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정희가 '숭정금실((崇禎琴室)'과 함께 윤정현에게 써준 것으로 추정되는 '침계(梣溪)'. <간송미술관 소장>
중국 명나라 마지막 황제 의종의 칙명으로 제작된 거문고가 청나라 때 실학자 박제가의 손에 들려 조선에 건너와 석재(碩齋) 윤행임, 추사(秋史) 김정희, 침계(梣溪) 윤정현 등을 거쳐 사라졌다. 이 곡절 많은 거문고는 물론 우리나라 거문고가 아니라 중국의 칠현금이다. 의종은 칠현금을 즐겼던 모양이다.
명나라 황제 의종의 거문고
숭정금(崇禎琴)에는 '숭정 11년(1683) 무인년 칙명을 받아 태감 신(臣) 장윤덕이 감독하여 만들다'라는 관지(款識:음각 또는 양각으로 새긴 글자)가 있다.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의종의 명령에 따라 제작된 거문고다. 의종 숭정제(1611~1644)가 내시 장윤덕에게 명하여 만들게 한 거문고다. 이 거문고를 타며 즐겼을 의종은 숭정금을 만든 지 7년 뒤 명나라가 망하자 자결했다.
김정희(1786~1856)의 스승 초정(楚亭) 박제가(1750~1805)가 1790년 청나라에서 선물로 받아 온 것을 윤행임(1762~1801)에게 기증했다. 그 후 김정희가 소장하고 있다가 1853년에 윤행임의 아들인 윤정현에게 숭정금을 돌려주었다. 김정희는 이때 '숭정금실(崇禎琴室)'이라는 편액도 함께 주었다.
이 숭정금을 청나라에서 조선으로 들여온 사람은 박제가였다. 박제가가 1790년 청나라 수도 연경에 갔을 때 일이다. 절강총독인 손사의의 동생 손형(孫衡)이 선물로 준 것이다. 손사의는 청의 겅륭제 치하에서 높은 벼슬을 한 인물이다. 그런 연류로 손형은 명나라 황제의 유품을 자신이 소장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웠고 청조에 대한 반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선물했을 것이다. 청나라로 바뀐 지 오래지만 그는 '명나라 물건을 가지고 있기가 꺼림칙하다'라며 주었다고 한다.
박제가는 숭정금을 가져와 친구 연경재(硏經齋) 성해응(1760~1839)에게 보여주었다. 성해응은 규장각 검서관 등으로 근무하면서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등 북학파 실학자들과 교유했다. 성해응은 사연을 듣고 '숭정금명(崇禎琴銘)'이란 글을 지어 주었다.
그 후 박제가는 윤행임에 '마땅히 당신이 가질 만하다'라며 이를 주었다. 윤행임은 병자호란 때 청나라로 끌려가 죽은 삼학사 중 한 사람인 윤집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병자호란 때 여진족 청나라에 굴복하지 않고 죽음을 택한 것이 명나라에 대한 의리이기도 한 만큼, 그 후손이면 명나라 황제가 쓰던 거문고를 가질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윤행임은 이 거문고를 '숭정금'이라 명명하고, 숭정제가 별세한 날이면 이 거문고를 두드리며 울분을 터트리겠다는 내용의 소감을 '숭정금기'로 남겨 놓았다.

추사 김정희의 글씨 '숭정금실((崇禎琴室)'. '숭정금이 있는 서재'라는 의미다. <간송미술관 소장>
추사 김정희의 '숭정금실'
정조의 측근이던 윤행임은 순조 원년 신유박해(1801년) 때 귀양을 간 뒤 이후 사약을 받았다. 집안이 풍비박산이 날 당시, 그 집에 있던 거문고를 어떤 경위인지는 알 수 없으나 김정희가 보관하게 되었다. 그런데 김정희는 함경도 북청으로 두 번째 유배를 가게 된다. 그런데 그곳 감사가 윤행임의 아들 윤정현(1793~1874)이었다. 이때 윤정현은 김정희에게 선친이 애지중지하던 숭정금의 존재를 물었다. 후에 귀양에서 풀려난 추사는 한양으로 돌아와 거문고를 윤정현에게 보내 주었다. 1853년의 일이다.
