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목의 시와 함께] 조연호 ‘저녁의 기원’

  • 신용목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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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5-07-21 06:28  |  발행일 2025-07-20
신용목 시인

신용목 시인


옥상에서 바람을 만지던 시간, 모두 비슷한 맛의 눈물을 흘린 시간. 길고 맑은 살의 우산을 펴고 바람은 누나의 물 빠진 치마와 놀았다.


포플러가 그린 난곡의 악보 덕에 노래들은 하수처리장으로 떠가는 빨간 실지렁이들과 긴 여름을 함께했다.


햇포도처럼 어젯밤이 무겁게 열리면 달은 자라던 것을 멈추고 다시 씨앗으로 돌아간다.


동생이 줄긋기 연습을 하던 시간, 팔뚝에 붉은 줄을 긋고 조용히 울던 시간. 내가 아는 모든 바람은 자기를 일으켜 세울 먼지 몇 줌을 쥐고 태어났었다.


난 단지 잡았던 끝을 어떻게 놓아야 할지 몰랐을 뿐이다.


조연호, '저녁의 기원'


비슷한 맛의 눈물을 공유한 세 남매는 여름 복판에 놓여 있다. '길고 맑은 살의 우산을 편 바람', '난곡의 악보를 그리는 포플러'에 매달린 풍경은 쇠락하고 스산하고 음습한 분위기 속으로 그들을 몰고 간다. 그러나 이 시가 돌봄의 부재와 그로 인한 비극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아직은 그 정체를 알 수 없지만 '먼지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는 바람'처럼 미약하고 연약할지언정 이 시는 어떤 시작의 기미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햇포도의 씨앗을 품은 달이거나 그 달을 울리는 울음처럼 말이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우리가 우리의 기원으로부터 영원히 추방된 채 과거의 바깥이자 미래의 바깥을 살고 있다는 자각일지도 모른다. 아무리 달아나도 멀어질 수 없는, 아무리 발버둥쳐도 놓여날 수 없는, 아무리 깊은 절망 뒤에 숨어도 뚜벅뚜벅 적막을 걸어 끝내 우리를 찾아내는, 우리가 시작된 바로 그 이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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