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영심 법무법인 율빛 대표변호사
여름 휴가철이 다가온다. 올해 유난히 폭염이 일찍 시작된 탓인지 시원한 곳으로 빨리 피서를 떠나고 싶다. 짙푸른 파도가 씩씩하게 넘실대는 동해, 새색시처럼 얌전한 남해, 에메랄드빛 아름다운 색감의 제주 바다, 그 어디든 여름 바다는 몸속 열기를 식혀준다. 여행은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서 벗어나 잠시 환상 속에서 머무는 시간이고 긴장의 끈을 풀어주는 시간이기에 그 시작에는 늘 설렘이 있는 것 같다.
이십 대에 두 달간 유럽 배낭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다. 내 몸의 절반 정도 되는 큰 배낭을 등에 짊어지고 열몇몇 나라 곳곳을 돌아다녔다. 돈 없는 젊은이들의 여행이 다 그렇듯 나 역시 숙박비를 아끼기 위해 밤 기차를 타고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이동했는데, 컴파트먼트라고 하는 별도의 문이 달린 독방 칸에 올라 의자를 붙여 만든 침대에서 잠을 잔다는 게 참 신기했었다. 여행 중 식사는 현지에서 파는 값싼 것으로 해결했지만 항상 맛있었고 새로웠다. 가끔 현지인의 집을 빌려 며칠 머물 때는 마트에서 사 온 재료로 고향 음식과 비슷한 요리를 만들어 먹기도 했다. 그때는 여행이란 게 많은 곳을 돌아다녀야 하는 것인 줄 알고 박물관, 미술관, 유적지 등 도시 곳곳을 발로 누비며 다녔다. 여행안내 책자에서 유명하다고 소개한 곳은 전부 가보고, 많은 도시를 보고 싶었기에 일정을 빡빡하게 채워 하루하루를 바쁘게 돌아다녔다. 여행지에서 알게 된 사람들과 여행 정보를 교환하고, 웃고 떠들며 얘기를 나눈 것도 재밌었다. 시간이 지나 가끔 그때를 생각하면, 내가 여행한 장소가 너무 많아 그 장소가 어디였는지, 어땠는지는 모두 생각나지 않지만, 그 때 만난 사람들, 그 사람들과 나눈 대화는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그러고 보면 여행이란 게 어쩌면 '장소' 보다는 '사람'과의 만남이 더 중요한 것 같기도 하다.
김영하 작가는 '여행의 이유'에서 "한참의 세월이 지나 오래전에 겪은 멀미의 기억과 파장을 떠올리고, 그러다 문득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알게 되는 것, 생각해보면 나에게 여행은 언제나 그런 것이다"라고 했다. 그 말이 참 공감되는 게, 이십 대 그 시절 나의 여행은 모든 시선을 외부로 향한 채 바깥세상을 탐험하는 것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행복 속에 있던 나를 만난 시간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여행이란 낯선 곳에서, 낯선 '나'를 만나는 것임을 깨닫는다.
올 여름 분주한 일정을 조율해 여행계획을 세웠다. 여행은 설렘으로 시작하는 게 제맛인데, 막상 떠날 날이 다가오자 묵직한 부담이 어깨를 짓누른다.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쌓이는 일을 생각하니 돌아온 이후의 일상이 더 힘들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인 것 같다. 하지만 일상의 익숙함 속에서 무뎌지고 있는 내 감각, 내 돌봄의 부재를 깨닫는 순간 여행은 포기할 수 없는 것이 된다. 어떤 책에서 읽은 말이다. '지금 여기서 행복하기'의 줄임말이 바로 '여행'이라고. 이십 대의 내가 그랬듯 이번 여행에서도 나는 '행복한 나'를 만나고 싶다. 하루 두 끼를 여유 있게 먹고, 작가의 좋은 작품을 볼 수 있는 곳에서 유유자적 시간을 보내고, 스쳐 지나가는 풍경 속에서 복잡했던 생각들이 조용히 정리되기를 바란다. 교감신경 스위치를 잠시 꺼두는 것, 어쩌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쉼이란 달리 특별한 뭐가 아니라 복잡한 머릿속을, 가득했던 마음의 무게를 조금 덜어내는 일이니까. 일찍 시작된 무더위를 식힐 수 있는 곳으로 떠나 '지금 여기서 행복'한 시간을 가지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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