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덕률 전 대구대 총장
내란 특검이 본격 가동되기 시작했고 윤석열은 다시 구속됐다. 드디어 내란극복의 첫발을 뗀 것이다. 머잖아 내란의 전모가 드러날 것이고 관련자들은 법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국민도 이제야 한숨을 돌리고 있다.
# 내란극복의 최소한-책임자 처벌
하지만 유의할 점이 없지 않다. 내란 공범들이 여전히 국가기구 곳곳에 포진하고 있어서다. 사실상 내란에 동조해온 제1야당은 반성도 쇄신도 없이 야당 탄압과 정치보복 프레임으로 맞서고 있는 것도 위협 요인이다.
뿐만 아니다. 우리에겐 미진한 역사청산으로 인한 트라우마가 있다. 반민특위 실패가 대표적이다. 이승만정부는 친일 인사들을 국가기구의 요직에 발탁했다. 빠른 행정 안정을 위해서라고 했다. 청산은 좌절됐고 진실과 정의는 묻혔다. 역사왜곡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고 우리는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 있다. 예컨대 리박스쿨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5공 청산에 사실상 실패한 것도 악몽이다. 아직도 진실규명은 미진하고 5·18 폄훼 발언은 계속되고 있다. 심지어 지난 5월에는 김문수후보 선대위가 5·18 학살의 공수부대 책임자였던 정호용씨를 상임고문으로 임명했다가 5시간 만에 해촉한 일도 있었다. 일제 때 무장독립운동에 헌신했던 김원봉 의열단장이 1947년 2월, 해방된 조국에서 친일 고문 경찰 노덕술에게 뺨 맞았던 사건만큼이나 끔찍한 일이었다.
스페인이 지금까지 몸살을 앓고 있는 것도 우리에겐 교훈이다. 39년을 철권통치한 프랑코가 1975년 11월에 사망했지만 정치권의 좌우 진영은 '망각의 협약'을 통해 과거청산을 유보한 것이다. 스페인 내전(1936∼1939년) 후 10여년 동안 '빨갱이 소탕'을 내걸고 5만명 넘게 처형한 프랑코와 측근 권력자들의 처벌을 묻어두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진실과 정의는 영원히 죽지 않는 법. 2000년대 들어와 시민들은 진실과 정의를 향한 '기억 투쟁'을 시작했고 2007년 '역사적 기억법'을 제정하기에 이르렀다.
내란특검은 정의를 세우고 민주주의를 복원한다는 역사적 책임감으로 진실규명과 책임자 처벌에 나서야 할 것이다. 청산 실패로 불의의 싹과 어두운 역사의 짐을 또다시 후세대에 떠넘겨서는 안될 것이다.
# 내란극복의 더큰 차원-제도개혁
그리고 이제는 한걸음 더 나아가야 할 때다. 특검에 의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은 '내란극복의 최소한'이기 때문이다. 12·3 내란을 하나의 일탈 사건이 아니라 구조의 산물로 보는 관점 전환이 필요하다. 그를 통해 극우와 폭력이 번창하게 된 사회경제적 토양을 분석하고 제도개혁에 나서야 한다. 권력집단에 의한 반인륜범죄, 헌정유린, 극우, 쿠데타 등이 발붙일 수 없는 사회로 재구성하는 일에 역량을 쏟아야 한다. '내란극복 이후의 내란극복', 더 본질적이고 더 큰 차원의 내란극복, '형식적 민주주의를 넘어선 실질적 민주주의'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요체는 제도개혁이다. 무엇보다 권력의 시녀로 전락한 검찰과 군, 헌정파괴에 동원된 헌법기구들을 바로 세우는 것이 시급하다. 감사원과 방송통신위원회와 국가인권위원회 등 주요 국가기구들의 제도적 허점도 찾아 정비해야 한다. 특정 정파와 권력자가 아니라 주권자인 국민에 헌신하는 국가기구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것이 제도개혁의 기본이자 방향이다.
서독의 사례는 많은 시사점을 준다. 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뒤 1970년대에 들어서야 '과거사 청산'에 본격 나선 서독은 다시는 나치즘과 극우주의가 준동하지 못하도록 다양한 제도적 장치들을 강구했다. 헌법수호기관 설치, 혐오표현 금지법 강화, 나치 상징 사용금지 등이 대표적인 예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켜내기 위해서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파괴하려는 세력의 자유를 제한해야 한다'는 '방어적 민주주의' 개념을 적극 활용한 것도 참고할 만하다.
언론개혁 역시 매우 중요하다. 가짜뉴스와 선동으로 가득한 혐오 콘텐츠와 망가진 공론장, 권력과 자본에 장악된 신문과 방송을 개혁하는 일도 튼튼한 민주주의 건설을 위해 시급한 과제다.
사회경제적 양극화도 중요한 숙제다. 양극화가 극우의 온상이라는 사실은 이미 많은 나라들에서 확인된 바다. 계층간 통합과 절대 빈곤층을 위한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 아울러 2030 세대가 겪는 박탈감과 좌절감에 주목하면서 그들이 미래에 희망을 가질 수 있게 하는 사회경제적 개혁에 나서야 한다.
# 내란극복의 궁극적 차원–교육개혁
내친김에 하나 더 욕심을 내자. 시민의 주권의식과 민주역량을 강화하는 데까지 나아가는 것이다. 12·3 내란을 이겨내는 과정에서도 경험했듯이 '깨어있는 시민'은 민주주의의 마지막 보루다. 그리고 그 열쇠는 '교육'에 있고 교육 혁신이야말로 '내란극복의 궁극적 차원'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의 우리 교육이 민주시민을 길러내기에 턱없이 부족하다는 데는 이론이 없다. 윤석열 전 대통령부터 내란에 직간접으로 연루된 각계 엘리트들이 '최고' 학부를 졸업한 이들이라는 사실보다 '교육의 실패'를 더 잘 설명해주는 것도 없다.
이제는 바꿔야 한다. △점수따는 요령을 길러주는 입시교육 △끔찍한 '7세 고시, 4세 고시'까지 낳고야 만 극한 경쟁교육 △혐오와 차별을 부추기는 반(反)교육을 그대로 끌고 갈 수는 없다. 그 대신 '생각하는 힘을 길러주는 토론교육' '더불어 살아가는 협동교육' '헌법정신에 바탕한 민주시민교육'으로 방향을 틀어야 한다. 아이들의 교실도 '작은 엄석대들'이 판치는 '완장과 굴종의 훈련장'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산 교육장'으로 살려내야 한다. 학교교육 뿐만이 아니다. 평생교육도 시민이 공공의 문제를 고민하면서 정치적 견해 차이를 적대가 아닌 토론으로 풀어가는 시민적 지혜를 키우는 일에 관심가져야 한다.
어느덧 12·3 내란 후 7개월 반이 흘렀다. 그동안 벼랑 끝까지 내몰린 헌정질서를 지켜내느라 온 국민이 말할 수 없이 큰 피해와 고통을 치렀다. 그리고 이틀 뒤면 77주년 제헌절이다. 지난주 한숨 돌리게 된 우리는 이제 더 큰 목표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방향은 명확하다. 진실과 정의, 헌법정신에 기초해 진정한 사회통합을 이루고 제도개혁과 교육개혁으로 더 튼튼한 민주주의를 세워내는 것이다. 새 정부와 국민이 함께 다짐하는 제헌절이기를 바란다. 특히 국회가, 특히 12·3 내란 후 길잃은 제1야당이 헌법의 의미와 무게를 새기고 최소한 헌법수호 정당이기를 다짐하는 제헌절 주간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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