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둘째 아이의 꿈은 만화가다. 정확히는 웹툰 작가나 애니메이터다. 아이가 미술에 흥미가 있다는 걸 안 건 몇 해 전이다. 자연스레 동네 미술학원부터 등록했다. 하지만 일주일 만에 아이는 학원을 거부했다. "나는 매일 사과를 그리고 싶은 게 아니에요" 학원에서는 반복되는 기초다지기 과정이 지겨웠던 게다. 아이는 자신이 좋아하는 만화 캐릭터를 그리고 싶어했다.
결국 방향을 틀었다. 옆 동네에 있는 캐릭터 전문 애니메이션 학원에 보냈다. 버스를 타고 다니는 것도 괜찮다고 했다. 한 달 학원비가 적지 않았고, 아이는 매일 포켓몬스터나 에반게리온을 그려왔다. 솔직히 처음엔 회의적이었다. 그런데 아이는 날마다 즐거워했다. 몇 달 지나지 않아 실력은 눈에 띄게 늘었다. 아이는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할 때 가장 빨리 자란다. 그 당연한 진실을 나는 아이를 통해 다시 배웠다.
하지만 고민은 여전하다. 영어학원 때문이다. 아이는 영어를 배우는 게 납득이 안 된다고 했다. "요즘에는 AI가 다 해석해 주는데, 왜 영어를 매일 배워야 해요?" 나는 매번 "여행을 가려면 영어는 필수야"라고 설득했지만, 아이는 "평생 몇 번 갈지도 모를 여행을 위해 왜 몇 년을 학원에 다녀야 하냐"며 물었다. 듣고 보니 반박이 쉽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가 AI와 영어로 대화하며 캐릭터를 만드는 모습을 봤다. 어렴풋한 상상을 AI가 구체화해주는 과정이 재미있다고 했다. 몇 시간을 앉아 있어도 지루하지 않다고 했다. 숙제는 질색이던 아이가, 캐릭터를 만들 땐 영어 단어를 하나하나 찾아가며 대화했다. 영어는 여전히 어렵다 했지만, 좋아하는 일을 할 때는 자연스레 따라왔다. 교육이란 게 꼭 '시키는 것'만은 아니라는 걸 새삼 느꼈다.
기자로 일하는 나도 요즘은 AI의 도움을 받는다. 아이템을 정리하거나 기사 초안을 구성할 때 AI는 든든한 동료가 된다. 처음엔 사용 사실을 숨기고 싶었다. 혹시라도 실력이 부족해서 AI에 기대는 것처럼 보일까 두렵기도 했고, 실제로 내 글쓰기 능력이 퇴보하진 않을까 걱정도 됐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나자 생각이 달라졌다. 문장은 더 또렷해졌고, 아이템도 이전보다 선명해졌다. 좋아하는 일을 더 잘하게 도와주는 도구일 뿐이라는 걸, 이제는 몸으로 느낀다.
생각해보면 아이와 나는 같은 고민을 다른 방식으로 풀어가고 있었다. AI 시대에 중요한 건 기술이 아니라, 내가 진짜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아는 일이다. 그것만 있다면 AI는 든든한 동반자다. 아이는 캐릭터를 그리고, 나는 기사를 쓴다. 둘 다 AI를 곁에 두고. 그러니 이제는, 아이에게 배워도 괜찮겠다.

이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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