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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진 변호사 |
인명사고는 없었다는 뉴스를 확인하고서야 스마트폰 뉴스 창을 덮을 수 있었다. 방화 직후 신고가 재빨리 이루어졌고, 열차는 비상 정지해 승객들은 선로를 따라 무사히 대피했고, 불은 신속히 진화되어 지하철도 곧 운행 재개되었다. 대구지하철 참사 후 전국의 지하철 내장재가 모두 절연재로 바뀌었고, 승무원들은 정기적인 화재 모의 훈련을 통해 위기에 대처할 수 있었고, 승객들도 침착하게 대응했던 덕이다. 다행이다 되뇌면서도, 한편으로는 지하철에 휘발유통을 들고 탄 방화범은 도대체 무슨 심정으로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그런 위해를 계획했을까 생각하니 여전히 마음이 무거웠다.
누군가의 불행이 단순히 그 사람과 가족의 불행으로 끝나지 않고 사회에 크나큰 비극을 만들어낼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처음으로 강렬하게 각인된 게 대구지하철 방화 사건 때이다. 몸도 마음도 아팠던 한 남자가 세상에 대한 증오를 지하철 방화로 표출한 결과는 끔찍했다. 190여명의 사상자와 150여명의 부상자라는 피해규모는 단순히 사상 최악의 숫자가 아니라 피해자가 그 누구든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물론 단순한 '사건'으로도 끝날 수 있었을 방화가 '대참사'로 번지게 된 데에는 우리 사회의 총체적으로 부실한 시스템 탓이 컸지만, 불행했던 한 사람의 극단적인 화풀이가 그 원인을 제공한 것도 사실이다.
그 후로도 우리는 스스로를 불행하다고 여기며 세상에 불만을 가진 사람이 일으킨 사회적 비극을 자주 겪었다. 자신이 사는 아파트에 불을 지른 후 아파트 복도에 숨어 있다가 연기를 피해 대피하는 사람들에게 거침없이 칼을 휘두른 사건도 있었고, 개인적 송사 결과에 불만을 품고 국보에 불을 지른 사람도 있었으며, 심지어는 자신의 일터에서 가장 연약한 존재를 희생자로 삼아 '너 죽고 나 죽자'던 사람도 있었다.
인생이 뜻대로 풀리지 않고, 남들보다 상대적으로 운이 없어 불행을 맞이하는 사람들은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늘 있기 마련이다. 문제는, 극히 일부라 할지라도, 그들의 분노가 불특정 다수를 향하는 경우가 전혀 줄어들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단순히 이상한 사람, 미친 사람이 일으킨 사고라고 치부하며 방치하기엔 그 위험이 크고, 형벌을 세게 해도 문제 해결은 되지 않는다. 조금 다른 의미에서긴 하지만, 코로나 때 실감했듯,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빈부 격차의 심화로 양극화된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 경쟁적인 사회 분위기에서 낙오되는 이들, 정신적 문제를 충분히 치료받지 못하고 있는 이들의 불특정 다수를 향한 분노를 적절하게 누그러뜨리는 것은 소외된 이들만을 위한 정책이 아니다. 그건 우리 모두의 안전과 직결되어 있다.
어제 임기를 시작한 새 대통령은 '통합'을 강조했다. 일차적으로는 정치적 색깔을 달리하는 이들 사이의 통합이 급선무이겠지만, 소외된 이들의 분노와 좌절을 품을 수 있는 사회 통합에까지 이르러 무엇보다 안전한 나라를 만들어 나가는 '통합'의 길을 기대한다.
정혜진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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