사가 첫 번째 인물로 소개돼 있다. 이 역사관은 2007년 개교 100주년을 맞아 개관한 후 2021년 '3·1운동 역사관'으로 새 단장했다. 대구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이라는 명성답게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활약상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신명고 관계자는 “졸업년도 순으로 배치돼 이희경 지사가 가장 먼저 소개됐다"고 했다. 이 곳에 이희경 지사는 “신명여학교 제1회 1번 졸업생이고, 하와이로 되돌아간 후에도 고국을 되살리는데 최선을 다한 인물"이라고 적혀 있다. 역사관에는 오래된 동창회원명부가 비치돼 있다. 한자로 작성된 명부에선 이희경의 본명 '이금례'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대구에서 하와이로 떠난 후에도 조국을 잊지 않고, 평생을 독립운동에 바친 이희경 지사. 80년이 지난 지금, 이희경은 후손들로부터 마땅히 기억돼야 한다.

▶독립운동가 선정 자문위원:

●김영범 대구대 명예교수·김일수 경운대 교수·강윤정 안동대 교수·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우대현 광복회 대구시지부장·변재괴 광복회 대구시지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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