추사의 글씨 중에 '침계(梣溪)'라는 작품이 있는데, 바로 윤정현과의 인연으로 그를 위해 써준 글씨다. 간송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추사가 이 글씨를 쓰는데, '침'자의 근원을 몰라 30년이 넘게 걸렸다는 작품이다. 30년 전에 호를 써 달라는 부탁을 받고 당초 예서체로 쓰려고 했으나 한나라 비석 등에 '침'자가 없자 함부로 쓰지 못했다. 30년이 지난 후에 해서와 예서의 합체로 쓴 북조시대와 수·당의 금석문 글씨 분위기를 살려 마침내 두 글자를 완성했다고 한다. 발문에 있는 내용이다. 1852년 전후에 쓴 글씨로 추정된다. '숭정금이 있는 서재'라는 의미의 '숭정금실'이라는 글씨도 이때 윤정현에게 써준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당시 조선의 사대부들은 여진의 오랑캐들이 세운 청나라를 경멸하고, 무너진 명나라를 그리워하는 정서가 있었다. 중화의 정통성을 지닌 명나라야말로 소중화(小中華)를 자부하던 조선의 파트너일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명나라 마지막 황제 숭정제가 남긴 숭정금은 각별했을 것이다.
늘그막에 김정희는 윤행임의 아들인 윤정현을 그 문하에 두어 학예에 관한 의견을 나눴다. 김정희가 죽기 전 봉은사에 있을 때 윤정현의 제자들이 문안을 드리러 오기도 했다. 김정희는 죽기 3년 전 침계에게 서재에 있던 숭정금을 건네준다. '숭정금실' 글씨도 함께 선물했다.
숭정금이 지금도 어디에 남아있는지, 사라졌다면 어떻게 사라졌는지 알 수 없으나 우리나라에 건너와서도 품게 된 많은 사연은 지금도 이렇게 전해지고 있다. 다행히 그 사연을 품고 있는, 추사체의 진수를 담고 있다는 편액 글씨 '숭정금실'은 전하고 있다.
'숭정금실( 崇禎琴室)' 글씨의 의미
김정희의 제자이자 연하의 친구이기도 했던 윤정현은 김정희가 예순여섯 나이에 함경도 북청 땅에 귀양을 가자 김정희를 돌봐 주기 위해 함경감사 직을 자청하였다고 한다. 변방의 관찰사를 자임하며 곁을 지켜준 윤정현의 속 깊은 마음을 고맙게 새기며 무사히 귀양살이를 마친 김정희는 그를 위해 '숭정금실(崇禎琴室)'을 썼다고 보는데, 이 글씨를 다음과 같이 흥미롭게 평한 이도 있다.
김정희는 명나라 마지막 황제 의종의 연호인 '숭정(崇禎)'을 기울어진 왕조로 그려내고 있다고 보았다. '산(山)'을 기울어지게 쓴 '숭(崇)'자는 '몰락을 앞둔 왕조' 혹은 '끝이 보이는 왕조'라는 의미로 몰락하는 명나라 황실의 모습을 그려냈다는 것. 글자 '정(禎)'자는 명 황실에 대한 의리를 내세우며 장황하게 떠들고 있지만, 능력도 의지도 없이 살만 뒤룩뒤룩 찐 조선의 성리학자들의 모습을 비유해 놓았다는 것.
또 '금(琴)'자는 '금(今)' 부분이 '인(人)'과 '소(小)'로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미 200년 전에 멸망한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내세우며 아직도 두 왕조(명과 청) 사이에서 조정의 분란을 조장하는 소인배들을 뜻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실(室)'자는 용마루에 해당하는 부분이 좌측 지붕면 끝에 매달려 있고, 우측 지붕 선은 용마루와 떨어져 있어 온전한 지붕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미 망해버린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내세우면서 자신들의 배만 채우고 있다며 세도가에 대한 불만을 드러내고 있다고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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